슬픔을 대하는 태도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었다. 버스를 타고 약간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카페에 가서 같이 일하는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친구들 반응이 뭔가 미묘하게 다른 게 느껴졌다.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말투였달까.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하는 생각을 하며 바쁘게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 한 친구가 사정이 생겨 집을 가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친구를 대신해 사장 동생이 곧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 친구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은근슬쩍 물었다.
“무슨 일 있대?”
그랬더니 충격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친한 친구가 자살을 했대.”
다른 동료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걱정되는 마음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어렵게 입을 떼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친한 친구가 자살을 했어. 평소에 심리적 문제가 있었던 친구라 걱정하고 있었는데..”
동료들은 잠시 멍했다. 그리고 물었다.
“너 오늘 일할 수 있겠어? 네 슬픔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시간을 가져도 돼.” 따스하고 자상한 물음이었다.
급하게 일할 다른 누군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불평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하지 말고 네가 괜찮을 때까지 쉬어도 돼.”
사실 나는 이 상황이 당혹스럽고 놀라우면서도 좋았다. 타인의 슬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것을 존중해 주는 사람들과 같이 일한다는 사실이 좋았고, 자신의 슬픔을 충분히 숙고할 수 있는 제도들이 좋았다.
나는 저절로 이런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만약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면 우리는 슬픔을 충분히 애도할 수 있었을까?’, ‘나는 내 슬픔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눈치 보지 않을 수 있었을까?’아마 가족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직계 가족이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생각을 곱씹으면서 그런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일하는 기계도 아닌데, 왜 일하기 위해서 감정을 컨트롤해야 하나.’
‘왜 우리는 가족이 친구보다 우선이라고 여기나.’
‘누군가는 가족이 없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가족이 남보다 못할 수도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너무 가혹한 건 아닌가.’
‘동성애자임을 숨겨야 하는 사람이라면 파트너의 죽음을 친구의 죽음이라고 말해야 하나?’
결국 질문의 끝은
우리는 다양성과 인간성을 더 존중해야 한다. 였다
나는 우리가 충분히 슬프고, 충분히 공감하고, 충분히 여유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소중한 것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