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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이월의 봄 Jun 28. 2023

소개할 '물건' : 선생님?

[아이들의 말과 글을 수집합니다. 예쁘고, 귀여워서요.]

2023년 2월 겨울밤. <아름다움 수집 일기, 이화정 지음>라는 책을 보았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나는 어떤 아름다움을 수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이가 셋. 짧은 하루 속에서 틈틈이 문장을 수집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아줌마가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잠들면, 오롯한 고요 앞에서 책을 읽는 그 시간이 귀하고, 벅차도록 행복하다는 것을, 또 책 앞에서 다시금 알게 된 것이다. 사각사각 독서노트에 문장이 수집되는 소리와 달짝지근한 막둥이 아가의 숨소리가 포개어질 때면, 무언가 다시 시작할 마음이 샘솟았다. 그런 밤이면, 내일 하루도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예쁘고 귀여워서' 수집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그 겨울밤에 깨닫게 되었다. 바로, 아이들의 말과 글이다. 아이들의 말과 글은 한번 마음에 들어오면,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신비롭고 사랑스러운 매력이 있다. 그 나이, 딱 그 맘 때에만 할 수 있는 말. 그 시절에만 남길 수 있는 글들이 마음을 녹이고, 얼리고, 또 출렁이게 한다.  


가만 생각해 보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했던 기록물들을 처분하지 않고 간직하는 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발을 디딘, 1학년 삐약이들의 수업 시간. 우리 교실에 있는 '물건' 중 하나를 골라 가족에게 소개해보자고 했는데... 고심해서 고른 그 물건이 바로 '나' 아니던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싶다. 졸지에 사람이 아닌 '물건'이 되었지만, 이렇게 행복한 물건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교실에 있는 물건 중에서 하나를 정하여 가족에게 소개하여 봅시다.

소개할 물건 : 선생님
소개할 내용: 선생님은 美人입니다.


(하하하!)  때는 바야흐로 2012년. 초임 교사였던 시절이니, 아이들은 젊은 아가씨였던 담임 선생님을 TV 속 연예인과 견주어가며 큰 사랑을 주었다. 물론, 선생님 눈에도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아이돌'이다. 선생님을 '물건'으로 재발견해준 친구에게 감탄을 하고 있는 사이, 다른 친구가 교과서를 쓰윽- 선생님 앞에 내밀었는데... 이번에는 심지어 '영광'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소개할 물건 : 꽃

소개할 내용 : 예쁜 꽃. 너무 선생님처럼 아름답습니다.


아니, 선생님이 꽃처럼 아름다운 것도 감동일 텐데... 꽃이 선생님처럼 아름답다니. 1학년 담임을 하며, 둥글고 순한, 커다랗고 따스한 아이들의 사랑에 마음 깊이 고마울 때가 참 많았다.




2012년에 1학년이었던 이 친구들은 2023년에 벌써 고3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를 셋 낳은 엄마가 되고 보니, 첫 아이와의 사랑은 첫사랑의 뜨거움에 견줄만하다. 요 아이들과도 그랬다. 병아리 같은 선생님과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만나 아주 열렬히 사랑했다. 실수투성이의 엉망진창인 하루도, 의욕만 앞서 제풀에 꺾였던 시간도, 피곤한 줄 모르고 진심으로 즐거워서 온 마음과 체력을 쏟았던 시간도 돌아보니 첫사랑에 버금가는 뜨거운 사랑이었다.


우리 집 작은 아씨들에 비유해 보자면, 첫 아이의 앨범이 제일 많고, 둘째는 그다음이요, 셋째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럴 수 있겠지만 첫째, 둘째에 비해 찍어주는 사진도 훨씬 적다. 이 시절에는, 아이들의 모든 게 신비하고 예뻐 보여서 아이들이 접어준 종이접기, 편지, 교과서의 글, 심지어 낙서 종이까지도 모으곤 했다. 이 시절 아이들의 기록이 제일 많다. 엄마가 되어 돌아보니, 첫 아이를 키웠던 마음과 초임교사 시절의 내가 꽤 비슷했던 것 같다.




<아름다움 수집일기>에는 이런 글이 있다.

아름다움 수집 일기를 정리하며 책을 쓰는 동안 깨달았다. 아름다움은 결국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p.13 <아름다움 수집일기, 이화정 지음, 책구름>


예쁘고 귀여워서. 아이들의 말과 글을 모았다. 학교에서 내가 만난 아이들 덕분에, 엄마가 되어 만난 우리 아이들의 말과 글도 모을 수 있었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콩나물처럼 자라는 아이들은 한 달만 지나도, 불과 한 달 전의 모습이 무척이나 더 어리게 느껴지는 시간의 신비를 품은 존재들이니까.


어젯밤 곱게 내려앉았던 눈이,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스르륵- 녹고 만 아침 풍경처럼. 녹아 사라지게 될 그 시간들 속에서, 아이들의 말과 글은 신비하고도 예쁜 눈의 결정체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움을, 예쁨을, 사랑스러움을, 귀함을 발견하는 것. 어쩌면 모두 '사랑'일지도 모른다.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러 아이들은 고3이 되고, 선생님은 아이가 셋인 엄마가 되었다. 그 시절 우리들의 모습은 눈 녹듯 어디론가 사라졌을 것이다. 아이들은 몰라보게 자랐고, 선생님은 몰라보게 늙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느라, 그들의 세상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열심히 바라보았던 초임 선생님과 눈의 결정체처럼 다 다른 모습으로 예뻤던 아이들의 모습은 한 편의 '아름다움 수집 일기'가 되어 이렇게 남아 있다. 녹지 않을 풍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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