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테이블에서 '우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에 관한 연구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늘 비슷한 고민이 떠오릅니다. “이번에는 얼마나 강하게 밀어붙여야 할까?”
그런데 막상 상대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망설여집니다. 특히 지금 눈앞의 상대가, 앞으로도 계속 함께 일해야 할 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18년간 HR 현장에서 협상을 하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관계’를 먼저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결과’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리고 이 차이가 협상의 과정과 결과에 꽤 큰 영향을 줍니다.
오늘은 이 ‘관계 지향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협상자의 성향이 협상에서 어떤 경험과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같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좋은 협상이 남기는 것은 숫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쌓이는 신뢰와 관계 자본이기도 하니까요.
오늘 함께 이어갈 질문은 이렇습니다.
“협상자가 관계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협상 결과는 실제로 달라질까?
그리고 협상 상대와의 관계 강도(친구 vs 낯선 사람)는 이 효과를 바꿀까?”
전통적인 협상 연구는 오랫동안 경제적 결과에 집중해 왔습니다. “얼마나 많이 얻었는가”, “누가 더 유리한 조건을 따냈는가” 같은 질문들입니다.
하지만 실제 비즈니스에서는 관계 자본이 중요합니다. 오늘 테이블에서 마주 앉은 상대가, 내일은 파트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협상에서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들은 어떤 경험과 결과를 만들어낼까요?
그리고 상대가 친구인지, 완전한 타인인지에 따라 이 효과는 달라질까요?
벨기에 Vlerick 경영대학원의 Ann-Sophie De Pauw 교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126쌍을 대상으로 한 협상 실험을 설계했습니다. 핵심 개념은 앞선 연구에서도 등장한 관계 지향적 자기개념(Relational Self-Construal, RSC)입니다.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떠올릴 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정의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며, 나만의 특성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중요한 관계들 속에서 정의되는 사람이다”라고 느낍니다.
후자가 바로 관계 지향적 자기개념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관계, 소속 집단, 맡은 역할은 자기 정체성의 핵심입니다. ‘나’에 대해 생각할 때, 자동으로 가까운 사람들도 함께 떠오르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한편 협상 맥락에서 관계 지향성은 “이 협상자가 상대와의 관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느냐”를 의미합니다.
관계 지향성이 높은 사람들은
관계를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것으로 보고,
장기적 협력을 더 자주 떠올리고,
관계를 해칠 수 있는 거친 전술을 상대적으로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연구의 흥미로운 점은, 참가자들을 일부러 다른 조합으로 짝지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270명의 관계 지향성을 측정한 뒤, 세 가지 유형의 쌍을 만들었습니다.
둘 다 관계 지향성이 높은 쌍
둘 다 관계 지향성이 낮은 쌍
한 명은 높고, 한 명은 낮은 혼합 쌍
그 다음, 자동차 구매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한 사람은 구매자, 다른 한 사람은 판매자 역할을 맡았습니다.
할부금·보증기간은 통합적 이슈(서로 양보하며 파이를 키울 수 있는 이슈)
배송일은 분배적 이슈(한쪽이 얻으면 다른 쪽이 잃는 이슈)로 설계되었습니다.
연구 결과, 관계 지향성은 경제적 점수보다 주관적 경험에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관적 가치란,
협상 과정이 공정하게 느껴졌는지,
내 자신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상대와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느끼는지,
전체적으로 “이번 협상 괜찮았다”고 생각하는지 같은 요소들입니다.
흥미롭게도,
둘 다 관계 지향성이 낮은 쌍이 가장 낮은 주관적 가치를 기록했습니다.
한편, 한 명은 높고 한 명은 낮은 혼합 쌍이 오히려 더 나은 주관적 가치를 보였습니다.
즉,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지, 둘 다 관계에 무관심한 조합이 가장 안 좋다.”
는 메시지를 줍니다. “둘 다 관계를 너무 놓고 가는 경우”가 최악의 시나리오에 가까웠던 셈입니다.
의외였던 점은, 관계 지향성이 경제적 점수에는 뚜렷한 차이를 만들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연구 결과,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더 손해 보거나, 더 이득을 본다는 명확한 패턴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연구진은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1) 실험 지시가 “당신의 점수를 최대화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관계 지향적인 사람들도 일단 점수 중심으로 움직였을 수 있습니다.
(2) 일회성 협상이었기 때문에, “관계를 지켜야 할 동기” 자체가 상대적으로 약했을 수 있습니다.
즉, “관계를 중시하는 성향”이 있다고 해서, 일회성·점수 중심 구조에서 바로 숫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연구진은 “상대가 친구냐 낯선 사람이냐”가 관계 지향성의 효과를 조절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조절 효과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친구와의 협상이라고 해서, 관계 지향성이 경제적 결과를 다르게 만드는 패턴은 뚜렷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역시 설계와 연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미래 상호작용에 대한 기대가 거의 고려되지 않는 단기 실험협상이었기 때문에, 참가자들이 관계 지향성을 깊게 활용할 이유를 덜 느꼈을 수 있습니다.
이 논문을 읽으면서, 어느 해 중재했던 두 부서 간 업무 조율 회의가 떠올랐습니다.
A 부서장은 전형적인 관계 지향형이었습니다. 회의 시작 전에 안부를 묻고, 상대 부서의 고생을 인정해주며,
“우리 같이 좋은 방안을 찾아보죠”라는 언어를 자주 썼습니다.
B 부서장은 철저한 결과 중심형이었습니다. “우리 부서에 필요한 것은 이거고, 이를 위해 이만큼의 리소스가 필요합니다”라며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리스트업 했습니다.
초반 두 차례 회의는 평행선이었습니다.
A 부서장은 B 부서장의 직설적인 태도를 “너무 세다”고 느꼈고,
B 부서장은 A 부서장의 간접적 표현을 “답답하다”고 느꼈습니다.
논문 표현대로라면, ‘혼합 쌍’이 만들어내는 긴장이 그대로 드러난 상황이었습니다.
전환점은 세 번째 회의였습니다. 저는 양측의 핵심 관심사를 화이트보드에 구조화해 놓고,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A 부서장에게는: “지금 말씀하신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인 숫자로 적어봐 주시겠어요?”
B 부서장에게는: “A 부서의 제안이 장기적으로 양쪽 부서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그 관점에서도 같이 한 번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후 협상은 달라졌습니다. A 부서장은 여전히 관계적 언어를 사용했지만, 동시에 구체적인 수치와 조건을 함께 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B 부서장은 여전히 직접적이었지만, 상대의 입장을 언급하고 “이 부분은 우리도 이해한다”는 문장을 섞기 시작했습니다.
최종 합의된 내용은 초기 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협상 경험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A 부서장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고, 앞으로도 같이 갈 수 있겠다”고 답했고,
B 부서장은 “서로에게 필요한 게 명확해져서 좋았다”고 평가했습니다.
논문의 메시지처럼, 두 사람 모두 관계에 무관심한 조합보다, 한쪽이라도 관계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을 때 주관적 만족도가 훨씬 높아질 수 있다는 걸 현장에서 다시 확인한 장면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재자의 역할은, 서로 다른 지향성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언어를 들을 수 있게 번역해주는 통로를 만들어 주는 일이었습니다.
이 연구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실무에서 활용하기 위해, 단계별로 질문을 정리해 봤습니다.
(1) 자기 이해를 위한 질문
나는 협상에서 즉각적 결과와 장기적 관계 중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나는 나 자신을 더 독립적 개인으로 느끼는가, 아니면 관계 속의 존재로 느끼는가?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의 감정·입장이 내 판단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가?
(2) 상대를 읽기 위한 질문
상대는 관계 지향적인가, 결과 지향적인가?
말 속에 ‘우리’, ‘함께’, ‘관계’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가, 아니면 숫자·조건·리스크 같은 표현이 더 많은가?
합의 내용보다 합의 과정을 더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3) 전략을 조정하기 위한 질문
나와 상대의 지향성이 다르다면, 소통 방식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까?
ㄴ 관계 지향적인 상대에게는: 공감·맥락·장기적 의미를 먼저 이야기해주고,
ㄴ 결과 지향적인 상대에게는: 숫자·기준·구체적 조건을 분명히 제시하는 식으로.
지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관계인가, 실질적 이익인가? 둘 다인가?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하는 대안 제안을 만들 수는 없을까?
(4) 협상 후 성찰을 위한 질문
이번 협상에서 나의 관계 지향성은 어느 정도 발휘되었나?
만약 이 상대와 앞으로도 계속 일해야 한다면, 이번 협상이 그 관계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경제적 결과는 괜찮은데, 마음속에는 어떤 감정이 남아 있는가?
협상은 결코 개인의 게임이 아닙니다. 항상 ‘나’와 ‘상대’,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우리’가 함께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은 본능적으로 ‘우리’를 먼저 떠올리고, 어떤 사람은 ‘나’의 목표를 먼저 챙깁니다.
중요한 건 어느 쪽이 더 옳으냐가 아니라, 나의 지향성을 알고, 상대의 지향성을 읽고, 상황에 따라 둘 사이를 조정할 수 있는 유연성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관계를 완전히 무시하는 최악의 조합만은 피하는 것입니다.
이번 주 여러분의 협상 테이블에는 어떤 성향의 상대방이 마주 앉게 될까요?
그 만남 속에서 어떻게 결과와 관계를 동시에 챙길 수 있을지에 앞서,
먼저 자기 이해에서부터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