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협상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까?

네가지 협상 패턴을 통해 살펴본 협상 주체 연구

by Springboard

1. ‘누가’ 협상하는지가 왜 중요한가

앞선 글에서 우리는 협상에서 신뢰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협상 성과를 보는 새로운 프레임인 주관적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주관적 가치가 다음 협상의 성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펴봤습니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같은 구조, 같은 조건인데도 왜 어떤 사람은 관계를 먼저 보고, 어떤 사람은 거래에만 집중할까?”


협상 연구는 이 지점에서 오래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현실의 협상은 본질적으로 관계적(relational)인데,

연구는 너무 자주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한 번만 하는 시뮬레이션”을 전제로 설계되기 때문입니다.


Barley(1991)는 “낯선 사람들끼리 한 번 협상해 본 결과가, 정말 현실 협상을 반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Gray(1994)는 협상 연구의 기본 가정이 자율성·경쟁·차가운 합리성을 강조하면서, 상호의존성·협력·관계를 소홀히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은 많았지만, 정작 구체적인 질문은 남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관계를 더 중시하는가?

그 사람은 협상장에서 어떻게 다르게 움직이는가?

그게 결과에는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결국 ‘누가’ 협상하는지,
즉 협상가의 정체성과 자기 개념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2. 오늘의 질문: 관계적 자기 개념은 협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오늘 소개할 논문은 Gelfand, Major, Raver, Nishii, O’Brien(2006)의 이론 논문으로, 사회심리학에서 발전해 온 관계적 자기(Relational Self-Construal, RSC) 개념을 협상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작업입니다

이들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자신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하는 사람과, 자신을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개인으로 보는 사람은, 협상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결과를 만드는가?”

여기서 말하는 관계적 자기 개념(RSC)은, “나는 누구인가”보다 “나는 누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에 더 주목하는 자기 개념입니다.


3. 관계적 자기 개념(RSC)이란 무엇인가

3-1. 관계적 인지·정서·동기

RSC 모드가 켜진 사람은 협상장에서 다음과 같은 패턴을 보입니다.


관계적 인지

상대의 말투·표정·속도 같은 언어·비언어 신호에 특히 민감해집니다.

“저 사람은 지금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을까?”를 계속 추적합니다.

나와 상대 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하고, 관계 사건을 더 오래·더 자세히 기억합니다.


관계적 정서

“우리가 잘 연결되었다”는 감각이 큰 자존감과 긍정 감정의 원천이 됩니다.

반대로 관계가 끊어질 것 같으면, 손해 보는 숫자 이상으로 심리적 고통을 느낍니다.

타인의 감정에 잘 공감하고, 함께 느끼는 감정 전염이 발생하며, 관계를 해칠 것 같은 분노·비난 표현은 최대한 억제하려 합니다.


관계적 동기

“이 관계를 어떻게 키우고 지킬 것인가”가 중요한 목표가 됩니다.

상대가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고 싶어 하고, 적당한 자기 노출을 통해 거리를 좁히려 합니다.

상호작용 내내 “지금 우리 사이가 어떤 상태인가?”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며, 그에 따라 전략을 조정합니다.


이어서 중요한 질문이 나옵니다.

“이게 그냥 어떤 사람의 성격 타입인가, 아니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모드인가?”


3-2. 고정된 성격이 아니라 ‘켜졌다 꺼지는 모드’

이 논문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는, RSC가 성격처럼 고정된 것이라기보다 ‘맥락에 따라 켜졌다 꺼지는 모드’라는 점입니다.


만성적 접근성

반복된 경험과 역할, 문화·조직 환경에 따라 어떤 사람은 평소에도 RSC가 잘 활성화됩니다.

연구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여성은 남성보다, 한국인은 다른 동아시아인보다 관계적 자기 수준이 높은 경향이 있습니다.

Southwest Airlines처럼 “사람 중심, 관계 중심” 문화를 강조하는 조직에서는, 구성원들의 RSC가 만성적으로 높은 상태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일시적 접근성

연인·친한 동료·오랜 파트너와 협상할 때, 혹은 “이 사람과는 앞으로도 계속 엮일 것이다”라는 인식이 강할수록 RSC가 일시적으로 강하게 켜집니다.


억제 과정

반대로 RSC가 켜질 준비가 되어 있어도, 실제로는 잘 쓰이지 않는 환경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완전히 일회성이라고 느끼는 낯선 상대,

이메일이나 문서 중심으로만 오가는 희박한 소통,

“이번에는 무조건 이기고 와라”는 대리인 역할과 경쟁적 지침은 관계보다는 ‘거래 모드'를 강화하며 RSC의 사용을 억제합니다.


요약하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기보다 “지금 이 관계·역할·조직 구성에서 내 안의 관계적 자기가 얼마나 켜져 있는가”가 관건입니다.


4. 네 가지 협상 역학: 나와 상대의 조합

RSC가 흥미로운 이유는, 이게 “나 혼자 어떤가”를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나와 상대가 어떤 조합으로 마주 앉았는가”를 설명하는 렌즈가 되기 때문입니다.


연구진은 쌍방의 RSC 수준 조합에서 네 가지 협상 역학을 제안합니다.


4-1. 관계적 만족화: 둘 다 관계에 올인할 때

양쪽 모두 RSC가 매우 높으면, 관계적 만족화(Relational Satisficing)가 나타납니다.

서로 호감·신뢰·유대감 같은 관계적 자본은 풍부하게 쌓습니다.

하지만 “괜히 숫자 때문에 사이 나빠질 필요는 없다”는 마음이 강해져, 경제적 성과는 상대적으로 낮게 나올 수 있습니다.

친구·연인·가족 협상에서 “돈은 좀 손해 봤지만, 뭐 가족끼리니까”로 끝나는 패턴이 여기에 가깝습니다.


4-2. 관계적 통합: 둘 다 ‘적당히’ 관계를 중시할 때


양쪽 모두 RSC가 중간 수준이면, 가장 이상적인 패턴인 관계적 통합(Relational Integrating)이 일어납니다.

둘 다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되, “내가 챙길 건 챙기자”는 감각도 유지합니다.

관계적 전술로 신뢰와 정보를 쌓고, 이 기반 위에서 가치 창출(통합)과 주장(분배)을 함께 합니다.

그 결과, 경제적 자본과 관계적 자본을 동시에 높은 수준으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실무에서 말하는 “일도 잘 되고, 사람도 남는 협상”이 바로 이 구간입니다.


4-3. 비관계적 거래: 둘 다 관계 모드가 꺼져 있을 때

양쪽 모두 RSC가 낮으면, 비관계적 거래(Arelational Trading)가 나타납니다.

과업과 숫자에 초점을 맞추고, 필요한 정보만 주고받으며 깔끔하게 거래를 마무리합니다.

경제적 성과는 꽤 높을 수 있지만, “다음에도 이 사람과 다시 하고 싶냐”는 질문에는 망설이게 됩니다.

단기 효율이 중요하고 관계 지속 가능성이 낮은 딜에서는 오히려 합리적인 패턴일 수도 있습니다.


4-4. 관계적 거리두기: 한쪽만 관계 모드일 때

가장 까다로운 상황은 한쪽 RSC는 높고, 다른 쪽은 낮을 때입니다. 이때는 관계적 거리두기(Relational Distancing) 역학이 나타납니다.

RSC가 높은 쪽은 개인적 이야기, 비공식 만남, 라포 형성 시도 등을 통해 관계를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상대는 그 시도를 “비효율”이나 “시간 낭비”로 느끼며, 빠르게 조건·가격 이야기로 들어가길 원합니다.

관계 시도가 반복해서 거절되면, RSC가 높은 쪽은 상처와 분노, 배신감을 느끼고, 비난·냉소 같은 관계적 공격이나 대화 철수로 반응하기 쉽습니다.

그 결과 신뢰는 무너지고 정보는 잠기며, 숫자도, 관계도 둘 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기 쉽습니다.


(이미지 출처: Gemini 3.0)


5. 글로벌 M&A 협상에서 본 RSC의 그림

한국 기업 K사와 미국 기업 U사의 합병 협상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K사 협상팀은 한국 문화와 회사 분위기 모두 관계 중심이어서, RSC가 만성적으로 높은 팀이었습니다. 이번 협상을 “앞으로 오래 함께 갈 파트너십의 출발점”으로 보고, 초반부터 개인적 관심사, 비공식 저녁 자리, 상호 방문 제안 등 관계적인 시도를 적극적으로 했습니다.


반면 U사 팀은 전형적인 거래 지향 팀이었습니다. “관계 이야기보다는 조건을 빨리 정하자”는 태도로, 수치·조항 중심으로 협상을 끌고 가려 했습니다. 전형적인 관계적 거리두기 조합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K사 팀 안에는 이런 감정이 쌓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의를 보이는데, 저쪽은 숫자만 본다

우리를 파트너가 아니라, 공급처 중 하나로만 보는 것 같다.


결국 K사 팀은 방어적으로 변했고, 정보 공유를 줄였으며, “우리만 너무 열지 말자”는 내부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U사 팀은 이를 보고 “K사가 갑자기 비협조적이 되었다”고 해석했습니다. 협상은 6개월 넘게 이어지다가 결국 결렬됐습니다.


그 후 K사는 일본 기업과 다시 협상을 시작했고, 이번에는 3개월 만에 합병을 마무리했습니다. 일본 기업 역시 관계를 중시하는 팀이었고, 양측 모두 “적당히 높은” RSC를 가진 상태에서 신뢰와 정보를 빠르게 쌓아가며 관계적 통합에 가까운 패턴을 만들었습니다.


6. 다음 협상 전에 던져볼 질문들

관계적 자기 개념은 이론으로만 두기 아까운 틀입니다. 다음 협상 전에, 아주 짧게라도 이런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드 점검

“나는 이 협상에서 관계와 거래 중 무엇을 먼저 떠올리고 있는가?”

“지금 내 안의 관계적 자기 모드는 어느 정도 켜져 있는가?”


상대와의 조합 보기

“상대는 관계에 얼마나 관심이 있어 보이는가?”

“우리는 지금 네 가지 패턴 중 어디에 가까운가? (관계적 만족화 / 관계적 통합 / 비관계적 거래 / 관계적 거리두기)”


조정 포인트 찾기

둘 다 관계에만 쏠려 있다면 → “숫자와 구조 이야기를 조금 더 정교하게 하자.”

둘 다 거래에만 쏠려 있다면 → “장기 관계가 필요하다면, 관계적 자본을 조금씩 쌓을 여지를 만들자.”

한쪽만 관계 모드라면 → “각자가 이 협상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보는지 먼저 꺼내놓고 조율해보자.”


이 논문은 협상 연구에 ‘주체’를 다시 데려옵니다. 같은 구조, 같은 정보, 같은 숫자여도 어떤 자기 개념을 가진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느냐에 따라 협상의 과정과 결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관계적 자기 개념은 단순한 “성격 유형”이 아니라, 맥락과 상호작용 속에서 켜졌다 꺼지며 협상 테이블의 공기와 방향을 바꾸는 역동적인 주체성에 가깝습니다.


관계중심 협상 관점에서 보면, 이 논문은 “좋은 구조를 설계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관계적 자기를 켠 상태로 테이블에 앉느냐가 협상의 질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연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