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끝났다는 느낌이 다시 만날 이유가 되는 순간에 대한 연구
지난 두 글에서 우리는, 신뢰가 협상에 미치는 복잡한 영향과, 협상 성과를 보는 새로운 프레임인 주관적 가치(Subjective Value)를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주관적 가치가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실제로 돈이 되나요?”
기업 임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이런 반응을 자주 듣습니다.
“좋은 관계?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실적이 먼저 아닌가요?”
실제로 많은 협상 연구는 일회성 거래를 전제로 합니다. 한 번 협상이 끝나면 관계도, 다음 라운드도 연구 설계에서 사라집니다. 재계약, 장기 파트너십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됩니다.
하지만 현실의 협상은 다릅니다. 우리는 같은 고객, 같은 공급업체, 같은 파트너와 반복해서 마주 앉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해집니다.
첫 번째 협상에서의 경험이, 두 번째 협상의 숫자를 바꿀 수 있을까?
주관적 가치가 정말로 객관적 가치를 창출하는 자산이 될 수 있을까?
오늘 소개할 논문은 Curhan, Elfenbein, Eisenkraft(2010)가 Journal of Applied Social Psychology에 발표한 종단(시간을 두고 추적하는) 연구입니다. 연구진은 동일한 상대와 2회 연속 협상을 진행하는 실험을 설계해, 첫 협상에서의 주관적 가치가 두 번째 협상의 객관적 성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측정했습니다.
핵심 질문은 꽤 도발적입니다.
“긍정적인 주관적 경험 그 자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가?”
연구에는 MBA 학생들이 참여했고, 둘씩 짝을 이뤄 고용 계약 협상을 두 번 연속 진행했습니다. 한쪽은 구직자(프리랜서 컨설턴트), 다른 쪽은 채용 담당자(스타트업 COO) 역할을 맡았습니다. 시급, 근무시간, 주식, 출장비 등 여러 이슈를 두고 협상을 했고, 각 선택지마다 점수가 매겨져 있어서 누가 얼마나 가져갔는지 숫자로 계산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두 번째 라운드에서는 “1년이 지났고 선호가 바뀌었다”는 설정으로 점수 구조는 바뀌었지만, 역할과 상대는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실제 상금이 걸려 있어, 참가자들이 “연습”이 아니라 진짜처럼 협상에 임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첫 번째 협상이 끝난 뒤에는, 각자 주관적 가치(SVI)를 평가하고 “같은 상대와 다시 협상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도 답했습니다. 일주일 후, 같은 상대와 두 번째 협상을 진행했고, 똑같이 평가를 반복했습니다.
연구진이 처음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건 이것입니다.
“첫 협상에서의 주관적 경험이, 그대로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라,
다음 협상에서 내가 얼마나 가져오는지에까지 영향을 줄까?”
결론은 “그렇다”에 가깝습니다. 첫 협상의 실제 점수를 감안하고도, 그때 느꼈던 주관적 가치는 두 번째 협상에서의 내 점수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이번 결과가 공정하고 나에게 유리했다”는 느낌(도구적 가치),
“상대와의 관계가 괜찮다, 믿을 만하다”는 느낌(관계적 가치)이 두 번째 협상에서 더 높게 요구하고, 더 끈기 있게 버티게 만드는 에너지로 작동했습니다.
즉, “나는 지난번에 꽤 괜찮은 경험을 했다”는 기억이 다음 판에서 내 협상력을 조금씩 끌어올렸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연구진이 보고 싶었던 건 쌍(파트너십) 수준의 변화입니다.
“한 사람만이 아니라, 양쪽 모두가 첫 협상에 만족했다면,
그 다음 협상에서 둘이 나누는 전체 파이는 달라질까?”
여기서도 비슷한 그림이 나옵니다. 첫 협상에서 둘 다 “공정했고, 괜찮은 협상이었다”고 느낀 쌍은,
두 번째 협상에서 파이 자체를 더 크게 만드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특히 결과에 대한 만족감(도구적 가치)과 관계에 대한 만족감(관계적 가치)이 높았던 쌍일수록,
다시 만났을 때 정보도 더 많이 열고, 서로에게 유리한 조합을 더 잘 찾아냈습니다.
첫 번째 협상이 “기분 좋게 끝난 공동 프로젝트”에 가깝다면, 두 번째 협상은 “조금 더 멀리 같이 가보는 프로젝트”가 되는 셈입니다.
세 번째 발견이 가장 직관적이면서도 강력합니다. 첫 협상에서 누가 더 많이 가져갔는지는, ‘이 사람과 다시 협상하고 싶은가?’를 설명해주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좋은 경험이었다”, “공정했다”, “관계가 좋아졌다”는 주관적 가치는 “다음에도 이 사람과 다시 협상하고 싶다”는 의향을 아주 강하게 설명했습니다.
특히
결과에 대한 만족감,
과정에 대한 느낌,
관계에 대한 느낌
이 세 가지가 모두 높았던 사람들은, 실제로 “이 사람과 다시 팀을 이루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 협상에서 누가 더 많이 따냈는지는, 다음에 또 만나고 싶어 하는지와 별로 상관이 없었습니다. 대신, 좋은 기분으로 끝났는지만이 다음 라운드를 여는 열쇠 역할을 했습니다.
연구진은 이 결과를 세 가지 경로로 설명합니다.
(1) 내부 에너지의 변화(개인 내적 경로)
첫 협상에서 “꽤 잘해냈다”고 느낀 사람은, 다음 협상에서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 주관적 가치는 자기효능감과 자신감으로 바뀌어, 실제 행동을 바꿉니다.
(2) 상대의 태도 변화(대인 관계 경로)
관계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사람은,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남깁니다.
상대는 다음 협상에서 그 사람에게 더 협조적으로 행동하고, 정보를 더 많이 나누려 합니다.
>> 동시에, 첫 협상을 통해 상대의 스타일을 이미 한 번 겪어봤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먹힌다”는 학습 효과도 생깁니다.
(3) 분위기의 변화(공동 창출 경로)
양쪽 모두가 첫 협상을 긍정적으로 기억할수록, 두 번째 협상장은 통합적 협상 분위기에 가깝게 열립니다. >> “이 사람은 나를 이용하려 하기보다는, 같이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는 기대가 자연스럽게 정보 공유, 상호 호혜성, 창의적 아이디어를 끌어내게 됩니다.
연구에서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이런 부분입니다. 한 사람의 객관적 점수와 결과에 대한 만족은 어느 정도 함께 움직입니다. “많이 따냈다”는 사람일수록 “결과가 괜찮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쌍 전체를 보면, 점수는 제로섬에 가깝게 움직였지만, 만족감은 꼭 제로섬이 아니었습니다.
한쪽이 더 많이 가져갔다고 해서, 다른 쪽이 반드시 “완전히 불만족”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과정과 관계에 대한 평가는 두 사람이 함께 올랐다 내렸다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 잘 통했다”, “이 사람과는 다시 일해보고 싶다”는 느낌은 대체로 둘이 같이 느끼는 감정이었습니다.
숫자 차원에서는 다투고 있었지만, 경험 차원에서는 “그래도 같이 해볼 만하다”는 감정이 함께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점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한 글로벌 기업이 IT 시스템 유지보수를 외주업체 C사와 3년 계약으로 맡겼다고 해보겠습니다. 첫 계약 협상은 꽤 치열했습니다. 기업 측 담당 이사는 “우리가 원하는 단가를 끝까지 지켜냈다”고 만족했습니다.
반면 C사 영업 이사는 협상 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조건은 빡빡하지만, 그래도 함께 일할 만한 사람들이네요. 과정은 공정했어요.”
3년 후 재계약 시점이 다가왔습니다. 기업은 경쟁입찰을 검토하고 있었지만, 그 전에 C사가 먼저 제안서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지난 3년 동안 귀사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번에는 더 나은 조건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C사는 첫 계약보다 10% 낮은 단가를 제시하면서, 추가 서비스를 포함한 패키지를 함께 제안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경쟁입찰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줄이면서도, 실질적으로 더 좋은 조건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C사 역시 안정적 매출과 레퍼런스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사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 협상이 치열하긴 했지만, 공정하게 느껴졌던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서로 신뢰가 쌓였으니까, 이렇게 먼저 제안이 들어온 거죠.
그때 우리가 일방적으로만 밀어붙였다면, 이런 재계약은 없었을 겁니다.”
이 사례는 연구 결과를 잘 보여줍니다. 첫 협상의 주관적 가치가 다음 협상의 기회와 조건을 바꾸고, 결국 객관적 성과에도 영향을 준다는 점입니다.
이제 이 연구를, 다음 협상을 준비할 때 써볼 수 있는 질문들로 바꿔보겠습니다.
“이 사람과는 한 번만 협상할 것인가, 아니면 반복해서 마주 앉게 될 것인가?”
일회성에 가깝다면 객관적 성과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복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주관적 가치는 투자에 가깝습니다.
협상 직후, SVI 16개 문항 전체를 쓰지 않더라도,
네 가지 차원에 대해 간단히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이번 협상 결과(도구적 성과)에 대해, 나는 얼마나 만족하는가?”
“이 협상에서 나는 나 자신(Self)을 지켰다고 느끼는가?”
“과정(Process)은 공정하고 존중받는 경험이었는가?”
“이 사람과의 관계(Relationship)를 다시 이어가고 싶은가?”
특히 낮게 나온 차원이 있다면,
다음 협상 전에 그 부분을 어떻게 보완할지 미리 설계해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주관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은 무엇인가?”
연구에서는, 상대의 SV를 높여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나의 객관적 성과를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마지막에 합의를 정리하면서 “오늘 논의 방식이 특히 좋았다”고 구체적으로 피드백하기,
절차와 정보 공유에서 상대가 공정했다고 느끼도록 설계하기 등이 있습니다.
협상 후, 공식적인 설문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가볍게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이번처럼 같이 일해보고 싶으신가요?”
연구에 따르면, 이 단순한 질문에 담긴 재협상 의향이
장기 성과를 예측하는 가장 강력한 변수 중 하나입니다.
SV의 네 가지 요인 중, 도구적 SV와 관계적 SV가 특히 미래 성과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번 협상에서는 도구적 SV(공정하고 합리적인 결과)에 더 비중을 둘 것인가,
아니면 관계적 SV(신뢰와 라포)에 더 투자할 것인가?”
한 번의 협상이 아니라 협상 포트폴리오 전체를 보고,
어떤 파트너에게는 관계적 SV를 더 쌓고,
어떤 파트너에게는 도구적 SV를 더 관리할지 구분하는 전략도 필요합니다.
이 연구는 협상 성과의 개념을 시간 축으로 확장합니다.
한 번의 협상은 끝이 아니라, 다음 협상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를 정하는 출발점입니다.
주관적 가치는 그냥 “그때그때의 느낌”이 아니라, 다음 협상의 신용점수이자 자산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객관적 성과보다 주관적 가치가 관계 지속과 미래 성과를 더 잘 예측합니다.
합리성의 이름으로 감정을 주변부로 밀어냈던 전통적 협상 관점에 대한, 꽤 강력한 반론입니다.
좋은 기분으로 끝나는 협상이, 결국 가장 합리적인 협상일 수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얼마나 따냈는가”를 넘어, “나는 이 협상에서 누구로 존재하고 있는가”,
즉 협상가의 관계적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려고 합니다.
나를 타인과 연결된 존재로 보는 ‘관계적 자기’가 협상장의 인지·감정·전략을 어떻게 바꾸고,
그 수준의 차이가 어떤 관계 패턴과 성과(가치 창출, 소원화, 과도한 양보 등)를 만들어내는지,
관계중심 협상 관점에서 이론과 현장 장면을 함께 엮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