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서사의 위기> 이야기를 잃어버린 시대에게

by 봄치즈

저녁 식사 시간, 아이가 "반에 새로운 아이가 전학 왔다"라고 말하자 남편이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기억 속 명료하지 않은 조각들이 모여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귀 기울여 듣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남편 사이에 작은 '이야기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런 진정한 소통의 순간들을 우리는 현재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만나고 있을까?


분명히 정보는 더욱 많아지고 인스타그램, 틱톡 등 소통할 수 있는 창구는 과거에 비해 더없이 많아졌다. AI의 도래로 일의 효율을 위한 정보 검색과 소통의 활성화에도 불이 붙는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빠르게 소비되는 정보들 사이에서 우리는 정말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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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서사의 위기>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 출신 철학자이자 문화 비평가인 한병철은 <피로사회>, <투명사회> 등을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분석해 왔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정보와 데이터가 지배하는 시대 속에서 인간 경험이 어떻게 피상화되고, 서사의 시간성이 해체되는지를 143페이지라는 짧은 분량 속에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이 책의 핵심은 '서사'와 '시간성'이다. 한병철이 말하는 서사란 단순한 이야기 기법이 아닌, 시작과 끝, 변화와 긴장, 완화와 해결을 갖춘 '의미의 흐름'이다. 그는 현대 사회가 '서사 없는 시대'로 변모하고 있음을 우려한다. AI 시대의 도래로 '당장의 답'만을 구하는 문화, 충격을 회피하고 좋아요 버튼으로 대체하는 피상적 소통, 스토리텔링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를 유도하는 마케팅까지... 저자는 이 모든 현상이 서사의 위기, 즉 진정한 이야기의 죽음을 가져온다고 진단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SNS 피드들이 떠올랐다. "팔로워를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포스팅을 하라. 그들은 곧 내 고객이다. 공유할 정보만 올리면 수익성은 보장된다." AI를 이용해 5분 만에 글을 써서 올리자는 인플루언서의 글에서, 한병철이 말하는 '공동체 없는 소통'의 단면을 목격했다. 자신을 브랜딩 하기 위해 급조된 스토리들은 표면적으로 소통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진정한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직장에서도 '스토리텔링'은 핵심 역량이 되었다. 데이터 분석과 보고서 작성이 업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스토리라인'을 만들어 발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러나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어떻게든 찾아내야 하는 이 작업이 때로는 공허하게 느껴졌었다. "모든 것을 인과성으로 축소하려는 세계의 탈신비화"라는 한병철의 지적은 이러한 현대 업무 환경의 허무함을 정확히 짚어낸다.

특히 공감했던 부분은 "충격이 사라지는 시대"에 관한 분석이다. 한병철은 현대인들이 실존적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충격을 회피하고, 이를 '좋아요' 버튼으로 대체함으로써 "현실 충격에 대한 무감각"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정치적 격변기에 많은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끼고 '정치 무관심'으로 돌아섰던 모습이 떠올랐다. 충격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임에도, 우리는 점점 그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AI 시대, 빠른 정보 습득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지금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이야기의 회복이 필요하다. 한병철이 제시하는 해법은 명확하다. '진정한 의미의 이야기를 통한 공동체를 만들라.' 경청하는 태도로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삶에 몰입하여 자신의 내면과 사람들을 잇는 새로운 실을 뽑아내는 것이야말로 서사 회복의 시작점이라고 말한다.


<서사의 위기>는 간결하면서도 날카로운 통찰로 가득한 책이다. 넘쳐나는 데이터 속에서 이야기마저 상품처럼 소비되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다시 서사를 회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스토리텔링과 서사의 구분이 불명확해지는 지금의 시대가 마냥 비관적으로만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족, 지인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시작해, 주변의 사람들과 진정한 이야깃거리를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휴대폰과 SNS 채널의 피상적인 문구에서 벗어나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다시 서사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