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준비_3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건 11월 말, 양도일은 12월 15일로 정해졌다. 날짜가 정해지자 꽁꽁 얼었던 강물이 녹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시간은 빠듯한데, 하고 싶은 건 많았다.
가장 먼저 마주한 현실은 예산이었다. 우리 수중에 떨어진 여행 경비는 천만 원 남짓. 네 가족 한 달 살기에는 빠듯해보이지만, 당장 수입이 없는 우리에게는 그게 전부였다. 나는 가계부를 적듯 꼼꼼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아껴 쓰면 한 달 반, 어쩌면 두 달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쉽게 오지 않을 이 시간을 돈 때문에 서둘러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 절박함이 우리를 자꾸만 짠순이, 짠돌이로 만들었다.
아내는 이왕이면 유럽이나 호주처럼 먼 곳을 바랐다. 하지만 치솟은 환율을 확인하는 순간, 내 어깨는 절로 움츠러들었다. 게다가 유럽의 겨울은 춥고 해가 짧다지 않던가. 반대로 호주나 뉴질랜드는 극성수기라 물가가 천정부지였다. 천만 원으로 2주 남짓 빠듯한 여행을 하고나면, 우리는 또다시 일상으로 쫓기듯 돌아와야 한다. 그건 우리가 바라는 '여유롭고 느긋한 여행'이 아니었다.
나는 집에서 가까운 청주공항발 항공권을 뒤지기 시작했다. 12월 셋째 주가 지나면 표 값이 배로 뛰었다. 그사이 눈에 들어온 가격표들. 발리행 편도 14만 원, 홋카이도 오비히로행 편도 9만 원. 순간 가슴이 뛰었다. 발리의 따뜻한 해변과 짙은 녹음, 영화에서나 보던 홋카이도의 설경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나는 들뜬 목소리로 아내에게 읊어댔다. "여보, 이것 좀 봐. 가격이 말도 안 돼. 우리 발리 가서 서핑을 배워볼까? 아니면 홋카이도 가서 눈 구경이나 실컷 하는건 어때?"
하지만 아내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발리는 배탈이 잘 난다던데, 아이들이 괜찮을까? 홋카이도는 너무 춥잖아, 눈속에 고립되기라도 하면 어쩌고." 평소 같으면 '또 시작이군.'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발리밸리'라는 단어를 찾아볼수록 등골이 서늘해졌다. 고급 리조트 안에만 있어도, 음료와 음식을 아무리 조심해도 소용 없었다는 글들이 많았다. 낯선 나라에서 아이가 고열에 시달리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건 모험이 아니라 재난이었다. 홋카이도의 폭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보라 치는 도로 위, 렌터카 안에 갇혀 벌벌 떠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낭만은 현실의 불안을 이길 수 없었다. 남들은 잘만 다녀온다지만, 굳이 우리 가족을 담보로 러시안룰렛을 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우리는 지도 위에 올려두었던 발리와 홋카이도를 지워냈다. 싸고 매력적인 티켓은 그렇게 사라졌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아이들과의 여행은 불안이나 고난이 아닌, 무사함과 편안함 위에서 시작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