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15화

아파트

by 봄단풍


아파트, 정확히는 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한 번에 모이게 된 건 그로부터 몇 주가 더 지나서였다. 한 명 한 명 만나서 한 번 모이자는 말을 건네기도 수 일이 걸렸을뿐더러, 애초에 그 생각 자체에 그다지 순응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예은누나와 두성이형은 결혼준비로 바빠서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했지만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고, 그건 대호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만나야 해?”


오랜만의 자유시간을 피시방에서 만끽하던 대호가 뱉은 대답이었다. 평소와 같은 츄리닝바람이었지만, 고시 1차 합격생이라는 타이틀 덕분인지 어쩐지 그의 태도에는 평소와는 다른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좋잖아. 가끔 뭐 논의할 거 있으면 하고.”

“근데 원래 한 아파트 주민들도 서로 잘 모르지 않냐?”


그건 사실이긴 했다. 나조차도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아파트에서 인사 한 번 안하고 십 수년을 살아왔으니.


“그러니까. 우리 아파트에서는 서로 친하게 이웃처럼 지내면 좋잖아.”


꾸준한 설득에 대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 말에 동의를 한 것인지 보이스챗의 오더에 고개를 끄덕인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 되는 시간을 알려주면 자기도 그 시간에 최대한 맞춰보겠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평소에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던 유화는 단연 찬성이었다. 다만 연구실에서 퇴근하는 시간이 워낙 불규칙적이라 시간을 언제 맞출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확실히 되는 날은 모두가 쉬는 공휴일. 주말과 일요일마저 출근하는 유화까지 챙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101동의 첫 반상회는 다음 달로 넘어가게 되었다.


처음부터 생각했던 체계적인 세입자 관리를 위해 나는 성훈이에게도 연락했다. 아무래도 너희가 살림을 풀어놨으니, 그만큼 관리를 할 사람을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다른 세입자들에게도 잘 설명하려면 네가 오든지, 아니면 한 명 정해서 나와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하나 열어두라고.


처음에는 다소 당혹해하며 동기들에게 연락해보겠다던 성훈이는, 의외로 그 날 바로 다시 연락을 해왔다. 생각보다 빠른 응답이었다.


“형, 주현이가 하기로 했어요!”


세상에. 너무 예상대로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성훈이에게 주현이의 연락처를 받아 메신저를 보냈더니, 기다리고 있던 듯 바로 답장이 왔다. 오빠, 반상회는 언제인데요?


시작은 단체 메신저 방을 만드는 것이었다. 각자의 이름과 함께 입장했다는 메시지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아직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을 때 재빨리 공지를 올렸다. 환영합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한 번 반상회를 할까 합니다. 여러 가지 사항을 정하려면 여기서 논의하는 것보다 만나는 것이 빠를 것 같으니, 반상회를 위해 되는 날짜를 알려주세요.


그 밖에, 아파트 관리 차원에서 간혹가다 공지를 드려야 할 때도 있고, 또 서로간의 민원이나 불편한 점을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서 본 방을 만들고 향후에도 계속 유지할 예정이라는 것과, 첫 반상회 이후 정기적·비정기적인 반상회를 꾸준히 가질 계획이라는 것도 전달했다. 주현이와 예은누나의 가장 빠른 답장에 이어서, 다른 세입자들도 첫 인사가 담긴 짧은 글로 답을 해왔다.


그렇게 봄비가 그치고 벚꽃이 질 때쯤 역사적인 첫 반상회가 열렸다. 장소는 아파트 근처 치킨 집. 왜 하필 치킨집이냐 하면, 평소에 내가 자주 가던 곳이기도 했고 또 가장 부담없는 장소이기도 했다. 직장인, 대학원생, 그리고 대학생 모두에게 편안한 곳이었으면 했기 때문에. 아파트에서 함께 나온 예은누나와 두성이형 이후로 한 명씩 도착했고, 휴일에도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돌아온 주현이가 마지막으로 도착하면서 반상회는 시작했다.


“어……. 좀 어색한데. 다들 반가워요.”


닭을 주문하고 맥주에 잔을 채울 때쯤, 천천히 입을 열며 분위기를 살폈다. 퀭한 눈의 준상이형은 늘 그렇듯 피곤해보였지만 밝아보이려는 듯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호준이와 유화는 새로운 만남에 들 떠 보였고, 대호는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을 얼굴에 띄운 채 먼 산만 보고 있었다. 주현이는 자신이 막내인 걸 알고 있는지 동그란 눈으로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빠르게 훑고 있었고, 두성이형은 뭔가 못마땅한 듯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오직 예은누나만이 밝은 표정으로 내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 어차피 아파트에서 사는 거, 그냥 다 각자 살아도 아무 문제없는 거 아는데. 그래도 저는 우리가 좀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막상 말을 시작하자 다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봐줬다. 사실 무슨 말을 할까 준비를 하려고 며칠 밤 고심을 했지만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고민할 때마다 잠이 참 잘 와서 대본을 짜는데 애를 먹기도 했고. 며칠을 그렇게 보낸 뒤에 내린 결론은, 그냥 내키는 대로 말해보자는 거였다.


“전 솔직히 직장 다니면서 힘들었어요. 너무. 진짜, 살면서 낙이 이렇게 없던 것도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부디 다음 말이 술술 나오길. 듣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아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그 때, 어딘가 불편해보이던 두성이형이 탁자로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용기가 나서 다음 말을 차분히 이어나갈 수 있었다.


“새벽에 출근하고, 한 밤에 퇴근하고. 해 뜨기 전에 나가서 해 지고 나서 돌아오고. 직장엔 창문도 없지, 다른 일 할 짬도 없지, 핸드폰에 톡 하나 보낼 짬도 안나고. 진짜 미친 듯이 일만하고 퇴근하면 잠 잘 시간밖에 없고, 시간은 가 있고. 유일한 낙은 그거 하나였어요. 어쩌다가 시간이 날 때, 다른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하는 거. 그냥 서로 힘든 얘기하고, 털어놓고, 끌리면 술도 마시고, 그래도 돈 버니까 학생 때보다 맛있는 거 먹기도 하고, 사주기도 하고.”


천천히 말을 해도 숨이 차긴 했다. 어쩌면 긴장해서였는지도 몰랐다. 타는 목을 손에 든 맥주로 해소하고 싶은 마음을 나는 애써 억눌렀다.


“다들 알잖아요, 어떤 건지. 매일 매일 일하고, 집에 와서 자고. 연락을 해도 점점 할 사람도 없어져가고, 만난 사람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어져가고. 난 왜 사나 싶기도 하고…….”


어느새 나도 시선을 멍하니 탁자에 두고 있었다. 점점 나중에 기억하기에 민망할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미 술에 취한 것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탁자를 둘러앉은 사람들이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나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래서 같이 살고 싶었어요. 솔직히 여기 계신 분들은 다 저랑 엄청 친한 사람들이에요. 서로는 모르겠지만……. 제가 살면서 버텨나갈 힘이 되는 사람들이에요, 한 사람 한 사람. 다 고마워서 모셔온 거에요.”


옆에 앉은 예은이누나가 안쓰럽다는 듯 등을 토닥여줬다. 그제서야 나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고, 안 그래도 어색했던 이들이 더 어색한 공기속에 간신히 호흡을 이어나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계였다. 더 이상 지어낼 말도, 생각나는 말도 없었고 점점 앉아있는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아, 모르겠다. 그게 다에요. 서로 안 친해져도 좋은데, 그냥 인사는 하는 이웃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짠 한 번 합시다!”


역시나 어색한 건배사 위로, 반갑습니다 하는 우렁찬 인사들이 퍼져나갔다. 예은누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맥주를 원없이 들이켰고, 그렇게 반상회가 시작됐다. 반상회라기보다는 신입생 환영회 같았다. 각자 하는 일과 이름, 나이를 밝혔고, 그 때마다 한 명이 한 마디씩 질문이나 아는 사람 이야기를 던지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101동 몇 호에 사는지에 대한 정보도 오고 갔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치킨이 나왔다. 아무래도 먹을 것이 나오자 다들 원기를 회복하는 듯 점점 말수가 많아졌고, 그만큼 들어가는 맥주도 많아지자 더 시끄러워졌다. 처음에는 참석 인원의 평균 연령에 다소 주눅 들어있던 주현이도 어느새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 열심히 진로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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