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하자, 우리." 3/3

당신이 두려워하는 몇가지 말들

by 봄단풍

당신이 두려워하는 몇가지 말들

Ep2. "그만하자, 우리." 3/3

아래 2편에서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떠올린 건, 헤어졌던 날로부터 일 년하고도 며칠이 더 지난 후였다.


“연애는 몇 번이나 했었어요?”


직장 동료의 소개로 만난 그녀는 청바지를 즐겨 입었다. 몇 번의 비가 내리고 미세먼지도 다 걷혔을 때, 눈은 이미 녹고 저녁 바람도 따뜻하게 느껴질 때쯤. 나와의 세 번째 만남에 청바지와 푸르스름한 남방을 입고 나온 그녀는 그렇게 물어왔다. 연애는요, 무슨. 아무렇지 않게 흘려 넘기며, 차가운 히비스커스 티를 홀짝였다. 하지만 턱을 괴고 이 쪽을 지그시 바라보는, 묵직한 그 눈빛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야 함을 깨달았다.


“한 번이요.”


그리고 오래 가진 않았어요, 라고 나는 결국 거짓말을 덧붙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차를 한 모금 홀짝. 그 날 따라 몸과 마음의 호흡이 참 잘 맞았다. 흐음, 하며 실눈을 뜨고 쳐다보는 그녀였지만, 다행히 더 물어 오진 않았다.


나는 그 날 밤, 침대에 누워 오랜만에 기억의 책장을 훑었다. 덜어내고 싶던 그 자리에는 이미 먼지가 꽤 쌓인 책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꽤 아름다웠고, 꽤 행복했었고, 또 나는 그 안에서만큼은 무엇이든 가능한 주인공이었다. 물론 미웠던 사람이 이제 용서가 되고, 또 다시 좋아지는 기적은 없었다. 그리고 잠시, 아주 찰나의 순간 그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 지 궁금해졌다.


『그만하자, 우리.』


마지막 날 첫 마디는 아직도 생생했다. 부끄러운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을 때처럼 나는 몸서리를 치며 돌아누웠다. 그렇게 끝났었지. 그 날 나눴던 다른 말들은, 또 모습은 이제 달리는 차창 밖 풍경처럼 희미해져 있었다. 민트색 우산, 남색 원피스. 비가 억수로 왔었고, 갈색 머리카락 옆으로 빗방울이 매달려서 하얀 팔로 똑 떨어졌었고…….


『조심히 들어가.』


지난 일을 돌아보는 건 꼭 고장난 비디오테이프 같았다. 제 멋대로 빨리 감았다가, 느리게 감았다가, 재생했다가. 원치 않은 모습들을 확대했다가, 궁금했던 모습은 희미하게 아웃 포커싱을 해버렸다가. 또 흐려진 장면을 간신히 선명하게 기억해내면, 막상 그 장면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부끄럽거나, 기억하기 싫었던 장면이었다.


『사랑해.』


그런 날이 있었지.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었던 마음을 질리도록 표현했던 나날이 있었다. 사랑이란 말을 뱉으면서, 정작 그 단어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없었고, 그리고 그 텅 빈 머릿속이 사랑이라 믿었던 시절이었다. 그 믿음 하나로 다른 이들 앞에서 전쟁 영웅처럼 사랑에 대해 설파하던 날들이 있었다.


『보고싶어.』


하루의 마무리를 고백으로 마치던 날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습관이 된 것 같다고 당신은 얘기했었지만, 단 하루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당신이야말로 그 한 두마디 말들을 듣는 것이 습관이 되었던 것인지, 매번 전하던 진심이 벽에 쏘아진 물처럼 의미없이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날들이 많아졌었다.


그리고 기억이 다시 한 번, 멋대로 민트색 우산을 떠올릴 때쯤 나는 다시 불 꺼진 방 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전에는 몇 번이고 걷어차서 침대 저 멀리 떨어졌던 이불은 어쩐 일인지 잘 덮여있었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된 것인지, 선명한 기억을 앞에 두고서도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듯 무심히 넘길 수 있게 된 것인지.


뭐, 무슨 상관이람. 무뎌진 것인지, 아니면 더 자란 것인지.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새 그 아픈 기억을 앞에 두고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됐다. 그런 시간도 있었지, 그런 사람도 있었지.


솔직히 아직도 남은 것들이 있다. 그 때의 감정은 이미 시간의 강물에 떠내려갔지만, 앙금처럼 묵직하게 그 바닥에 깔려있는 추억들은 분명 있다. 지금도 간혹 떠오르곤 하지만, 이제 그 날카로운 것들에 베이기에는 그 위로 덮어진 흙이 꽤 많은 모양이었다. 언젠가는 그 가라앉은 것들도 완전히 덮이거나, 흙 속에서 부드럽게 깎이거나, 아니면 그렇게 버티다가 떠내려가겠지.


“내일은 하루 종일 맑대요. 바람 쐬러 갈래요?”


좋아요, 괜찮으면 자전거를 타러 가요. 나는 웃으며 전화를 끊고, 침대에 누워 기지개를 켰다. 웃으면서 전화를 마친 건 얼마만인지, 또 약속 있는 주말을 맞이한 건 얼마만인지.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하루가 시작되겠지. 큰 기대는 없음에도, 나는 자꾸만 흘러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살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눈이 녹고 햇살이 쨍쨍하고, 미세먼지가 오락가락하더니 어느덧 날씨는 꽤 따뜻했다. 벚꽃이 피고 질 때까지도 크던 일교차는 어느덧 낮이든 밤이든 그리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을 이어가고 있었다. 숨 쉴 때마다 조금씩 습해지는 공기, 한 낮에 겉옷을 걸치면 땀이 조금씩 흐르는 기온. 바야흐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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