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두려워하는 몇가지 말들
아래 1편에서 이어집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던 마음에는 그 날 내린 비가 참 오래도록 더 내려서, 해 뜨는 시간까지 잠 못 들고 이불을 적시는 날이 이어졌다. 왜 세상은 이 느린 마음을 기다려주지 못하는지, 나는 눈앞에 닥쳐오는 일들 때문에 억지로라도 마음을 추스려야 했다. 삶이 일상에 파묻히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일들을 떠맡았고,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 속에 겨우겨우 흔적들을 지워나갔다.
가장 어려운 일은 첫 일주일에 모두 끝났다. 돌이키고 곱씹을수록 어려워진다는 말에 에라 모르겠다하고 저질러버린 것이다. 한 장의 남김없이, 그녀의 흔적이 남은 사진은 모조리 지웠다. 받았던 선물들은 가방 안에 넣어 쓰레기통에 버렸고, 잠자리를 함께하던 인형들도 그 가방에 담아버렸다. 다만 골라준 옷들, 선크림 등 내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은 남겨두었다. 난 헤어진 다음에도 참 약아 빠졌다.
하지만 그렇게 남겨둔 물건들 때문인지, 아니면 내다 버린 인형들의 유령이라도 찾아오기 때문인지, 잠자리에만 들면 마음은 꼭 그 첫 날 밤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무리 철저하게 치우고, 세상에 파묻히려 노력해도 그 시간만큼은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번이고 이불을 움켜쥐고 숨을 참았고, 헤어지던 날 그 붉은 찻잔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을 떠올리며 잠을 설쳤다.
우리가 만났던 그 날 저녁, 그 시간만 달리는 시간축에서 뽑아낼 수 있다면. 책장에서 책을 덜어내듯이 가볍게 뽑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우산을 같이 쓰고 걸었을까,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두 팔을 엉켜 잡고 발 맞춰 걷고 있었을까? 그냥 그 덜어진 책장 속에, 평소의 저녁을 꽂아둘 순 없을까, 그럼 우리는 지금 예전처럼 함께 있을 수 있을까?
꾸역꾸역 시간은 흘러서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똑같이 밤만 되면 우울해졌지만, 더 이상 눈이 촉촉해지진 않았다. 어느덧 마음에는 슬픔보다는 미움이 더 굳건히 자리 잡았다. 함께 할 때도 그랬지만, 끝나는 순간까지 그녀는 자기 마음대로였다.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다리는 사이 우리의 관계는 끝나있었다.
타이밍 좋게 음원 사이트에서는 헤어진 연인에게 행복을 기원하는 노래가 차트의 상위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프다 행복해줘…….’ 사람들은 순수하게 쓰인 가사에 공감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 가사마저도 가식적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아프고 아파야지, 날 아프게 한만큼 아프고 평생 날 찬 걸 후회해야지. 날 끊어낸 사람의 행복을 빌어준다니, 성인군자라도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누구에게도 나쁜 사람이 되기 싫은, 어설프게 착한 이들의 환상이라 생각했다.
“걔 남친 생겼다더라.”
흐르는 시간에도 관성이 있는지 어느새 몇 달이 훌쩍 지나있었다. 언제 그걸 깨달았냐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녀의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어느새 그렇게 외부의 자극이 주어지지 않으면 스스로 굳이 그 기억을 떠올리지 않는 지경에 이른 모양이었다. 들려온 소식은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 날 이후 그녀는 금세 새 출발을 했다는 소식이었고, 건강히 잘 지낸다는 소식이었다. 좋은 소식인가?
“……. 벌써?”
사실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누구를 만나고 어디에서 지내든 행복하지 않았으면 했고, 날 생각하며 후회하길 바랐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그렇게도 불안했나보다. 누굴 만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굴 만나든 행복할까봐. 물론 그러면서도, 그녀가 설령 돌아온다 할지라도 나는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 없지만 단호한 신념을 지켜가며 스스로 얄팍한 위안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도 종종 그 사람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렇다고 애써 외면하거나, 그 얘기를 하는 친구를 나무라거나, 혹은 슬픈 표정으로 괜찮다며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다만 떠오를 때마다 그녀의 불행을 빌었다. 물론 계속 누군가의 불행을 기도하는 것도 정신건강에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다만 억지로 잊는 것보다는, 생각날 때마다 화를 내고 또 속 시원한 복수를 꿈꾸는 게 내 삶을 더 살기 좋게 만들어줬다.
“하고 싶은 말은 없어? 만약에 만나게 되면.”
물론 개중에는 꼭 눈치 없는 친구가 있기 마련이다. 겨우 잊어갈 타이밍에 소식을 물어오는 사람, 애써 돌려놓은 화제를 다시 제자리로 맞춰놓는 사람. 그래도 힘들었던 시절에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생각했던 것이어서, 나는 금세 내 생각을 정리해서 대답할 수 있었다.
“두 번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고 나면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던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씩 웃어 보이고, 그제야 눈앞의 사람도 따라서 안도의 미소를 지어보이고. 그렇게 나와 내 주변에서 그녀에 대한 흔적은 조금씩 지워졌고, 묻혔고, 바람에 쓸려 날아가듯 얕아졌다. 잠시 머릿속에 떠올라도, 횡단보도 앞에 내려앉은 비둘기처럼 금방 날아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