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하자, 우리." 1/3

당신이 두려워하는 몇가지 말들

by 봄단풍

당신이 두려워하는 몇가지 말들

Ep2. "그만하자, 우리." 1/3


그 해 여름은 유독 짧았다. 무더위는 몇 번 오고간 장마와 함께 사그라들었고, 저녁 공기는 금세 쌀쌀해졌다. 낮에는 땀범벅이 된 옷을 입고, 저녁에는 오들오들 떨며 집으로 향하던 날이 며칠 지나간 이후, 나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녀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그만하자, 우리.”


 따뜻한 커피가 담긴 머그컵, 얼음 담긴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그녀는 그렇게 말을 꺼냈다. 나지막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목소리로,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확신에 찬 눈으로. 평소였으면 킥킥거리며 마주봤을 그 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겨우 창밖으로 눈을 옮겼다.


가로등 환한 거리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미리 챙겨오지 못한 우산이 생각나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아침 뉴스, 흐린 하늘, 습기 가득해 꿉꿉했던 출근길 공기, 지하철 곳곳에서 대롱대롱 흔들리던 장우산들. 미리 준비할 만도 했건만, 왜인지 내 가방에서는 우산을 찾아볼 수 없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한참이나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겨우 허세를 부려본다. 사실 정말 후회없는 선택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왜 대답은 하지 않니, 너도 나처럼 목이 메어오니, 아니면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니?


“왜…….”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아침에 하늘이 구름 가득한데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면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인 거다. 짧아진 인사, 귀찮아진 연락, 잡던 손마저 부담스럽다고 내던지던 모습. 칭찬과 위로보다 한숨과 질책이 늘어갈 때 미리 준비했어야 했다.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던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도 없는데 서로 붙잡고 있는 건 시간낭비같아.”


울컥, 화가 치솟았지만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너는 마음이 없었구나. 언제부터? 그럼 나는? 그렇게 몇 분이 지나도록 새로이 생겨나는 질문들이 그러하듯, 커피는 줄어들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게 설령 사랑의 묘약이라 한들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면 체할 것만 같았다.


“어떻게 생각해?”


답을 다 정해놓고 굳이 내 의견을 묻는 건 무슨 뜻일까. 사실은 이 모든 게 내 마음과 태도를 처음으로 되돌리려는 너의 시도인 거야? 이미 길을 정했으니 내가 뭐라 말하든 결과는 바뀌는 게 없을 거라고 말하려는 거니?


잠시 눈을 내려 탁자 위를 바라봤다. 밝은 분홍빛의 히비스커스 티도 줄어들 생각 없이 반짝거렸다. 속이 비치는 투명한 플라스틱 잔에는 물방울이 송글송글.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또르륵, 멋대로 굴러 떨어졌다. 그 모습을 눈에 담기 부담스러워 나는 얼른 눈을 돌렸다.


이 카페도 둘이 자주 오던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구석자리를 찾아다니고, 행여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잡을까 주문하기도 전에 가방부터 내려놓기 바빴었다. 같이 책도 읽고, 손잡고 멍하니 몇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그 밝은 미소가 그리울 땐 마주앉았다가, 따뜻한 손길이 그리울 땐 나란히 앉았다가.


“…….”


두 눈이 한 번 깜빡였다. 아무 말도 없이 그녀는 그렇게 대답을 보챘다. 문득 지금 앉은 곳이 어딘지 궁금해져 주위를 살폈다. 우리는 카페 한 가운데 설치된 기둥 옆에 아무렇게나 앉아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옆자리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고. 평소라면 시끄럽고, 시선도 신경 쓰였을 자리인데 오늘따라 다들 멀게만 느껴졌다. 불편했다. 꼭 내키지 않은 소개팅에 나온 것처럼 뼛속 구석구석 간지러웠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고 싶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일어나면, 그 때가 우리의 마지막이 될 거라고.


“그래, 그럼.”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점점 거세어지는 빗속으로 억지로 발을 옮겼다. 한 끼 식사 값에 준하는 커피와 차는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부어졌다. 드르륵, 한 가득 얼음 쏟아지는 소리는 먼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소리 같았다.


“역까지 같이 가자.”


민트색 장우산을 펄럭이며 그녀가 먼저 빗속으로 발을 내밀었다. 늘 그랬듯, 이미 내게 우산이 없는 걸 봐둔 듯했다. 항상 그랬다. 나는 까먹고, 무언가를 잊고 또 잃어버리고, 눈치마저 없었고. 당신은 그런 나를 오래도록 챙겨왔었다. 그녀가 어깨에 펴둔 작은 동그라미 안에 참 많은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선크림, 도시락, 우산, 넥타이…….


“먼저 가. 난 할 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그녀가 돌아보았다. 그래, 마지막. 나는 그 모습이 마지막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민트색 우산, 남색 원피스, 가지런히 묶어서 내린 한 가닥의 갈색 머리. 가볍게 오므려진 입술은 가볍게 떨리고, 하얀 팔뚝 끝에는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지고. 조금 전 차가운 찻잔에 대롱대롱 매달렸던 물방울이 생각났다.


“괜찮겠어?”


진심이 담긴 걱정이 던져졌다. 무표정한 끄덕거림, 별 일 아니라는 듯 주머니에 넣은 손.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을 내 모습을, 나는 마지막까지 허세로 꽁꽁 감쌌다. 어쩌면 괜찮은지도 몰랐다. 몇 가지 전조들을 보고도 이별은 유추하지 못했지만, 그런 준비성 부족한 나를 내 마음은 나름대로 챙겨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마음도 토닥여 줄 수 있는 하루가 언젠가는 오겠지.


“조심히 가.”


그렇게 그녀는 몸을 돌렸다. 예쁘다 생각했던 머리카락도, 잘 어울린다 생각했던 원피스도, 함께 비비던 촉감까지 기억나는 하얀 피부도 또 입술과 그 입술처럼 물들던 순수한 볼도. 그 모든 것들이, 단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 펼쳐진 우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사라졌다, 영영.


잡아야 했다. 불러야 했다. 잠깐이라도, 일단 시간을 좀 두고 생각해보자고. 내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녀도 그걸 원했던 걸지도 모르잖아? 그래, 지금은 나도 너도 괜찮겠지, 괜찮은 척 하겠지만 정말 이 선택에 후회를 할지 안 할지 지금 당장 어떻게 확신해?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적어도 며칠은 더 고민 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영화 속에서는 빗속에서도 멋진 장면들이 참 많던데. 헤어졌던 연인이 서로를 다시 찾아 끌어안기도 하고,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빗소리에 묻어 외치기도 하고. 혹은 멀리 떠났던 누군가가 비를 타고 돌아오기도 하고, 그 안에서 감동적인 재회를 하기도 하고.


다만, 내가 주인공인 영화는 그리 재밌지 않았다. 우산을 때리던 빗소리는 차분히 멀어졌고, 민트색 동그라미는 순식간에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오래도록 지켜보고 기억에 남기고 싶었던 뒷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나는 그 뒤에 손가락 하나 내밀 용기조차 내지 못한 채, 하다못해 퍼붓는 빗소리에 목소리 조금 섞어 볼 용기조차 내지 못한 채 우두커니 젖어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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