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나와도 돼요." 2/2

당신이 두려워하는 몇가지 말들

by 봄단풍

당신이 두려워하는 몇가지 말들

Ep1. "이제 그만 나와도 돼요." 2/2

아래 1편에서 이어집니다.





『힘든 건 없어요?』


그 질문을 받은 건 또 몇 달 뒤의 일이었다. 신입 사원들의 고충을 이해한다는 차원에서, 입사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의무적으로 인사팀과 상담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힘든 점이 있다면 편히 이야기하고, 그것이 업무 때문인지, 사람 때문인지, 혹은 특정 제도의 불합리함 때문인지 분석하여 기업 문화를 개선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뭐 좋은 팀장님 밑에 있으니까. 괜찮으시겠죠.』


정작 상담을 맡은 인사 담당자가 제일 피곤해보였다. 어떻게든 직접 언급을 피하면서 SOS를 보내고 싶었지만 마땅한 방법도 없었다. 사회는 생존게임이라는 학교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명백한 잘못과 불합리가 있고 그것을 증명한다 한들, 결국 먼저 싫은 소리를 내뱉는 쪽이 속 좁은 놈이 될 뿐이었다.


『야, 절대 말 하면 안 된다. 버텨. 무조건 참아.』


오랜만에 저녁식사를 함께한 회사 동기도 그렇게 말했다. 입사 직후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던 터라, 연수원에서 친하게 지냈음에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었다. 내 이야기를 한참 듣던 그는 일단 밉보인 구석이 있는 것 같지만, 함부로 자를 수는 없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었다.


그래서, 하라는 대로 하고, 시키는 대로 수행하고, 의문이 생겨도 입 꾹 다물고 불만이 있어도 꾹 참아왔는데 왜 내가 잘못했는지 생각을 하고 있어야하는 거야? 왜 내가 쫓겨나야 하는 건데?


“회사 여건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거니까, 너무 마음쓰지 말고…….”


마음의 소리가 들렸던 것인지, 팀장은 마지막 인사를 그렇게 마무리 지었다. 묻고 싶었다. 왜 당신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도 남아있을 수 있는지, 왜 당신은 자기 편한 대로 하면서도 이 곳에서 추앙받을 수 있는지. 나와 동료 직원들에게 했던 것처럼 당신 자식에게도 같은 말을 뱉고, 같은 일을 시킬 수 있는지, 같은 대우를 해줄 수 있는지.


“아무튼. 고생했어요.”


그동안의 시간은 그렇게 요약당했다.


“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연히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고 자리로 향했다. 사실 정리할 것도 몇 가지 없었다. 힘내려고 가져다놓은 손바닥만한 액자에는 가족들이 웃고 있었고, 오랜 작업이 불편해 사다놓은 마우스에는 손때와 기름이 가득했다.


취업 직후, 좋아하던 부모님의 모습이 생각났다. 앞으로 노후걱정 없다고 껄껄 웃으면서 빨래를 널던 아버지가 생각났고, 그런 아버지 등을 주책이라며 찰싹 거리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미안해요, 아부지. 어무이도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번에도 폐를 끼치게 됐네요.


“아, 오늘 온 김에 인수인계서는 확실히 만들고 가줘.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하고.”


어느새 다가온 팀장은 그렇게 말하고 껄껄 웃더니 어깨를 몇 번 토닥이고 지나갔다. 울컥, 그 손을 마디마디 부러뜨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이제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다. 굳이 잘 보일 필요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적어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째려보고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다…….


나는 조용히 컴퓨터를 켰다. 습관처럼 비밀번호를 누르고 새 문서를 열었다. 살면서 수많은 시험을 봤고 또 수많은 답지를 채워왔지만,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채우기 어려운 백지가 내 눈앞에 놓여있었다. 백지 위에는 까만 세로 막대기만 느릿하게 깜빡깜빡.


“자 오늘, 승민씨 마지막 날이니까. 끝나고 밥이나 같이 합시다. 다들 시간 괜찮지?”


갑작스런 회식 제안에 사람들의 눈이 내 쪽에 쏠렸다. 일초도 안 되는 순간이 지나간 후에, 각자 건성으로 던진 대답들이 날아들었다. 아마 다들 정해둔 약속을 미루겠지. 이 인간은, 이 회사는 정말 마지막까지 제멋대로구나.


그렇게 불과 몇 시간 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나의 송별회 회식에 병풍처럼 앉아있었다. 늘 내가 굽던 고기는 팀장이 내 맞은편에서 열심히 뒤집고 있었다. 마지막 날이니 자기가 서비스를 해주는 거라며 떠는 너스레는 덤이었다. 엄청난 호의, 엄청난 기회, 회사에 있던 그 누구도 누리지 못했던 서비스라며.


“자, 다 잔 채우고. 승민씨가 한 마디 하지.”


억지로 채운 소주잔을 들고,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껄껄, 모두가 숙연해져야 할 분위기는 내 바로 위 선배 대리의 너털웃음으로 간신히 밝아졌다. 막내가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잊은 모양이라며. 솔직히 말하면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어떻게 한 마디로 줄이겠어.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어떤 말은 하고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할지,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아유 모르겠다~ 다들 승민씨 빈자리만큼 좀 더 고생합시다!”


결국 참다 참다 못한 팀장의 주도 하에 모두 잔을 부딪혔다. 나는 끝까지 하고 싶은 말은 못하고 이 회사를 뜨게 될 모양이었다. 그래, 그냥 하루만 더 참자. 큰 사고만 내지 말고 조용히 나오자. 얼른 마음도 정리하고, 그 다음을 생각해야지.


“승민씨는 술 안마셔?”


내가 바로 술잔을 내려놓는 것을 봤는지 옆에 앉은 과장님이 슬쩍 물어왔다. 덕분에 잠시 흩어질 뻔했던 시선들은 다시 내게로 일제히 쏠렸다. 고기를 다시 뒤집던 팀장도 불편한 기색으로 이쪽을 쳐다봐왔다.


“제가 원래 술을 잘 못해서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직 버릇이 든 눈은 재빨리 팀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건 그 자리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불편한 기색이 조금 더 무거워질 때쯤, 다들 다시 내게 시선을 돌리고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


“에이, 좀 아쉽다. 마지막인데.”

“그래, 자기 송별횐데 술을 안 하면 어떡해.”


연거푸 손사래를 치며 잘 참던 내게, 결국 팀장은 아까처럼 참다 참다 못했는지 한 마디를 툭 내뱉고야 말았다.


“마무리는 잘 하고 나가야지?”


툭. 머릿속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부여잡을 새도 없이, 내 입에서는 멋대로 대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암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술 때문에 눈 밑에 흉터가 남으셨습니다. 어머님은 고혈압으로 고생중이시고요. 혹시나 제가 술먹고 잘못됐을 때 병원비 10원이라도 보태주실 수 있으면 저도 기꺼이 한 잔 할게요. 아니면 이제 대학 들어간 당신 아들도 회사에서 이렇게 당해도 괜찮으면 한 병이라도 마시죠 뭐.”


나는 그렇게 말하고 한 번 웃어 보인 후, 진짜로 소주병을 집어 들고 꿀꺽 삼켰다. 물론 허세였고, 반병도 채 되지 않는 양이었다. 그럼에도 냄새는 역했고,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다들 황망히 눈만 뜨고 있는 사이 나는 입 주변을 한 번 닦고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그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신 만나지 말죠. 그리고 당신은 언젠가 똑같이 당할 거야. 당신이든 당신 자식이 됐든.”


마지막으로 팀장에게 손가락 끝을 던져준 후,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 언뜻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정신력으로 나는 가방을 든 채 지하철 역으로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것이 겨우겨우 하고 싶은 말을 뱉어냈기 때문이든, 막상 뱉어놓고 보니 후환이 두려워서이든.


술 때문에 핑 돌았던 눈물은 어느새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장마처럼 눈물은 참 속 시원하게도 쏟아졌다. 문득 헤어진 애인이 생각났다. 왜 그리도 야망이 없냐고. 직장을 옮길 때도 투덜거리던 그였다. 좋은 회사 들어갔으면 돈도 많이 벌고, 높이 승진도 할 욕심이 있어야지, 적당히 벌면서 쉬기 위해 직장을 옮긴다는 게 말이 되냐고. 사람이 그렇게 욕심이, 야망이 없느냐고.


글쎄, 그냥 그렇게 행복한 삶보다 더 큰 욕심이 있을까, 요즘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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