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이 있어요 2/2

하루 한 편 단편소설

by 봄단풍

그 말을 했어야 했다. 선배의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열린 입에서는 하고 싶었던 그 말이 흘러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정작 간신히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말은 잘 지냈냐는 진부한 인사가 다였다.


“나는 잘 지냈지. 너는 어때?”

“저도요. 그냥저냥.”


따뜻한 집에 돌아와 벗은 외투를 벽에 거는 것처럼 선배의 입가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걸렸다. 그 모습마저 오 년 전 그 때와 똑같았다. 무엇을 하든 선배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웠으며, 뭘 하든 선배 앞에서의 내 행동은 어색하고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리에 앉은 선배는 따뜻한 차를 주문했다. 그 사이 창 밖에는 어둠이 더 짙게 내려앉았고, 주홍빛 가로등 너머 화려한 간판들도 불을 밝혔다. 며칠 전에 쌓였던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듯, 민들레 꽃씨처럼 보송한 눈도 바람없는 거리 위로 천천히 뿌려지고 있었다.


“시간 정말 빠르다.”

“그러게요.”


그렇게 말하는 선배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에는 무슨 생각이 담겨있는지, 반쯤 감긴 눈은 창밖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선배의 모습은 내게 창밖보다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왔다.


“그래, 꿈은 이뤘어?”

“네?”


이미 한참 지난 옛날에 발을 들여놓고 있던 정신은 그제서야 카페로 돌아왔다. 바보처럼 두 눈을 크게 깜빡이는 내 모습을 보던 선배는 차를 한 번 홀짝이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할 말 다하고 사는 게 꿈이었잖아.”

“아……. 그랬죠.”

“그래, 요즘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있어?”


뭐가 재밌는지 선배는 그렇게 말하고 혼자 쿡쿡 웃었다. 여전히 그 꿈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아름다운 그 미소가 내게는 더 경이롭게 다가왔다. 그것이 기억의 미화 때문이든, 몇 년 째 눈 안쪽에 자리잡은 콩깍지 때문이든.


“전보다는요.”


이제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어른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만큼 성장했다. 어설펐던 표현, 마음을 다 보여주지 못했던 말들, 혹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행동들을 자제할 수 있다. 조금 더 자연스럽고, 조금 더 어른스럽고, 조금 더 분위기에 어울리는 모습을 지어낼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짧은 대답 후에 지어보인 미소가 그토록 어색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아참, 줄 게 있는데.”


그렇게 말하고 가방을 뒤지던 선배는, 금세 하얀 봉투를 꺼냈다. 별다른 장식도 없이 펑퍼짐하고 두툼한 봉투. 나는 괜히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봉투의 앞뒤를 살폈다. 머릿속에서는 봉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유력한 가능성만을 배제한 채 이상한 소설들만 써내려가고 있었다. 편지인가, 선물인가……. 하지만 어서 열어보라는 듯, 선배의 얼굴에 자리한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나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혼하세요?”

“응, 다음 달이야.”


이제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어른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만큼 성장했다. 그 때 그 때 생각이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도록 표정을 관리하는 법도 익혔고, 한 마디 말을 내뱉더라도 먼저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게 됐다. 이제 나도 성장했다, 그 때와는 달리 표정 하나, 말 한 마디에 내 깊은 속을 보이지 않으면서 뻔뻔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축하해요, 선배.”

“고마워.”


눈은 계속 내렸다. 내리는 눈은 점점 더 굵어지고, 까맣게 얼룩졌던 거리도 점점 하얗게 물들기 시작하고. 풍경이 예뻐서일까, 아니면 내가 그만큼 성장했기 때문일까, 나는 자꾸만 흘러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핫초코는 씁쓸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은 채, 이 카페의 가장 달달한 음료를 나는 이 세상 가장 씁쓸한 맛으로 마시고 있었다. 그 다음에 몇 시간동안 선배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왜 선배에게 그 말을 전하고 싶었는지도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았다. 끝을 맺지 못한 기억, 표현하지 못한 감정, 앙금처럼 가슴 깊숙한 바닥에 깔려있던 마음을 이제는 보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제 가야겠다. 같이 갈까?”

“아뇨, 전 좀 더 있다 갈게요.”


선배는 한 번 끄덕여보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 속 그 때와 변함없는 미소를 마지막으로 선배는 그렇게 카페에서 걸어 나갔다. 이미 차갑게 식은 머그잔을 괜히 한 번 홀짝이고, 뒷머리를 긁적이고, 소매를 걷었다가 다시 펴보고. 딸랑, 마지막 선배의 뒷모습은 그렇게 문 너머로 사라졌다.


기억은 용량이 정해져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꽤 많은 일들을 잊게 된다. 남아있는 기억을 모아 추억으로 단장하며 살아가곤 하는데, 마음에는 그 용량이라는 게 없는 듯 하다. 지나간 게 아니라 그저 바닥에 켜켜이 쌓여있었던 것 같다. 시간의 강물이, 바닷물이 아무리 빨리 흐른들 마음 깊은 바닥까지 훑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흐릿한 기억들에 감정만 선명하니, 수채화 물감을 물 없이 덕지덕지 바르는 기분. 선배와의 이야기는 그랬다. 붓이 상하고 종이가 긁히는 것처럼 가슴도 어딘가 아려온다. 그래도 쌓여있었으면 계속 덮어져 있었을 마음, 솟구쳐 올라오니 이제 흐르는 물 따라 멀리 씻겨 내려가겠지.


눈은 여전히 그칠 줄을 몰랐다. 구두를 고쳐 신고 코트를 여미고,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머그잔을 괜히 한 번 돌려보고. 더 이상 가다듬을 것도 없었고, 굳이 더 보탤 것도 없었다. 선배가 떠난 자리를 떠나는 일은 그리 발이 무거워지는 일도 아니었다. 마음 가벼워지는 한숨을 가볍게 내뱉고, 나는 간신히 했어야 할 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이 좋아했어요.”

이전 01화할 말이 있어요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