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두려워하는 몇가지 말들
“승민씨, 내일부터는 안 나와도 괜찮아.”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팀장은 그렇게 말했다. 왜 그렇게 안쓰럽게 쳐다보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딱히 그 말에 해주고 싶은 말이 없어서 멍하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니,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꾹 참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는데……. 그렇게 결정이 났네.”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 팀장은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왜 그렇게 미안해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온갖 독설을 퍼붓던 팀장이었는데, 말만 하면 한숨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사람이었는데. 이제와 미안한 건지, 정말 미안하긴 한 건지 궁금했다. 물론 굳이 입을 열어 물어보진 않았다. 나름 비위도 잘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열심히 잘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혹시 입사 후 회식 때 술을 마시지 않아서 그런 걸까?
『승민씨, 본부장님이 파도타기 하자고 하시잖아.』
그건 불과 며칠 전 이야기였다. 파도타기가 뭔지 몰랐던 게 잘못일까, 아니면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던 게 잘못일까? 회식의 분위기는 입사 하면서 받았던 교육과 너무나도 달랐다. ‘건강한 가정을 위한 회식의 법칙! 1차까지만, 술은 강요하지 않고, …….’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약을 먹고 있어서…….』
급하게 떠오른 궁색한 변명을 대본다. 물론 거짓말이지만, 마음은 벌써 멋대로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진짜면, 강요하는 사람이 잘못한 거 아니야?
『약? 무슨 약?』
『감기가 와서……. 감기약 먹고 있습니다.』
쯧쯧, 의지가 부족해, 의지가. 혀를 끌끌차며, 평소에 마주칠 일이 없었던 본부장님은 그렇게 연설을 시작했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땐 말이야, 링거 맞고도 술을 마시고 그랬어. 그러고도 다음날 새벽에 출근했다고. 알지 그 때 분위기?』
그럼요, 아유, 그 땐 말도 못했죠. 껄껄 웃는 소리와 함께 분위기가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그리 대수롭지 않은 한 마디였음에도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모두 박수치기 바빴다. 본부장은 요즘 세상에 어떻게 술을 강요하겠냐며 나를 빼고 파도타기를 시켰고, 다들 아무렇지 않게 술을 들이켰다. 혹시 고기라도 열심히 구우면 다시 점수를 딸 수 있지 않을까, 얄팍한 희망을 안고 나는 열심히 집게를 놀렸었다.
“그동안 일한 거 계산해서 계좌로 들어갈 거야. 다음 달 초쯤에 될 거니까 좀 기다려주고.”
팀장의 목소리는 나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그 다음에도 몇 마디가 이어졌지만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임으로 몇 번인가 듣고 있다는 표현을 했고, 팀장은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그 와중에도 내 머리는 멋대로 이유를 찾기 바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하니, 반대로 과거를 들춰보면 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승민씨, 잠깐만.』
몇 달 전, 먼저 퇴근하려는 나를 가까이 오라는 손짓으로 불러 세운 팀장은 한숨을 먼저 푹 내쉬는 것으로 입을 열었다.
『승민씨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반 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 부서 일 다 알아?』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망연히 고개를 저었다. 같은 부서라 해도 맡은 일이 각자 다르니 그럴 만 했다.
『그러면, 자기 일 다 했어도 다른 사람들 보면서 조금이라도 더 배울 생각을 해야지, 그냥 가면 돼?』
때마침 인사하고 퇴근하려던 선배 대리는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어색하게 고개만 숙여보이고 후다닥 사라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두어번 되뇔 뿐이었다. 사실 정말 그게 잘못한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결국 그 날 나는 스크롤만 오르락내리락, 마우스만 몇 번 딸깍거리던 팀장이 퇴근하기까지 기다렸다가, 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저, 이번 달……. 아니 앞으로 승민씨가 대신 수고 좀 해줘야겠어.』
그리고 불과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새로운 해외 프로젝트로 몇 달여간의 야근이 확정되었을 때 팀장은 나를 불러 그렇게 말했다. 부서에 사람이 몇 없는데, 팀장이 야근하면 부서 입지가 좁아질 것이며, 다른 부서에게 얕보일 거라고.
『그리고 내가 팀장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제는 좀 쉬어야하지 않겠어? 어, 승민씨 같으면 야근하고 싶겠어?』
문득 궁금해졌다. 팀장이 되도록 일을 열심히 했으니 이제 쉬어야 마땅하지 않냐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인지, 나는 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지. 권한이 커질수록 책임이 많이 따르는 법이고, 그만큼 업무가 많아지니 돈도 많이 받는 게 아니었나? 오래 일하고 높은 곳에 왔으니 쉬어야한다고? 그럼 돈도 덜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입사 후 표정관리에 대해 한 소리를 들었던 터라, 최대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생각을 잘 숨겼으리라 생각했다. 왜냐면 다음 날도, 그 다음 주도, 프로젝트가 계속되는 내내 팀장은 퇴근시간이 되면 당연하다는 듯 사무실을 뛰쳐나갔으니까. 내가 기분 나쁜 티를 냈더라면 몇 번 정도는 고생많다, 수고한다 정도의 인사는 건넸을테니까. 그래, 나는 잘 버텨냈다. 그건 분명했다.
『승민씨,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좀 내지?』
그건 또 며칠 뒤의 일이었다. 나는 잘 못 들었다는 시늉을 하며 재빨리 달력을 살폈다. 토요일은 내일이었다. 이미 오랜 친구의 결혼식을 가기로 했던 터라 나는 먼저 팀장님께 이유를 물었다.
『옆에 재무팀 알지? 주말에 부서 야유회를 하는데 사진 찍어 줄 사람이 없대.』
청천벽력같았다. 아니, 청천벽력이면 어쩔 수 없다라는 생각이라도 들지. 만나본 적도 없는 다른 부서 야유회에, 왜 내가 가서 사진 촬영을 도와야 하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회사 업무도 아니고, 사진 촬영이 야유회에서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닐 텐데.
『팀장님, 제가 내일 친구 결혼식이 있어서…….』
『그럼 내가 갈까? 내가 가서 막 사람들 사진 찍어주면, 어? 거기 분위기가 좋겠어?』
또 다시 죄송합니다, 라는 말이 멋대로 새어 나왔다. 잘 벌어지지도 않은 입술 사이로도 죄송하다는 말은 어찌나 그렇게 잘 흘러 나오는지.
『다른 부서여도 한 가족이라고 생각해야 해. 그냥 놀러가는 게 아니라, 부서 단합을 위해서 가는 거니까. 이것도 업무라고. 그러니까 가서 논다고 헤벌레 하지마. 긴장하고, 사진도 잘 찍어보고. 승민씨 하는 거에 따라 내가 평가받는 거니까. 부서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다녀오라고. 이 참에 사진도 연습하고 얼마나 좋아?』
나는 그날 밤, 결혼을 앞둔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인사와 함께 축의금을 부쳤다. 요즘에는 핸드폰 몇 번의 터치만으로도 축의금을 축하 인사와 함께 보낼 수 있다. 그래, 참 편리한 세상이다.
아래 2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