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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Oct 05. 2021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단코

[돌고 돌아 재입사]

재입사 일터. 이곳은 나를 미워한 그녀를, 혹은 내가 미워한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지만 그래도 내가 이곳에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 있다.

여러 이유들 가운데 가장 귀한 이유 하나를 꼽자면, 바로..


다름 아닌 청소년들이다.


이름 모를 청소년들이 내게 주고 간 따뜻하고, 때론 날카롭고, 때론 버릇없고 때론 방정맞은.. 그 낱낱의 기억들이 있었기에 나는 재입사를 선택할 수 있었다. 물론 벌이를 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결국 택해 버린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과 함께 꾸미던 시간들 덕분에 나는 왠지 모를 작은 향수를 품고 이곳에 돌아왔다.


지금 같은 프리랜서 강사가 아니라 아예 이 기관에서 상주하며 일을 하고 있었을 때, 나는 이곳에서 1년이면 2,000명에 가까운 아동, 청소년들을 만났다. 초중고 가리지 않고 찾아왔고, 나는 때론 버겁게, 때론 낯설게 그들을 반겨야 했다. 

개인정보를 이유로 지금은 체험 명단을 작성하지 않지만, 내가 일하던 첫해에는 담임선생님께 체험 명단을 전달받아 아이들이 체험 내내 자신의 이름을 자기 가슴팍에 붙이도록 했다. 아침에 체험 준비를 마치고 곧 들이닥칠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나는 라벨지로 뽑은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읊어 봤다. 그리고 나 나름대로 이 이름을 누가 떼어 가는지 혼자 내기를 해 보기도 했다. 오, 저 예쁜 이름은 저 아이 것이었구나? 오, 저 이름은 반전인데? 여자아이 이름이었군! 등등


그리고 나를 미워한 M선생마저 놀란 능력 하나가 내게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이름 외우기' 능력이었다. 사람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청소년들 이름은 정말 잘 외웠다. 하지만 진짜로 잘 외웠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외우려고 노력했다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체험을 유도하면 아이들은 신기해하면서도 좋아했다. 물론 자기 이름이 불리는 게 싫어서,

"우리 친구는 이름이 뭐예요?"

라고 내가 물으면,

"윌리엄입니다."

와 같은 거짓부렁을 내게 건네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체험 내내,

'리엄'아, 이리 와, 우리 리엄이는 이거, 어떻게 생각해,라고 윌리엄에게 묻곤 했다.


끝까지 자기 이름을 안 밝혔지만 윌리엄 친구는 자신이 '리엄'이라고 불리는 것까지 거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소소한 재미가 있었기에 나는 재입사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소소한 재미를 알게 해 준 이들은, 사실 따로 있었다.



고백하자면, 아주 오래전, 나는 종합복지관 청소년방과후교실에서 3년 4개월 동안 일한 적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청소년들이 사춘기를 겪는 것처럼 '사회인 사춘기'를 겪었다. 첫 직장이었고, 뒤늦은 사회 진출이었다. 어리바리 선생을 챙겨 주던 이들은 팀장님도 과장님도 아닌, 다름 아닌 '내 청소년'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아팠고 함께 기뻤고 함께 성장했다.


너무 심한 자랑이지만, 아이들도 나를 무척 좋아했고 나도 아이들을 정말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는 표현이 더 맞다. 뭐, 가끔은 중2짜리가 나를 엄마,라고 불러서 뜨악하기도 했고(지금은 절대 뜨악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지만), 술 먹고 뒤늦게 출석해 밤늦게 술주정을 하던 고삐리 녀석들을, 다른 선생님들께 안 들키게 하려고 진땀을 왕창 뺐던 시간들도 있었다. 내게 '뻥'을 치고 '삥'을 뜯어 간 녀석들도 몇몇 있었고, 온갖 욕설을 내게 퍼부어 놓고, 실은 자기도 뒤늦게 이불킥을 했었노라고, 내게 편지를 보내온 녀석도 있었다. 

그곳에서 난 여름마다 겨울마다 아이들과 캠프를 꼬박꼬박 다녔었는데, 캠프를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가열하게 힘들었지만 그들과 함께라서 참 행복했고 많이 즐거웠다. (정말 많이 웃었다.) 내가 생일이라는 이유로 그렇게나 많은 축하와 선물을 받은 것도 아마 그 아이들과 함께한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추억이 너무 많아서 그 3년 4개월 하루하루가 내 인생 드라마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다.


그런데 나는 그런 곳을 그만뒀다. 번아웃이라는 이유로 그 사랑하던 청소년들을 쉽게 놓아 버리고 퇴사를 택해 버렸다. 변명이지만 그땐 힘들었다. 그만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인생 자체가 답이 안 보였고 우선 그곳을 떠나야만 할 것 같았다. 나의 사랑이 더 필요한 중1, 중2 아이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매정했다. 그 아이들을 중학교 졸업이라도 시켰어야 했다. 무책임했다. 그들에게 난 상처를 줬다. 나는 그 아이들의 눈물방울을 훔칠 자격도 없는 지도교사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지막 날, 나 같은 선생을 위해 기꺼이 울어 주었다.


그런 그들을 재입사 일터인 이곳에서, 짧게나마 다시 만난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90분, 120분의 짧은 만남들뿐이었지만, 그 짧은 체험 도중에도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틀어서 나를 자기 채널에 등장하게 했던 대담한 소녀도 있었고, (나, 그때 그 채널에 브이까지 해 줬다.)


전반전 수업 내내 툴툴거리고 아무 참여도 안 하다가, 쉬는 시간에 갑자기 훅, 내게 고백을 건네던 남자아이도 있었다. 물론 애정 고백은 아니다. 처음 본 강사에게 녀석은 자기 집안 가족사를 고백했다. 어른들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속내를 갑자기 털어놨다. 그 아이의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처음 본 사람에게 마음을 열 수도 있는 솔직함. 앞과 뒤를 자로 재듯 딱 재는 어른들과 달리 우선 사람이든 관계든 일상이든 부딪쳐 보는, 청소년들만의 묘한 습성. (물론 체험 내내 청소년들에게서 가장 많이 포착한 건 무기력 습성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난 그 습성을 열심히 물려받곤 하였고..)


그렇게 난 누구 앞에 서더라도 늘 발표불안, '후들후들' 강사였지만 그래도 청소년들의 무심한 표정 사이사이로 드러나는, 어쩔 수 없는 그 싱그러움들과, 욕설 섞인 그 어설픈 패기들을, 나는 감히 사랑했다. 평소 낯을 심히 가리는데도 '청소년 낯'은 그나마 조금 덜 가렸다. 

어쩌면 나는, 아마도 청소년을 조금쯤 짝사랑하나 보다.



"이번 명절에 아이들 좀 모아서, 쌤 한번 찾아뵐게요."

내 청소년들 중에는 이렇게 호언장담을 해 놓고, 그 긴 명절 내내 연락이 없어서, 제대로 개인 약속 한번 못 잡게 만든 녀석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제안을 내어놓은 녀석은, 기어이 약속을 딱 한 번 무사히 지켰다. 5년? 전이었나? 이제 어른이 된 청소년 아이들이 그래도 나를 위해 모여 줬다. 우리는 대학로에서 찜닭도 먹었고 실내 사격 놀이터에서 사격을 하고서 작은 인형도 탔고, 무한리필 집에서 고기도 많이 많이 구워 먹었다. 게다가 맥주까지 같이 마셨다! 그렇게 자주 가던 노래방도 오랜만에 들러 봤다. 서점에서는 선생인 내가 큰맘 먹고 1인당 1책을 사 주시기도 했다. 또, 우리는 차도 마셨다. 한 남자아이는 사전에 내게 약속한 대로, 선생인 나한테만 차를 사 줬다. 내가, "차car 사 준다는 얘기 아니었냐"라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그런 소리 하지도 말라고, 차tea였다고 대답했다.) 여담이지만... 그날 하루 만에 나는... 이십만 원을 넘게 쓴 것 같다.... 더 썼나? 아무튼 그 뒤로 쫄쫄 굶고 살았다는 후문이다.


그래도 그런 그들이 있었기에, 내 재입사도 돌고 돌아 이곳으로 무사히 올 수 있었다.

내 인생 최고의 그 청소년들이 아니었다면, '청소년'이 주는 매력을 평생, 영영 몰랐을 테고, 나는 아마 지금 이 재입사일지도 쓰지 못했을 거다.



오늘은,

그 아이들이 어쩐지 좀 많이... 보고 싶다.

(스릉스릉한다, 내 인생, 최초이자 최고의, 내 귀요미 청소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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