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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Oct 21. 2021

너무 많이 알아도(?) 탈

[돌고 돌아 재입사]

재입사를 하며 걱정한 것은 나의 무지.

많이 아는 게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나, 발바닥 직장인(발바닥으로만 직장을 다닌 직장인)은 아니었나 보다. 퇴사할 때 가지고 나온(일부러는 아닌데 게을러서 안 지우고 있었던) 자료들도 많았고, 생각보다 1년 8개월의 기록들이 내 뇌세포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내 usb 구석구석, 내 기억 구석구석에 옛 일터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사업에 도움을 주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이 재입사자, 자꾸 남을 침범한다.

(이 침범은 사실 능력 있는 그녀(M)의 특기였는데 능력 없는 나까지 이런 짓을 한다....)


자세히 말하자면, 운영인력 선생님이 해야 할 일을 자꾸 침범한다. 초반에는 아직 내가 더 많이 아는 편이긴 했다. 나는 당시 이 체험관에서 일할 때 상주 인력이면서 동시에 강사였다. 그래서 운영인력 선생님이 하는 일이, 사실은 내가 다 했던 일이다.(온라인 프로그램 일은 빼고.)



어느 날은 이랬다. 회의를 마치고 1층 체험관으로 내려와서, 

“전원은 어디를 켜야 하나.”

라는 연구관님의 말에,

“아, 여기 밑에 큰 전원을 켠 뒤에 체험 시설별로 하나씩 여덟 개를 다 눌러 주면 돼요.”

이런 식으로 본의 아니게 내가 먼저 아는 척을 한다. 1년여의 공백을 잊은 듯, 버튼을 눌러 시범을 보이는 내 동작이 어쩐지 심히 자연스럽다.


“이 띄어쓰기 발판은 시설 보수 업체한테 연락을 하셔야 할 거예요.”

라고 연구관님이 다른 과장님께 말하면서,

"근데 시설 담당 업체가 어디였더라."라고 혼잣말을 하시는데, 나도 모르게, 또...

“시설 담당 업체는 작◯◯◯이에요.”

라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역시 선생님이 잘 아시네요!"

내 말에 반가워하시는 연구관님이다.


머리로는 이곳을 싹 다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내 뇌세포들은 모조리 그때 그 입사와 퇴사 사이의 빼곡한 시간들을 기억한다.

"이건 땡땡 사이트에 가서 미리 문자를 충전해 놓으면 아이들이 체험 끝난 후에 휴대폰 전화번호 눌러서 자기 사진을 전송받을 수가 있어요."

누가 물어봤어? 라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는데, 자꾸만 나, 운영인력 선생님이 안 물어본 말까지 한다. 그냥 뭐든 도움이 될 만한 말이면 다 해 드리고 싶은데.. 나 이거 이거, 혹시, 잘난 척일까? (안 알려 줘서 끙끙거렸던 경험, 그 어려움을 너무 잘 알아서 그런가?)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공적으로 단체 메일을 써야 할 일이 있었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오지랖이지만 다른 자료들도 첨부합니다"라고 자료를 첨부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아주 나~중에 수신 확인함을 보니, 두둥... 내 메일을 확인 안 하셨더라는... 역시 나의 오버였다. 알아서 잘하시는 분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주제넘게.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고, 선을 지키는 게 일을 잘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선의'이다.


여기 처음 온 강사들이나 처음 이 일을 맡은 업체 선생님들이, 처음 맡으신 업무에 혹 헤매며 힘들까 봐, 나는 먼저 나서서 호의를 베풀려고 했다. 그 호의 위에 조금 수줍고 예의 바른 태도를 덧보태면서... 어쩌면 예전의 그녀(M)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아는 척을 하려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평소에 무지막지한 '착한 척 대마왕'이이어서 또 그 습성이 또 도진 것일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이젠,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 한다. 일터에서도 신호등을 잘 지켜야 한다. 일터에서는 과속을 경계해야 한다. 초록 신호등이라고 앞만 보고 달려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빨간 신호등이라고 계속 도로 한가운데 멈춰 있어서도 곤란하다.


일터의 이 신호등은 언제 다시 나를 변화무쌍하게 뒤흔들지 모른다.

적당한 속도 조절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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