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경 Glasses> 리뷰
여기서 마시는 맥주도 최고지만 사색하는 것도 최고네요.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바다에 가지 않으면 왠지 서운하다. 그렇다고 수영을 잘하는 것도, 물놀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볼뿐이다. 수평선이나 파도치는 물결을 본다. 그럴 때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고요한 그 순간이 좋아, 나는 종종 바닷가 앞 나만의 정원을 상상하곤 했다.
일상의 쳇바퀴에서 튕겨 나와 도망치듯 섬에 도착한 타에코. 지친 그녀의 눈에 섬사람들은 어딘가 이상하다. 바닷가 앞에서 수상한 체조를 하고, 빈둥대다가 수업에 늦으며, 관광할 곳을 물으면 그런 곳은 없으니 사색을 해 보라는 답변만 늘어놓는 게 영 불편하다. 지나치게 여유로운 모습에 이질감을 느낀 타에코는 하마다 민박을 떠나 다른 숙소로 향한다. 사색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곳이라는 사람들의 우려를 뒤로하고 도착한 곳은 밭일 체험 콘셉트의 숙소다. 호미를 쥐여주는 주인장에 타에코는 질겁하며 뛰쳐나온다.
한참 동안 커다란 캐리어를 끌다가 주저앉은 그녀 앞에 자전거를 탄 사쿠라가 나타난다. 간신히 뒷자리에 올라탄 타에코는 결국 캐리어를 길에 두고 온다. 커다란 짐짝을 버린 후부터 마음의 짐도 덜어진 것일까. 그녀는 좋아하지 않는 빙수를 먹어보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바닷가 앞 빙수 가게는 매년 봄에만 문을 연다. 가게 주인 사쿠라가 그때 섬을 찾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빙수 맛 하나는 최고라는 것이다.
맛있는 빙수를 먹으러 하나둘 모이다 보면 가게는 어느새 섬사람들의 아지트가 된다. 얼음 장수, 민박 주인 유지, 생물 선생님 하루나, 아이들까지 모두 가게 앞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 간다. 먼 산 보듯 바다를 바라보며 빙수를 먹는 그들의 표정은 마냥 평화롭다. 사쿠라는 빙수 값을 받지 않는 대신 손님들의 마음을 받는다.
어떤 아이는 고이 접은 종이 접기를 전하고, 유지와 하루나는 만돌린 연주를 정성껏 들려준다. 때때로 가게 앞에서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거나 바둑을 두거나 체조를 한다. 누군가는 멍하게 있고 누군가는 시를 읊는다. 의식적으로 멈추려 하지 않아도 빙수 하나를 다 먹을 때까지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이 공간에서는 파도 소리와 드넓은 바다가 배경이 되어, 침묵을 깨지 않고 생각에 잠긴 서로를 존중한다.
사쿠라의 빙수 가게는 여러모로 사색하기 딱 좋은 공간이다. 여름을 알리는 비가 내리고 빙수 가게는 문을 닫는다. 사쿠라는 떠났다. 하지만 바닷가 앞 빙수 가게는 섬사람들 마음에 남아 ‘모두의 정원’이라고 불릴 것이다. 길을 걷다 쉬어가는 곳, 계속 찾고 싶은 곳, 마음을 전하는 곳, 사람들이 아끼는 그곳은 그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모인 공간이자, 어떤 조형물보다 아름다운 바다를 품은 정원이기 때문이다.
※ 본 리뷰는 마케터로 근무할 당시 '<정원을 탐험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어라운드 매거진 49호, p.156'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