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후회

by 봄남

“결혼은 우리가 하는 건데 왜 부모님들이 난리시지. 부모님들이 우리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


레아가 화가 나서 씩씩댔다. 그런 레아의 분개를 보고 재현은 미소를 지으며 안아줄 뿐이었다. 그들의 부모님의 반대가 거세어질수록 자신들의 애틋한 사랑이 더 소중해져 갔다.


그들이 받는 핍박은 동화 속 비련의 공주님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그런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사랑에 더 헌신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들의 눈물은 훈장이었다. 레아는 신혼집이 당장 없으면 지하 단칸방인 월세방을 산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다. 재현은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그녀가 너무 용감하고 해맑아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소꿉놀이를 하러 가는 게 아니 란다.” 레아의 아빠가 아침 식사 중에 점잖게 꾸짖었다. 아빠의 말에 발끈한 레아는 귀까지 벌게져서는 재현이는 엄마가 고른 아빠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집을 뛰쳐나왔다.


레아는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부모님이 싫었다. 되려 부모님에게 윤리와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돈 밖에 모르는 속물이라고 욕했다.


그녀는 재현과의 사랑으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의 결혼 계획을 반긴 사람들은 진성과 주하가 유일했다. 그들은 넷이 자주 만나 저녁을 함께 먹었다. 진성과 주하는 그들에게 유일한 돌파구였다.


“벌써 11시야. 나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아… 버스 타고 가기 싫다.”

“나랑 같은 방향이니까 내가 태워 줄게.”


진성이 너무 많이 먹어서 배를 두들기고 있는 레아에게 말했다.

“나야 고맙지.” 레아가 하품을 하며 말하자 재현도 진성에게 고맙다고 했다.


재현은 진성의 배려가 좋았다. 다른 친구 백 명을 합친 것보다 진성 하나가 더 소중했다.


다음 날 평상시 대화가 없는 재현의 아버지가 웬일로 아침부터 잔소리였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지 않았음에도 술기운이 나는 목소리를 내셨다.


“너 이놈의 자식 여자 잘못 만나서 초가삼간 다 태우지 말아라.”

“그럼요. 레아는 좋은 여자예요. 저한테 넘치는 사람이죠.” 그는 최대한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지만 또 싸움으로 번질까 봐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 댔다. 어머니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와 재현을 번갈아 보았다.


“넘쳐 넘쳐. 그래서 안돼. 지금 만나는 그 애. 들어 보니 그쪽에서 너를 떼어 내려고 엄청 난리라던데.”

“네. 레아요.”

“그래 레안지 아래인지 돈 밖에 모르는 그 집안사람들을 네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냐!”


재현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는 그가 쥐고 있던 젓가락을 천천히 내려놓고 아버지를 노려 보았다. 그리고 분노에 가득 차 떨리는 목소리로 차근차근 내뱉었다.


“아버지. 아버지와 단 한 번도 대화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난 평생 아버지와 대화하고 싶었어요. 그동안 제가 하는 모든 일이 다 마음에 안 드셨죠. 이번 일도 예상은 했어요. 아버지는 통보만 하셨지 대화를 하시는 분은 아니시니까요. 아버지의 승낙은 이제 제게 아무 의미 없어요. 제가 결정하고 제가 살아요.”


그는 의자를 밀어내고 일어나 곧바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이고. 이눔아 밥 먹고 가야재! 아이고… 당신은 뭔 소리를 아침 댓바람부터 하느라 그려요오.”


엄마가 아버지와 재현을 말리며 울기 직전의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는 분노를 보여주듯 현관문을 대차게 닫고 나왔다. 이젠 지긋지긋한 이 집에서도 그만 살고 싶었다. 레아가 답이었다. 그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레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따 일 끝나고 데리러 갈게. 오늘 드레스 보는 날이지?”

“어 오빠, 근데 나 오늘 야근이야. 내일 가야겠어.”

“어. 어. 그래. 이따 저녁 사들고 갈까?”

“아니. 같이 일하는 사람 눈치 보여서…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고마워 오빠.”

“응. 그럼 내일 봐.”

“응.”

“레아야.”

“응.”

“사랑해.”

“나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조금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재현은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갔지만 소파에 붙어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싸우고 나온 것을 의식하신 것일까. 아버지도 없고 티브이도 켜 있지 않았다.


그는 웬일인지 횅한 거실을 한동안 지켜보다 방에 들어가 단숨에 침대에 몸을 던졌다.


다음 날 회사 일이 끝난 후 진성, 레아, 주하와 같이 레아의 드레스를 보러 갔다. 드레스 숍으로 향하는 재현의 발걸음은 이상하게도 경쾌하지 않았다. 어제 아버지와 싸우고 나온 후 괜히 마음이 좋지 않은 거라고 스스로 일러두었지만 거리낌은 나아지지 않았다.


마치 같은 극의 자석을 갖다 붙이려고 하듯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마음속 무언 가가 저항하고 있었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10분 정도 더 걸었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좁은 골목길 사이에서 그들이 예약한 엔틱 드레스 숍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예산이 적은 것을 고려해 레아는 스튜디오도 메이크업도 다 생략했다. 물론 드레스는 입어야 하니 비싼 드레스가 아닌 가격이 좀 더 저렴한 엔틱 드레스로 결정했다. 레아는 그럼에도 너무 행복했다. 레아와 주하는 드레스 구경에 기대에 가득 찬 표정이었고 덩달아 진성도 어깨를 들썩 거렸다. 그들 모두 연신 웃어 댔다. 웬일인지 재현만 빼고. 레아는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이잉 지이잉


“어 누나.”

“재현아,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어?”

“심장 마비…”


누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재현이 발걸음을 멈추자 모두가 재현을 바라보았다. 재현의 가슴이 쿵 떨어졌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입술이 굳게 닫힌 얼굴로 변하자 레아와 진성과 주하가 일제히 긴장했다.


“왜? 무슨 일이야 오빠?”


재현은 대답 없이 냅다 뛰기 시작했다. 이렇게 쉬지 않고 전력 질주를 해 본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는 다시 고불고불한 골목길을 지나 지하철 역으로 들어간 다음 더 고불고불한 루트가 있는 종합 병원에 도착했다. 어떻게 뛰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는 뛰고 또 뛰는 동안 이건 거짓말이라고, 누나가 놀리는 걸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고 엄마와 누나가 실신 직전이었다.


“아버지이이이이이!”


그는 병원 침실에 돌처럼 누워있는 아버지의 시신을 부여잡으며 분노의 목소리로 목메어 불렀다.


“안돼!!!!”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서러움을 폭발했다. 목구멍까지 차 오르는 슬픔을 견뎌낼 수 없었다. 거짓말 같았다. 아버지와의 마지막이 그럴 순 없었다. 그렇게 박차고 나오지 않아도 되었다. 그게 뭐라고 네. 하면 될 것을 말대구를 하고 나서야 분이 풀리는 일은, 대학을 졸업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니 그냥 아무 대화를 안 했더라면 더 나을 뻔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도 낼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는 정말 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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