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시점>
무소식이 희소식인 남매 사이에서 재현의 뜬금없는 연락 때문에 나는 괜히 긴장했다.
나와 만나서 얘기 좀 하고 싶다고, 아니 상담을 하고 싶다는 문자였다. 아기띠를 두르고 몸을 흔들며 둘째를 재우고 있었고 한 손으로는 첫 째 딸아이의 점심밥을 먹이고 있었던 터였다. 그가 난장판이 된 나의 집에 쳐들어 오겠다는 걸 극구 말렸으나 그는 내가 어지르는 거 모르는 것 아니라며 기어코 집을 찾아왔다.
어느새 쌔근쌔근 잠든 둘째 아이를 아기 침대에 눕히고 첫째 딸이 먹었던 식기를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식탁에 앉아 나의 뒤통수에 대고 “누나.”라고 말문을 띄었다. 그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만으로 무언 가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나를 누나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고무장갑을 후다닥 벗어던진 후 그가 있는 식탁으로 가서 마주 앉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누나. 결혼하니까 어때?”
“뭐야. 뭐야. 뭐냐니까.”
나의 속사포 같은 말과 달리 그는 나무늘보처럼 목소리를 한 없이 늘어뜨렸다. 나는 답답했다.
“나 결혼하고 싶어.”
“뭐? 여자 있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심각한 문제가 돈 문제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일단 안심했다. 그런데 이 녀석, 벌써 결혼할 나이가 돼있다니 사뭇 기가 찼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길래 먼 길 행차 하셨나 궁금했다. 단 한 번도 우리는 서로의 이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여자친구 부모님이 엄청 반대하시는데….”
“….”
“여자친구가 그래도 나랑 결혼하겠데. 그 아이 고집을 아무도 꺾을 수 없어.”
“겁나 사랑하네?”
“누나! 집중해 줘.”
“어. 그래.”
나는 어느새 아줌마가 되어서는 애만 보느라 서정적이고 교양 있는 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잠깐 머쓱해졌지만 다시 최대한 아가씨처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반대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가난해서.”
“그렇지?”
“응.”
쓸쓸한 정적이 흘렀다. 내가 결혼할 때 그가 쥐어 준 오백 만원이 생각났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정작 아빠는 고마워하지도 않는 아빠의 빚을 대신 갚아가며 만든 피 같은 오백 만원. 마음이 찌릿했다. 그가 자존심이 상하면 나도 싫었다. 가난 때문에 결혼 반대를 하신다는 여자 아이의 부모님 때문에 그의 마음이 상했을 생각을 하니 눈물이 차오르도록 동생의 처지가 애처로웠다.
가난이 무슨 죄인가. 나도 젊었을 땐 그것이 억울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생각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가난은 투지 없고 어리석은 자의 몫일까. 어쨌든 가난은 죄로 이어졌다.
“결혼은 달라. 여자애가 아무리 달라붙어도. 지금 당장은 죽고 못살아도… 살다 보면 습관…이라는 것이 나오거든. 그렇게 유복한 집안에서 살면 소비 습관을 네가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 아이는 다 괜찮데. 내가 가난해도 괜찮데.”
나의 말의 의도와 다르게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거 보니 이 새끼도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그때 우리는 총기를 잃은 아줌마 아저씨였다.
“뭐가 괜찮아. 가난을 걔가 알긴 아니?”
“우리가 아주 가난한 건 아니야. 내가 돈도 벌잖아. 대출받아서 아파트도 살 거야. 우리가 뾰족한 수가 없는 게 아니라니까.”
이놈은 나와 상담하러 온 것인지 설득하러 온 것인지 헷갈리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나는 애가 깰 수도 있으니 조용히 하라며 적을 피하는 초식 동물처럼 예민하게 굴었다.
“가난을 잘 견딜 수 있는 여자는 드물어. 낭만이라고 사랑이라고 지금은 철없이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나같이 똥 밭에 굴러본 사람이 아니면, 가난 때문에 수치스러웠던 사람이 아니면, 워낙 가난했던 사람이 아니면, 경험해 보지 않으면! 그거 견딜 여자…. 없다고 본다. 그것 때문에 이혼하는 사람이 수두룩 빽빽이야.”
“걔는 달라…”
나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다를걸.”
그는 머쓱해졌다. 내가 준 커피 잔을 잡고 살며시 돌리며 나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너도 우리 엄마 봐서.. 알잖….”
나는 수만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나아가 자식들에게 위험한 짓인지 설교할 수 있었지만 거기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설득해도 안될 놈. 설득해도 안될 그런 시기였다. 그리고 나는 암담한 미래가 뻔히 보이는 그들의 사랑을 속으로 애도했다. 나도 꼰대 누나가 되긴 싫었다. 따뜻한 마음으로 장착하기 위해서 얼마간의 정적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기로 했다.
“그래.. 잘 생각해 봐.”
“누나. 누나가 엄마 아빠한테 잘 좀 얘기해 줘.” 그가 안심한 듯 웃었다. 생긴 건 멀쩡해가지고 사리 분별 못하는 어린아이.
“그러엄. 네 편…. 들어줘야지….”
라고 말했으나 그의 편을 들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철없는 자식. 그러면서 크는 거야. 그는 내가 헐레벌떡 차려준 이른 저녁상을 야무지게 먹고 조카한테 용돈 준다며 십만 원이 든 봉투를 무심하게 식탁 위에 올려놓고 갔다. 그는 아빠 보다 더 든든한 존재였다. 나는 정말로 그가 좋은 여자를 만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