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소중한 기억
예전에 모임에서 한 친구가 말했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 하나씩 말해보자."
'뭐가 있더라?' 내 차례가 돌아왔을 때 억지로 쥐어짜서 말해놓고 멋쩍어 웃기만 했다. 생각해 내려고 하니까 모두 흑백 사진같이 빛바랜 것들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럴싸한 행복한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을 하나만 골라주세요.'
영화 '원더풀 라이프'에서는 림보라는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이승과 천국의 가운데 있는 곳이다.
"어제 OO 씨께서는 사망하셨습니다."
죽음을 알려주면서 림보의 담당자들은 개인면접을 한다. 그리고 인생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선택해 달라고 의뢰인에게 말한다. 처음에는 머뭇 거리다가도 어느새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얘기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살아있었을 때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는 사람도 있다. 기억나지 않는 사람에게 림보의 담당자들은 71세의 의뢰인에게 71개의 살아온 영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각자 생각해 낸 기억을 말하면 림보의 사람들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준다. 만들어진 영상을 보면서 다시금 소중한 추억을 가슴에 깊이 새기며 의뢰인들은 마지막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이 영화를 본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 요새 행복에 대하여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태어난 계절이 5월이라서 봄과 여름을 제일 좋아한다. 1년 중 온 세상이 파릇하고 찬란한 계절. 그날도 그러했다. 5월의 어느 날, 언니와 함께 주일 예배 참석 대신 인사동에 놀러 갔다. 주일은 교회에서 봉사하며 지내던 자매에게는 약간의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우리는 하루 동안 처음으로 일탈의 시간을 가져보았다. 뭘 하면 좋을까 하다가 최근에 먹었던 ‘자몽 맥주’가 생각났고 나의 자매님에게도 ‘자몽 맥주’의 맛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더군다나 일탈이라면 낮술 정도는 마셔줘야 될 것 같았다.
“언니, 우리 맥주 마실까? 친구 만났을 때 자몽 맥주를 먹어봤는데 언니도 좋아할 것 같아.”
“그래? 알았어. 진아만 따라갈게.”
모범생인 우리 자매에게는 몹시 스릴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낮술은 생각보다 더 달콤하고 무척이나 시원했다. 게다가 5월인데도 날씨가 더워서 맥주를 마시기에 더없이 좋았다. 일요일 오후 인사동의 술집에 손님은 우리 둘 뿐이었고,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언니야, 행복하다. 그치?”
“그래. 행복이 별건가? 나도 요즘 행복해.”
그때 나는 겨우 서른이 막 지났지만 세상을 다 아는 어른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두 잔의 맥주를 마신 후 밖으로 나와서 걸으며 우리는 계속 웃었다. 언니는 배꼽을 잡으며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재미있다고 했다. 인사동의 정취, 걸어 다니며 눈에 보이는 풍경들이 평범한 일요일 오후를 빛나게 만들었다. ‘이런 일요일도 있구나.’ 그저 즐거웠다.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이 하루가 내게는 행복의 순간을 떠올리면 바로 말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런 우리 자매를 누군가 시기했던 걸까. 바로 다음 날 아빠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쩐지 너무 행복하더라...’
소설 ‘운수 좋은 날’처럼 하루에 주어진 행복으로 모든 걸 빼앗긴 것만 같았다. 아빠는 병마와 용기 있게 싸웠지만 결국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한때 좋은 일이 생기면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행복을 또 빼앗아 갈까 봐 마음껏 기뻐하지를 못했다. 좋은 장소에 가서 기분이 한껏 들떠도 '행복한 게 아니야….' 행복한 마음을 애써 무시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좋은 일이 있으면 기쁘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행복한 순간도 마음껏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림보에 가게 되면 햇살 좋은 날, 언니와 함께 인사동을 걷고 함께 자몽 맥주를 마시던 날을 기억해 낼 것이다. 운수 좋은 날은 잊고.
"자몽 맥주를 마시던 인사동에서 말이야."로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혹시 앞으로 행복한 기억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해도 괜찮다. 언제라도 행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소중한 기억을 많이 품고 있는 충분히 행복한 삶이다. 행복은 늘 곳곳에 숨어있다. 의외로 대단치 않아서 놀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