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한창 무르익은 5월 중순이었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진한 아카시아 내음이 들어와 살랑이며 코끝을 간질였다. '일요일 오후 3시 소개팅이라니...' 한숨이 푹 나왔다. 어쩌자고 월요병을 생각 못 하고 일요일 오후에 소개팅을 잡았을까.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잠시 갈등하다 이내 마음을 접었다. 아무래도 당일 약속 취소는 매너가 아닌 것 같았다. 오늘따라 왜 침대는 더 포근해 보이고 TV 프로그램은 더 재미있어 보이는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을 뒤로하고 소개팅 장소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약속 장소인 L백화점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의 태양이 백화점 광장에 뜨거운 열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벌써 여름 반팔 옷을 입은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여기서 보기로 했는데...'
낯선 사람을 만나기 전의 긴장감과 부담감이 서서히 몸을 감쌌다. 다소 초조한 기분으로 상대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피다 한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저 사람인가?' 다가가서 확인하려다 차라리 전화를 거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연락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루루루! 몇 번의 신호음이 간 뒤, 굵고 낮은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힐끗 옆을 보니 아까의 그 남자는 아니었다. 통화를 하면서 걸어가는데 2~3미터 앞쪽에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하얀 반팔 상의에 정장 스타일의 네이비색 바지를 입고 얇은 재킷은 벗어서 팔에 걸치고 있었다. 적당한 키에 하얀 얼굴, 금테 안경을 낀 따뜻한 인상의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서로 어색하게 눈을 맞추며 인사를 건넸다. 첫눈에 반할만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것 같은 온화한 인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식사 시간을 피한 늦은 오후라 간단히 차 한잔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근처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페는 한산했다. 조용히 대화하기에 좋은 구석 자리를 잡고 음료를 주문했다.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짧은 통성명 후 어색한 대화가 이어졌다. 처음 만난 30대 초반의 남녀가 마주 앉아 할 만한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직장생활, 취미 등에 대해 묻고 답하고 나자 대화가 끊기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행히 적절한 타이밍에 음료가 나와서 홀짝홀짝 마시며 그동안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했다. 음료를 마시다 보니 좀 전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어느새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일하느라 바빠서 여행을 별로 다녀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말에 관심을 기울였고 자주 눈을 맞추며 웃었다.
짧은 이야기가 끝나고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정적이 어색했는지 이것저것 두서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순박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마시던 커피를 서둘러 들이켜더니 괜찮으면 양평을 가는 게 어떠냐고 그가 제안했다.
"경기도 양평.... 이요?"
시간을 보니 오후 4시. 이 시간에 양평을 다녀오면 밤 9시나 10시는 될 텐데... 망설이는 마음과는 달리 입은 벌써 알겠다고 대답한 상태였다. 도대체 왜 알겠다고 한 건지 스스로 의아해하며 남자를 따라나섰다. 그는 주차구역에 세워 놓은 차 문을 열더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어질러져 있는 조수석을 황급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타세요."
자리 정돈이 끝났는지 상기된 얼굴로 그가 말했다. '그냥 타도되는데...' 익숙지 않은 대접에 어색함을 느끼며 차에 탑승했다. 2시간여를 달려 차는 양평의 어느 야외 식당 겸 카페에 멈춰 섰다. 봉주르. 프랑스어 인사말을 상호로 사용하는 그 식당은 일요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넓은 부지에는 통나무로 지어진 건물들이 여기저기 들어서 있었고 그 주위를 아름드리나무들이 감싸고 있었다. 테이블 위의 촛불과 나뭇가지에 걸린 조명들이 어둠을 밝히는 가운데 활기찬 음악이 분위기를 달구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대화가 넘쳐나는 공간에서 항아리 수제비와 해물파전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마음을 무겁게 하던 월요일의 출근 걱정도 잊고 대화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덧 밤이 깊어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다시 차에 올랐다.
환하게 불을 밝힌 다리들이 줄지어 늘어선 한강변을 따라 달리면서 남자는 음악을 틀었다. 밤에 어울리는 느리고 분위기 있는 곡이었다.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목소리로 멜로디를 따라 부르며 손가락으로 톡톡 박자를 맞추는 그를 살짝 쳐다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 알아온 듯한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그와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두자고 생각하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PS. 14년 전 처음 남편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쓴 글입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중년의 부부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날 들었던 노래는 아소토 유니온의 'Think About' Chu'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