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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Sep 23. 2022

요리를 싫어하는 주부입니다

요리 못하는 주부의 밥상 일지


밥은 역시 남이 해 준 밥이 제일 맛있어!


은 주부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나라고 다를까. 집안일 중에 가장 하기 싫은 게 바로 요리이다. 청소, 빨래, 집 정리는 할만한데 음식을 만들고 치우는 건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다.


사실 처음부터 요리를 싫어한 건 아니었다. 미혼일 때는 퇴근 후나 주말에 크림소스를 곁들인 연어스테이크나 로제 파스타, 케사디야 같은 레스토랑 메뉴를 집에서 만들어 먹기도 했다. 지친 하루를 보낸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당시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나서 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남편 아침을 챙겨야 한다는,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에 얽매여(14년 전엔 남편 아침챙기는 게 주부로서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매일 아침상차렸다. 어디 그뿐인가! 퇴근하고 돌아와서는 파김치가 된 몸으로 저녁도 차려야 했다. 퇴근이 나보다 늦은 남편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도와주기는 했지만 음식을 만들고 치우는 그 모든 수고로운 과정을 내가 주도적으로 담당해야 했다. 게다가 요리가 서툴렀던 신혼  시가 식구들, 시가 친척들, 친정 식구들, 남편 직장동료, 남편 동창들, 내 회사 동료와 친구들을 차례로 초대하며 집들이 대장정을 마치고 나니 요리가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남편은 무던한 성격이라 내 불만과 고충을 이해해 주었고, 십 년 넘게 함께 살아오면서 간단한 요리는  줄 알게 되었다. 가끔씩 주말에는 조금 어설픈 브런치 만들어 내 앞에 놓아주기도 하고, 집안일도 함께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3년 전 직장을 관두고 전업주부가 되면서 요리는 다시 내게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맞벌이를 할 때는 자주 외식을 하거나 배달음식을 시켜먹었는데, 이제 '전업'이라는 단어가 붙었으니 매 끼니 정성 가득한 집밥을 차려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식은 유달리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 아니던가. 그래도 반찬을 사 먹는 건 내키지 않아서(산 재료로 만든 건 비싸고, 저렴한 건 식품 첨가물 범벅이니) 만들기 편하고 맛도 좋은 한 그릇 음식을 주로 밥상에 올리고 있. 남편과 나 둘 뿐이니 반찬을 잔뜩 늘어놓고 먹는 것보다 이게 여러모로 제적이다.



최근에 밥상에 올라왔던 메뉴들을 대충 꼽아보자면 가지 덮밥, 콩국수, 골뱅이 비빔국수, 콩나물밥, 게살 유부초밥, 깻잎 쌈밥, 닭가슴살 야채구이, 새우 스파게티 등이다. 덥지 않은 계절에는 쇠고기나 양고기 스테이크를 구워 내놓기도 한다. 그중 깻잎 쌈밥과 게살 유부초밥은 귀차니즘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김밥 대신 해먹은 요리이다. 한식에서 한 그릇 음식으로, 거기서 다시 손이 덜 가는 메뉴로 점점 바뀌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나중에는 샐러드를 주식으로 삼게 될지도 모르겠다.



게살 유부초밥을 내놓은 날, 남편은 유부초밥을 안 좋아한다고 하더니 하나 집어먹어보고는 맛있다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진짜 맛있네. 팔아도 되겠다.


남편의 호들갑 섞인 칭찬을 듣다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신혼 때 남편에게 닭볶음탕을 해 준 적이 있는데 그때도 자기가 안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말하던 남편은 고기와 국물을 조금 떠먹어보더니 맛있다며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었다. 그 후로 남편의 최애 메뉴는 닭볶음탕이 되었다. 사실 블로그를 뒤지다 가장 조회수가 높은 레시피를 따라 한 거라 지금은 양념 비율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뒤로도 간간히 닭볶음탕을 만들어주었는데 그때그때 레시피가 달랐음에도 역시 우리 아내 닭볶음탕이 최고라며 맛있게 먹어주던 남편.





한낮의 햇살이 한풀 꺾인 오후 5시. 이제 슬슬 저녁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요리를 하려니 후~하고 한숨부터 나오지만 오늘도 조리대 앞에 선다. 만드는 과정은 수고스럽지만 밥상머리에서 음식과 대화를 나누는 따뜻한 시간으로 보상받을 수 있기에 귀찮음을 참고 부지런히 움직인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닭다리살이 보인다. 구워 먹으려고 산 거지만 고추장 양념과도 잘 어울릴 것 같다. 그래, 기분이다! 오늘은 이걸로 남편의 최애 메뉴인 닭볶음탕을 만들어야겠다. 콤한 닭볶음탕 국물에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을 섞어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역시 우리 아내 솜씨가 최고야!"라며 추켜세우는 남편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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