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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Sep 28. 2022

꽃을 든 남자'들'

어느 기념일 풍경



지이잉! 휴대폰이 울린다.

"나 지금 지하철에서 내렸어. 식당으로 바로 와."


집에서 저녁을 먹자니까 밖에서 먹어야 한다며 빨리 나오라고 채근하는 남편. 그가 이러는 이유는 바로 오늘이 우리의 14주년 결혼기념일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부부긴 하지만 아직까지 특별한 날은 챙기고 있다. 그동안은 호캉스를 하거나 가보고 싶어 점찍어두었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서 부부의 연을 맺은 걸 자축하곤 했는데(어쩌면 위로일 수도-.-) 이번에는 남편이 바쁜지 연차를 내기 어렵다고 해서 지난 일요일에 미리 당겨서 기념일 식사를 했다. 입구부터 화장실까지 어느 한 곳 모자람 없이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며진 갤러리 카페 겸 레스토랑에서 평소보다 호사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당일인 오늘. 다음 달 카드값도 생각해야 해서 홈메이드 파스타와 와인으로 조촐하게 기념하려 했는데 저렇게 성화를 부리니 못 이기는 척 나갈 수밖에.


약속 장소는 동네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식당으로 들어서니 전망 좋은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그가 보인다. 결혼 후에는 밖에서 약속 잡을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니 다시 연애하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다. 자리에 앉아 뭘 먹을지 고민하며 메뉴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남편이 부스럭거리며 테이블 밑에서 뭔가를 꺼낸다.


"자, 이거~."


고개를 들어보니 내 앞에 놓여있는 분홍색 수국 한 다발. 예상치 못한 선물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언제 준비한 거야? 고마워~~~"


안에 잠들어 있던 소녀가 깨어나 활짝 웃는다. 뿌듯함, 쑥스러움이 뒤섞인 미소가 남편의 얼굴에도 번진다.


여의도의 한 웨딩홀에서 결혼 서약을 한지도 벌써 14년이 되었다. 이젠 싱그러움이 사라지고 뱃살과 주름이 넉넉한 중년의 부부가 되었지만 의 미소는 그 시절의 남편이 여전히 내 앞에 있음을 일깨워준다.


"우리 늙어서도 이렇게 살자."


나 역시 예전처럼 닭살스러운 멘트를 던진 후 주변을 둘러보는데 '으응?' 커플들이 모두 꽃다발을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우리 뒷자리에 앉은 5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까지도.


여기가 우리 동네 기념일 전용 핫플이었나?


핑크빛 필터라도 건지 식당이 좀 전보다 한결 로맨틱하게 보인다. 다정한 말들이 오가는 테이블 위로 꽃처럼 웃음이 피어난다. 설렘이 가득한 공기 속에서 두 번째 식사를 시작한다. 훗날 돌아보면 살포시 미소가 지어질  같은 그런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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