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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모 Apr 26. 2018

도망친 곳에서 만난, 새로운 숲의 '가능성'

쫓기듯 내려온 발걸음이 당당한 선택으로 돌아오기까지, '리틀 포레스트'

혜원은 ‘도망’ 쳤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이외의 해석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혜원은 팍팍한 서울살이에서, 낙방한 임용고시와 다가온 남자 친구와의 이별에서 도망쳐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것은 ‘리틀 포레스트’의 시작과 함께 부정할 수 없는 힘으로 관객에게 전해진다. 


나는 출국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혜원을 만났다. 첫 관람을 마치고 상영관을 나서면서, 이 영화가 우연한 기회로 나를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도망치듯 내려온 혜원이 스스로 대문을 나서 다시 제 발로 고향에 돌아온 플롯이 내게는 더없이 완벽한 위로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언제나 도망칠 수밖에 없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도망친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살면서 한 번쯤은 도망치고, 어쩌면 무수히 많은 도망을 생애 내내 반복하는 것일지 모른다.


언젠가 주문처럼 외웠던 문장이 있는데,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출국 일주일 전, 두 번째 관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새로운 낙원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이 없다는 단호한 문장이 참이라면 우리는 삶의 어느 곳에서도 낙원을 찾을 수 없다. 



나는 생각한다. 혜원이 영월로 도망치지 않았다면, 서울에 남았다면, 소원해진 연인의 곁을 지키며 쓰린 속을 참는 것으로 고통을 마주했다면 그가 일궈낸 숲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어쩌면 평행우주 속 혜원의 숲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혜원은 도망친 곳에서 시작한 새로운 삶을 이렇게 표현한다. “가장 중요한 일을 외면하고 그때그때 열심히 사는 척 고민을 얼버무리려 하는 것 말이다.” 영월에서 혜원이 살아가는 아기자기하고 소담한 일상을 지켜보던 관객은 바로 이 대사에서 마음 한편을 찝찝하게 억누르고 있던 현실을 마주한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현실. 아무 걱정 없이 텃밭을 일구고, 제철 음식을 먹고, 고향 친구와 술 한 잔 기울이는 재미가 한평생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것.


스스로의 상황을 완벽하게 정의한 독백이 흘러나오는 순간부터 영화의 후반부는 '아주심기'를 향해 달려간다. 서울 사람도, 영월 사람도 아닌 애매하고 얕은 뿌리로 서있던 그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마주해야 할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 발로 고향집을 나서는 장면이 그 시작이다.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은 혜원만이 아니다. 뒤늦게 새로운 터를 찾아 떠난 그녀의 엄마가 남기는 메시지는 시기에 대한 말이 아닐까.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지만 그것은 결코 불가능을 의미하지 않는다. 


혜원의 엄마에게 최적의 시기란 그가 훌쩍 떠나버린 바로 그 순간일 수도 있고, 혹은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어느 날이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최적의 시기'가 아니다. 그는 혜원을 위해 잠시 미뤄뒀던 숲을 일구기 위해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제 때 변화한다는 것만큼이나, '최적의 시기'를 찾는 것만큼이나.


지금 여기, 꼬박 열한 시간을 날아온 이곳으로 나는 도망 왔다. 그리고 이 곳에서 '리틀 포레스트' 속 그들처럼 부딪히고 좌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일들을 어떻게든 해결하며 잘 살아낼 것이다. 아주심기를 하고, 도망쳐온 모든 것들을 담대하게 바라볼 용기를 내면서.


평생을 회피하며 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새롭게 정착한 그곳에서 무수한 변형의 '리틀 포레스트'를 꾸릴 수 있다. 도망쳐 내려온 고향에서 혜원이 새로운 터를 일구어 그만의 작은 숲을 찾아냈듯, 어쩌면 나도 새롭게 뿌리내린 이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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