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 향수
꽤 오랫동안 향수를 모으는 것이 나의 취미였다. 나는 도시마다, 여행할 때마다, 해마다 향수를 바꾸는 것을 좋아하는데 나중에 그때 썼던 향수를 다시 맡으면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노션(Notion)에 때마다 바꿨던 향수를 정리하고 있고, Fragrantica라는 웹사이트에 향수리뷰를 적으며 나름 취향을 정리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노트는 Bergamot, Peony, Jasmine, Musk, Aldehyde인데 어차피 이게 탑노트에 있는지, 미들노트 (혹은 heart note라고 부른다)에 있는지, 또 얼마나 쓰였는지에 따라 노트만 보고는 향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직접 매장에 가서 뿌리는 것이 좋다. 밑에 나오는 향수에 대한 설명은 철저히 나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라서 공감 못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 도움이 될까 말하자면, 나는 살짝 중성적인 느낌의 woody 한 향을 좋아하고 너무 달달한 향은 싫어한다. 그렇지만 Jo Malone의 English Pear & Freesia, 혹은 Peony & Blush Suede 같이 유명한 향은 나도 정말 좋아했으니 아마 대중적인 취향에서 너무 떨어진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하나하나 모으다 보니 참 안타까운 점을 발견했다.
1. 가끔 모았던 향수가 단종된다. 그러면 그 향수를 쓰기가 너무 아까워져 거의 손도 못 대고 그저 장식용 향수가 되고 만다.
2. 아무리 많이 뿌려도 50ml 향수를 일 년 안에 쓰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 향수는 꽤나 남는다.
3. 대부분의 향수는 유리병에 담긴 액체이자, 알코올이 들어가 있어 일정한 용량 넘어서는 기내에 반입 불가이다. 하지만 액체이기 때문에 이삿짐으로 물건을 정리해야 할 때는 정말 꼼꼼히, 안전하게 포장을 해야 한다. 심지어 유리이기 때문에 금이 가면 큰일 난다.
얘네들도 몇 병을 남기고 다 처분하기로 했다.
2020년에 한 달 반 동안 한국에서 지냈을 때 많이 썼던 Acqua di Parma Blue Mediterranean Mirto de Panarea - 이건 향수를 가지고 가는 것을 깜박해서 기내에서 샀었는데 처음엔 너무 남성적인 향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적응된 이후에는 꽤나 자주 손이 가는 향수다. 그때 당시에는 광교에서 지냈는데 시차 때문에 밤낮이 바뀌면서 일했었다. 오전에 폴바셋이 문을 열면 향수를 뿌리고 가서 일을 끝내고, 갤러리아 백화점에 밥을 먹으러 갔었는데 이 향을 뿌리면 딱 그 동선이 생각난다.
같은 Acqua di Parma 브랜드에서 나온, 소녀시대 티파니가 쓴다는 Rosa Nobile는 향이 너무 궁금해서 샀었다. 밑에 설명하는 자라에서 나오는 Rose보다 살짝 밝은 느낌의 장미향이다.
가끔 샘플로 받은 향수들은 이 사진에 진열된 것보다 실제로 훨씬 더 많다.
작년 10월에 한국에서 썼던 불가리도 보이고, 2020-2021년 뉴욕 LIC에서 썼던 Tocca도 보인다.
2021-2022년 뉴저지에서 썼던 자라 향수들과, D&G Light Blue eau de parfum도.
자라에서 나오는 Rose는 로스쿨 내내 꽤 열심히 썼던 기억이 있다. 동생이 2015년에 뉴욕에서 샬로츠빌이라는, 내 로스쿨이 있던 동네로 놀러 와서 이 향수를 선물했었는데 자라에서 나오는 향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Longevity(지속력)과 Sillage (그 향을 주변에서 얼마나 맡을 수 있는지)를 가지고 있다.
사진에 제대로 나와 있지 않지만 Vera Wang의 Bouquet는 대학교 3-4학년 즈음 자주 뿌리던 향이다. 이제는 단종되어서 구하기도 힘든. 달달한 향은 거의 없고 뿌리면 부케라는 이름답게 정말 꽃과 풀에 파묻힌 느낌이다.
보라색의 동그란 랑방의 Eclat D'Arpege는 향이 너무 궁금해서 샀지만 지속력이 정말 30분도 가지 않아서 쓰기를 포기했던 향수다. 내가 미국에서 고등학교 1학년일 때 이 향수가 한국에서는 정말 인기가 많았는데, 미국에 있던 나는 오히려 쉽게 구하기 어려웠다. 그때는 아마존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온라인으로 구매가 거의 불가능했다. 최근에 Nordstrom Rack에서 이 향수가 보여서 한번 샀지만, 역시 유명하다고 나와 맞는 건 아닌 것 같다 (최근 또 실망해서 리턴했던 향수는 Perfume de Marly에서 나온 Delina).
이렇게 향수를 좋아하는 내가 아직 샌프란을 대표할 향을 찾지 못했다. 샌프란의 공허한 바다의 느낌이 나진 않지만 지난해 여름 캘리포니아 변호사 시험을 준비할 때는 록시땅에서 나온 Eau de I'Parie를 정말 많이 썼다. 굉장히 특유한 향인데 살짝 장미가 섞여있고, 호불호가 갈리는 향이다. "Amber woody"향이라고 써져 있는데 amber향도 있지만, 탑 노트의 peony가 pink pepper과 어울려 정말 특이하다. 나는 페퍼나 spice가 들어간 향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지만, 이 향은 샌프란이 살짝 더워질 때 즈음 정말 쓸만했다.
다 나열하진 못했지만, 이젠 얘네들도 다 보내주어야 하는 것 같다. 나의 추억들과 함께해 주고 보관해 주어서, 고마웠어 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