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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May 31. 2023

다른 여자와 잠을 자는 그를 왜 끊을 수 없는 걸까

오늘의 밑줄 06 -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책에서 느꼈던 감정 때문에 하루종일 그 여운이 계속되는. 이 책을 읽는 며칠 동안 나는 내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고, 위태위태한 세 사람을 묘사해 내는 이 문체에 잠식하며 지속되는 서글픔을 느꼈다. 지독하게 서글픈 책이다. 


한국에서 방영되었던 청춘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완전히 다르다고 얘기하고 싶다. 이 책의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좋아하세요" 뒤에 꼭 물음표가 아닌, 점 3개가 붙여야 자기가 의미하는 제목이 된다고 얘기했고, 실제로 한국 드라마는 브람스가 평생 친구이자 스승의 아내 클라라 슈만을 짝사랑 한 그 줄거리를 어느 정도 따라가고 있다. 이 책은 브람스나 그 줄거리와는 큰 연관이 없다.


그저, 브람스를 좋아한다는 의미는 이렇다.


폴이라는 서른아홉의 여자는, 로제라는 연상의 남자와 6년간 서로를 연인 사이라고 인지하고 있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남자이름 같은 "폴"이 여기서는 여자고 "로제"또한 중후한 남성의 이름이다). 이 여자 주인공 폴은 옷을 잘 입고 우아하고 예쁜, 천박과는 거리가 먼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책에서 묘사된다. 폴의 연인 로제는 도로 공사장에서 일을 하는 중후한,  폴보다 연상인 남자로 묘사된다. 외모가 뛰어나지는 않지만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남자이고, 새로운 여자를 꼬시는데 전혀 힘들어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자유로움"을 항상 갈망하고 포기할 수 없어하는 남자다.


이런 로제라는 남자와 사귀고 있는 폴은 외로움이 찾아오는 날마다 밤을 혼자 보내야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늘은 같이 있어줬으면, 하는 폴의 바램을 로제는 알면서도 외면하고, 심지어 새로운 여자를 찾아 (폴과는 반대되는 살짝 천박한 여자에게 순간적인 강렬한 매력을 느끼며) 폴과의 약속들을 취소하며 다른 여자와 여행을 떠나 잠을 잔다. 폴은 그리고 이것을 어느 정도 아는데도 로제에게 묻지 않는다.


폴이 이런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동안, 시몽이라는 스물다섯의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 폴에게 첫눈에 반한다. 시몽은 폴이 인테리어 디자인을 해주고 있는 클라이언트의 아들이며, 아직 일에 큰 관심이 없는 변호사이다. 시몽은 꽤 진지하게 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연주회에 같이 가자고 쪽지를 보낸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폴은 이 쪽지를 받고 웃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같은 구절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너무 천진난만한 질문이었고, 이런 질문을 받아본지 오랜만이었던 폴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게 된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그녀는 가기로 마음먹는다. 가는 이유는 시몽이 아니라 음악 때문이라고, "혼자 사는 여자에게 좋은 소일거리야"라고 스스로에게 얘기하면서. 


연주회에 도착해 시몽을 만난 그녀는 오케스트라가 tuning을 할 때 시몽에게 고개를 돌려 자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얘기한다. 여기서 시몽이 정말 멋진 말을 한다.


"저는 당신이 오실지 안 오실지 확신할 수 없었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당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제겐 큰 상관이 없어요."


이 책 내내, 시몽은 눈이 시리도록 투명하다.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상대를 향한 자신의 마음에있는 두려움마저도 거침없이 보여준다. 오케스트라가 시작되며 시몽은 자신이 며칠 전에 보았던 로제, 그 옆에 있던 폴이 아닌 다른 여자가 생각나며 폴을 보호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로제가 두렵지 않았다. 그가 두려운 것은 폴이 고통스러워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자기 입을 통해 그 여자에게 나쁜 소식이 전해지는 일 같은 건 결코 없으리라. 평생 처음으로 시몽은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이 처할 곤경 사이에서 자신이 막아서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리고 시몽과의 관계도 시작된다. 처음엔 시몽의 맹목적인 구애였지만, 로제가 폴을 외면하면 할수록 폴은 시몽에게 조금씩 더 마음을 열게 된다.


시몽과 함께 연주회를 갔다 왔다고 얘기하는 폴에게, 로제는 이렇게 얘기한다.


"폴. 난 당신을 완전히 믿어. 이토록 말이야! 당신이 그런 풋내기를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난 참을 수가 없어."


로제는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문득 그는 다른 남자에게 팔을 내미는 폴, 다른 남자와 입맞춤을 하는 폴, 다른 남자에게 애정을 표하고 관심을 쏟는 폴을 떠올렸다. 고통스러웠다.


다른 여자와 주말 내내 잠을 잤다가 돌아온 이후에 뱉는 말이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떻게 자신은 다른 여자에게 팔을 내밀고, 입맞춤을 하고, 애정을 표하고 관심을 쏟으며 그 사이 너무나 외로워진 애인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그 연인에게는 자신만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을 원하는지... 로제가 너무 뻔뻔하고, 이기적인데다, 잔인했다고 느꼈다. 이 남자와 함께한다면 폴에게는 선택지가 외로움밖에 없는 것이다. 


초반에는 로제 때문에 힘들었다면, 전개가 흐르며 시몽을 응원하게 되는 마음이 커지면서 로제뿐만 아니라 폴의 이기적인 면 때문에 힘들었다. 


폴은 몇 달간 시몽을 받아주다, 결국 자신은 로제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 또한 어쩌면, 로제를 사랑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시몽을 떠나게 된다. 로제가 자신을 지극한 외로움에 던져버릴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냥 모든 게 안타까웠다. 시몽은 처음부터 끝까지, 폴을 위해 생각하며 행동했다. 폴이 가장 초라해질 순간이 올 것을 예상하고 그 순간으로부터 지켜주었고, 어쩌면 자신은 평생 폴을 얻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폴과 함께 하고 싶어 옆에 있었다. 시몽도 언젠가 그를 알아주는 여자를 만날 것이다. 하지만 과연 폴을 사랑했듯 그 여자를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에휴... 이래서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결론에 자주 도달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이걸 읽으면서 폴이 '행복'해지는 방법은 시몽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폴은 시몽을 사랑할 수 없었다. 자신이 반응하는 사람, 자신이 "남자"라고 느끼는 사람은 언제나 로제일 수밖에 없었고, 로제가 자신을 고통스럽게, 서글프게, 외롭게 만들지라도 자신의 심장이 반응하는 사람은 로제였다. 로제가 없다면, 폴의 일상에 고통이 없어짐과 동시에 행복이 없어지는 것일수도 있으리라.


참 안타까웠다. 다른 여자와 자러 가는 남자를 끊을 수 없는 이유는 당연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은 폴을 힘들게 만들었지만, 그의 생김새, 그의 말투, 그의 눈빛... 그 모든 것과 함께 있는 것이 마치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 믿을 정도로 사랑을 한다는 건 폴을 아프게 하는 그 행동들까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폴은 그 아픔까지 선택한 것이다. 위에 내가 써놓은 것을 다시 얘기하자면, 이 남자와 함께 한다면 선택지에는 외로움밖에 없다. 


시몽을 보내는 날, 저녁 8시에 폴의 전화벨이 울렸다. 책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고.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결국 로제는 예전처럼 폴을 외로움에 던져 버릴 것을 암시한다. 폴과 로제가 화해를 하기 직전, 로제가 솔직하게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다고, 하지만 불행했다고 고백하지만 절대 "나, 너를 위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될 거야" 혹은 "나 바뀔 거야" 같은 약속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폴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바뀔 의지가 하나도 없는 남자와 함께 있으려면, 어쩔 수 없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과연 나를 아프게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는 인생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나의 기분들을 달래주는 사람은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없는 인생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 


어제 이 책을 같이 읽은 사람들에게도 얘기했었지만, 답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도 정답을 모르겠고 나이가 들며 이 질문은 농도만 짙어지지 정답은 더욱더 찾기 어려워질 것 같다. 그저, 내가 선택한 사랑에는 이런 아픔이 없길 희망하는 수밖에 없다.


***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문체가 너무 독특해서 읽는 내내 이 신선함 때문에 재밌었다. 이 밑에 나열한 것보다 실제로 문체를 기록하기 위해 줄 쳐놓은 부분이 굉장히 많은데, 맛보기로 조금 적어놓겠다:


"그들 두 사람 사이에 하나의 규율처럼 자리 잡은 이 자유를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자유는 로제만 이용하고 있고, 그녀에게는 자유가 고독을 의미할 뿐이 아니던가." (1장)


"그녀는 완전한 안정감과 더불어 자신이 그에게 완전히 익숙해져 있음을 느꼈다. 로제 의외의 누군가를 사귀는 일 같은 건 결코 할 수 없으리라." (1장)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그가 그녀를 혼자 자게 내버려 두는 일이 점점 더 잦아지고 있었다. 아파트는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소지품을 꼼꼼하게 정돈한 다음 침대 위에 앉았다.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늘밤도 혼자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 역시 그녀에게는, 사람이 잔 흔적이 없는 침대 속에서, 오랜 병이라도 앓은 것처럼 무기력한 평온 속에서 보내야 하는 외로운 밤들의 긴 연속처럼 여겨졌다." (1장)


나는 시몽이 폴을 이런 외로움부터 꺼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폴이 선택한 사람은 로제였고, 그 선택은 곧 이런 외로움을 선택하는 것과 같았다.


"로제는 자기 집 앞에 차를 세워 놓고 오랫동안 걸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조금씩 보폭을 넓혔다. 기분이 몹시 좋았다. 폴을 만날 때마다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오늘 밤 그녀 곁을 떠나면서 그녀가 슬퍼한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뭐라고 말해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그 자신에게 막연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무엇이라는 건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없는 것, 그가 이제까지 아무에게도 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당연히 그녀 곁에 머물고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어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여자를 안심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걷고 싶었고, 거리를 가로지르고 싶었고, 이리저리 배회하고 싶었다. 보도 위에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를 듣고 싶었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이 도시를 살펴보고 싶었으며, 그러다가 어쩌면 늦은 밤의 어떤 기회를 포착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1장)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의 이름조차 알고 있지 못했다. 파리에 있는 그 누군가에 대해 그가 아는 바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멋진 일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 누군가에 대해 그는 며칠 동안 마음 가는 대로 상상할 수 있으리라." (3장)


"로제가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므로, 아마도 지금이 그와 그런 이야기를 할 좋은 기회이리라. 하지만 지금 그녀는 기분이 좋았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확신에 차 있었지만, 그는 너무나 지쳐 보였다.......  그녀는 물러서기로 했다." (3장)


"가을이 아주 부드럽게 폴의 가슴에 차올랐다. 젖은 다갈색 나뭇잎들이 서로 뒤엉킨 채 천천히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팔을 잡고 있는 이 말 없는 청년에게 애정 같은 것을 느꼈다. 이 낯선 청년이, 일시적이지만 그녀의 동반자가 되어, 한 해의 마지막에 황량한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4장)


"로제가 그녀의 집을 나서는 순간, 보도 위에서 그 자신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존재라는 강한 자유의 냄새를 맡는 순간, 그녀는 또 다시 그를 잃고 말리라." (4장)


"언제나처럼 그는, 그 자신이 그토록 접촉하고 싶어 하는 너무도 이질적인 이런 아름다운 육체가 불명료하고 편협한 작은 두뇌의 지시를 받으며 삶 한가운데를, 거리 한가운데를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두려움과 측은함과 거리감을 느꼈다. 그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5장)


확실히 로제는 내가 개인적으로 피하고 싶은 남자 1위다. 언제나 새로운 무언가를 맞닥드릴것 같은 희망을 품고 사는 남자, 그리고 자신은 단지 자유로움을 포기할 수 없는 남자라고 정의해 버리는 남자. 


"그녀는 애인 없는 여자로서 보내야 하는 일요일이 몹시 싫었다." (6장)


"그녀는 연주회 동안 시몽이 자기 손을 잡으려 들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자신이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 만큼 두렵기도 했다. 언제나 그런 기대가 사실로 확인되면, 떨쳐 낼 수 없는 권태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녀가 로제를 좋아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로제는 모든 것이 너무나 확실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그녀의 예상에서 조금 어긋나는 행동을 했던 것이다." (6장)


"저는 당신이 오실지 안 오실지 확신할 수 없었답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당신이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든 제겐 큰 상관이 없어요." (6장)


"그는 상상했다. 그녀 위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갖다 대고, 그녀가 두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끌어안는 것을....... 그는 두 눈을 감았다. 폴은 그런 시몽의 표정을 보고 그가 정말로 '음악광'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이 부분에선 조금 웃었다. 작가를 실제로 만나면 꽤나 재밌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어리고 혈기 왕성한 청년이 자신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기쁨과 회의와 온정과 고통으로 뒤범벅된 그 오 년을. 그 누구도 자신을 로제에게서 떼어 낼 수는 없으리라. 그녀는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데 대해 로제에게 감사와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탁자에 몸을 기댔다." (6장)


여기서 조금 궁금했던 부분이... 과연 시몽이 로제와 폴을 이해 못 하는 게 14년이라는 나이차이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까? 사회생활을 한 뒤부터 항상 느꼈던 것은, 나보다 10살 많은 사람들도 내가 말하는 바를 전혀 이해 못 할 때도 있었고, 오히려 나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사람들 중 나와 비슷한 경험들을 가졌던 사람들이 내가 하고자 하는 말 - 그 맥락을 정확히 이해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상형을 얘기할 때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고 자주 말하는데 (나도 쉽게 말하고 싶을 때는 그렇게 말할 때가 많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나의 맥락을 캐치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꼭 나의 말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의 말을 흥미롭게 들어주며, 그 흐름을 따라갈 줄 아는 사람. (생각보다 찾기 힘들다...)


"당신은 로제를 사랑하지만 지금 혼자 있습니다. 당신은 일요일마다 혼자 있겠지요. 당신은 혼자 저녁 식사를 하고, 아마도...... 아마도 종종 혼자 잠들겠지요. 하지만 저라면 당신 곁에서 잠들 겁니다. 밤새도록 당신을 품에 안고, 당신이 자고 있는 동안 당신에게 입 맞출 겁니다. 저라면 그 이상으로도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렇지 않죠. 당신도 알겠지만......." (6장)


외로움을 다룬 여러 가지 문장들이 많았는데, 정말 이 책에서 확실하게 얻어가는 한 부분은, 내가 연인으로서 최소한 해야 할 것 - 혹은 연인으로서 가져야 할 의무 중 하나는, 상대방을 외롭게 하지 않을 것. 상대방이 외로움을 느낀다면 곁에 있어 줄 것. 요즘 트렌드는 연인 사이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고 들었는데 (서로의 시간을 존중해 주는 것) 가장 핵심은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캐치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예를 들어 "혼자있고싶어 vs. 같이있고싶어"의 대립 상황이 왔을 때는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의 요구를 맞춰주는 게 맞는 것 같다. 물론 상대방도 너무 무리하게 항상 같이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의 손가락 아래로 만져지는 그녀의 다리는 단단하고 뜨거웠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어리석고 수다스럽고 가식적이었다. 사랑의 행위를 우스꽝스럽게 만듦으로써 그녀는 기묘하게도 그를 노골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에게 있는 애정이나 우정, 혹은 막연한 관심을 무화시켜 버리는 그런 태도가 그녀를 더욱 자극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대화가 안 통하고 잘난 체하고 저속하고 시시하고 더러운 여자. 난 그런 여자와의 섹스가 좋아.'" (7장)


나는 이런 면에서 로제가 너무나 뻔뻔하고 이기적이라고 느꼈다. 어쩌면 이 책이 너무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로제가 정말 단 하나의 희생도 하려고 하지 않으며 폴에게 모든 희생을 요구했던 것이다. 폴은 결국, 한 발짝도 내어주지 않는 로제를 선택하며 평생을 함께 할 외로움을 자신의 선택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로제는 어떤 희생을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여자는 폴일지 몰라도 잠자리 취향은 폴과 반대의 여자라면, 폴과 함께 하며 그 부분을 희생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걸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면 폴을 놓아주던지... 시몽과 함께 하게 놔두고 돌아가지 말던지. 자신이 그런 여자에게 질릴 때까지 기다리다, 폴과 함께 하는 순간 또 다른 기회를 찾기 위해 폴에게 혼자 저녁을 먹게 하고, 자신은 밤늦게까지 돌아다닐 것을 예시하는 결말이 너무 암울했다.


"난 자유로운 남자야." 그가 살짝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어쨌든 이 여자와 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일은 없으리라! 그녀는 보도 위를 종종걸음으로 달려가서는 현관 너머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난 자유로운 남자야." 라는 자신의 말이 그를 좀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책임에서 자유로운 남자'라는 뜻이었다. 그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가능한 한 빨리 폴을 만나고 싶었다. 그녀만이 그를 안심시킬 수 있었고 그녀는 그렇게 해 줄 것이었다."


"자유롭다"라는 컨셉이 처음으로 부정적이게 느껴졌던 문장. 사실 평생 자유로움을 긍정적인 표현으로 생각했던 나에겐 너무 큰 충격이었다. 책임에서 자유로운 남자... 라니. 너무 말이 되는 표현이라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이 사람은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고도 부족하단 말인가? 이 사람에게는 아무 차이도 없는 걸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그가 기대하는 것처럼 의자에서 일어나 여유 있고 우아한 태도로 식당을 가로지를 수도, 집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자기 잔을 그의 얼굴에 던지고 싶었다. 그가 심심찮게 만나온 시시한 창녀들과 차별되는, 자신을 기품 있고 존중받을 만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었다. 그런 창녀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다. 로제가 그녀에게 그 여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는 그녀에게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랬다. 그는 정직했다. 하지만 이렇게 뒤얽힌 삶 속에서 그런 정직성만으로는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는 게 아닐까 하고 그녀는 자문했다. 필요할 경우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한다 해도 말이다." (7장)


폴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보여주는 부분. 여기서 나는 로제에게 더 화나는 부분이 "take it or leave it"같이 자신을 폴에게 들이내미면서 - "나 이런 사람이야, 나와 함께하려면 이런 나를 다 받아들여야 해"라고 말을 하면서 - 막상 누군가랑 바람피울 때는 떳떳이 하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만약 폴에게 "나 지금 다른 여자랑 여행 잡혀서 너와의 여행은 캔슬할 거야" 이 말을 한다면 폴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런 말을 할까 봐 이 정도의 conflict 조차 감당하는 게 귀찮거나 두려워서 오히려 폴에게 거짓말을 하며 그녀에게 자신의 외도가 폴과 자신의 관계에 끼치는 모든 부분을 맡겨버린다. 혹시나 진짜로 일을 위해서 약속을 캔슬할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어쩌면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의심, 혼자 있는 외로움, 그리고 나중에 그것이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의 아픔, 그 이후 추궁의 스트레스까지. 모두 다 폴에게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는 낙엽 타는 냄새를 무엇보다 좋아했으므로 그 냄새를 더 잘 들이마시려고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았다." (8장)


로제의 외도가 확실해지자, 폴은 시몽에게 이런 편지를 쓰게 된다. "장난꾸러기 시몽. 당신의 편지는 너무 슬프더군요. 나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 사실 난 당신이 없어서 쓸쓸해요. 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이상 잘 모르겠어요. 시몽, 빨리 돌아와요." (8장)


"그녀는 그 고집스러운 매일의 순회에 어떤 상징적인 면이 있다고 느껴졌다." (9장)


"편지에다 그녀는 '빨리 돌아와요.' 라고 쓰지 않았던가. 그는 그 구절로 인해 자신이 지나친 기대를 품었다는 사실보다, 그 구절을 읽고 어리석게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확신에 찼었다는 사실이 더 유감스러웠다." (9장)


문체에 대해 얘기를 하자면, 내가 이 책에 엄청난 몰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이 상황을 설명 한 뒤 그 상황에서 그것을 대면하고 있는 극 중 인물이 어떤 감정을 겪고 있는지 입자도 높게 써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보이듯, 사랑하는 이의 "빨리 돌아와요"라고 쓴 편지를 읽고 확신에 찬 그 즐거움, 그 이후에 마치 그 문장을 쓰기는커녕 본 적도 없듯이 행동하는 그녀의 행동 때문에 얼마나 그 즐거움이 유감스럽게 느껴지는지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가.


"시몽이 와 있었고 그녀는 그가 거기 와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그녀는 정말이지 너무도 외롭지 않았던가! 로제는 영화에 미친 젊은 여자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로제와 그녀 사이에 그 일이 한 번도 언급된 적은 없었지만, 로제는 어느 정도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댔지만, 평소처럼 그녀를 이해시키기엔 너무 잡다했다. 그녀는 이번 주에 두 차례 그와 저녁 식사를 했다. 겨우 두 차례 뿐이었다. 실제로 지금 곁에 있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불행해하는 이 청년이 없다면 그녀는 극도로 불행하리라." (9장)


"시몽은 가볍게 펼쳐진 폴의 손바닥 위에 가만히 놓여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폴의 손은 언제라도 자신의 손을 놓아 줄 태세가 되어 있었고 분명 그것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문득 극도의 피로감이 엄습했다. 그는 그녀를 영원히 떠날 수 있을 만큼 강한 체념의 감정을 느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 순간 그는 서른 살은 더 먹은 것 같았고, 삶에 굴복하고 만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폴은 그런 그가 처음으로 인정할 만한 존재로 여겨졌다." (9장)


"처음으로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전날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 마침내 그녀가 자신을 '제대로 본 것이다.'" (9장)


***


나머지 몇 장은 책을 읽게 만들기 위해서 남겨두려고 한다. 제일 좋아했던 한 장면만 기록하고.


폴이 자신의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를 입고 시몽과 함께 시내로 나간 뒤, 다른 여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뒤 풀이 죽은 상황이다. 스스로 그런 말을 들어서 민망한 동시에, 시몽도 그런 소리를 들었을 것을 생각하며 부끄러웠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폴은 그저 드레스를 벗고, 빨리 침대에 가 자려했다.


"늦었어. 난 졸려. 내일 해."


"아니, 지금 당장 해야 해. 그리고 당신은 내 이야기를 들어야 해." 그가 말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떴다. 그가 그렇게 권위적으로 말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 할망구들이 우리 뒤에서 하는 말, 나도 들었어. 그 말에 당신이 영향을 받는다는 게 난 참을 수 없어. 그건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건 어리석고 나를 상처입히는 일이야."


"하지만, 시몽. 별거 아닌 걸 문제 삼는 것 같은데......."


"나는 그걸 문제 삼고 있는 게 아냐. 오히려 당신이 그것을 문제 삼지 않게 하려는 거야. 당신은 당연히 내게 그런 일을 감추고 싶겠지. 하지만 내게 그런 걸 감출 필요가 없어. 나는 어린애가 아냐, 폴. 내게는 당신을 이해할 능력도, 당신을 도울 능력도 있어. 알다시피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있어서 무척 행복해.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 이상이야. 난 당신도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지금 당신은 행복해지기에는 지나치게 로제에게 집착하고 있어. 당신은 우리의 사랑을 우연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그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해.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그는 힘들여서 침착하고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다. 폴은 경이와 희망에 차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그가 별 생각 없이 지내고 있다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완전히 새로 시작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단 한번 확실하게 단호하게 무언가를 말했는데, 그 단호함도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연인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폴의 "그가 별생각 없이 지내고 있다고" 여겼다는 게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여태 시몽의 행동들을 봐도 이 남자가 얼마나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하는지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시몽은 폴을 선택하는 게 오히려 그에겐 끝없는 아픔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수도 있으니, 폴이 로제에게 영영 가버리는 게 시몽을 놔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신기한 것은,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로제가 폴에게 조금이라도 덜 이기적이었다면, 혹은 그렇게 애처로울 지경의 외로움에 던져놓지 않았다면 폴이 시몽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책을 읽었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폴은 언젠간 바람을 피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혹은 연애는 굴곡이 필요하다고 항상 느끼거나, 연애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할 여자라는 것) 같은 책을 읽어도 이렇게 다 다르게 볼 수 있다니. 진짜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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