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을 잘 본다. 곁눈질로 힐끗힐끗, 반대편의 그 사람도 약간의 눈치가 채 질 정도로.
그리고 조심스레, 입가에 미소를 품고 물어본다. 그 책 재밌어요?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대화를 클럽이나 바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런 곳은 가볼 때마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어둡고, 시끄럽고, 술냄새와 땀냄새가 가득한 곳은 인생에 몇 번 경험한 것으로 충분하다.
대신 나는 아주 가끔, 카페에서 새로운 사람과 대화를 한다. 이게 특별한 인연으로 이어지진 않지만, "이런 사람도 있구나"라는 깨달음과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용기 내는" 근육을 쓴 나에게 칭찬하는 계기가 된다.
샌프란시스코로 이사 온 뒤 5개월 즈음이었다. 한국인들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해 꽤나 외로웠던 상황이었는데, 동네 블루보틀 카페에서 한국 책을 읽고 계신 분을 발견했다. "한국분이세요?"라고 물어봤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그분이 나에게 여기 샌프란 주위에 경치 좋은 곳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날 내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많이 배웠다. 특히, 저녁을 먹으며 내가 카페에서 갑자기 말을 걸어서 당황스럽지 않냐고 물었었는데 그분이 오히려 질문받는 느낌이 너무 좋았었다고 해서 타인에게 말을 거는 것에 대해 자신감을 얻었다.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같은 블루보틀 커피숍에서 내 옆에 앉은 백인 여자가 책을 꺼냈다. 고개가 확 돌아가서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The Wind-Up Bird Chronicle> (태엽 감는 새)이었다. 그때 나는 <After Dark>라는 무라카미의 책을 끝내던 상황이라 물어봤다.
"'Hi, how are you enjoying the book?"
(안녕하세요 - 그 책 재밌어요?)
물론, 이 여자분이 책에서 시선을 뗀 상황에서 물어봤다. 이 여자분은 강력추천이라고 얘기했다.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무라카미가 글을 쓰는 스타일에 대해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
최근에는 동네에서 꽤 멀리 떨어진 커피숍에 가봤다. 이 커피숍은 커피보다 빵으로 유명한 집이었는데, 나에게 가장 놀라웠던 것은 그 집의 빵도, 커피도 아닌 책을 읽는 손님들이었다. 내가 샌프란으로 온 뒤 그렇게 한 곳에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을 본 것은 거의 처음이지 않나 싶었다.
나도 노트북으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내 앞에 책을 든 백인 남자가 앉았다. 사실 체격이 너무 좋아서 (피지컬 100에 나와도 될 느낌이었다) 나의 섣부른 선입견으로 책을 오래 읽다가 가지는 않을 거라고 추측했다.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는데, 이 남자는 옆에 손님들이 몇 번 바뀔 정도로 두 시간 가까이 책을 읽었다. 게다가 책을 읽다가 옆에 종이에 끄적끄적 무언가를 적었는데, 그 필체가 너무 예뻐서 이 사람이 뭐라고 적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한번 말을 걸어볼까, 말까 생각을 좀 하다가 그래, 한번 걸어보자, 라고 결정을 했다. 이 사람도 당황스러울 수 있으니 뜸을 좀 주었다. 이 분이 책에 너무 몰두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다, 책에서 시선이 떼어졌을 때 물었다.
"Excuse me, if you don't mind... can I take a look at what you wrote?"
(혹시, 실례되지 않는다면... 그 종이에 쓴 게 뭔지 읽어봐도 될까요?)
종이에 뭘 적었는지가 제일 궁금했기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도 상냥하게). 남자는 아주 흔쾌히 나에게 "no problem at all"이라며 종이를 보여줬고, 사실 생각보다 내용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열심히 적는 게 신기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학생인가, 추측했던 나의 예상들이 빗나갔다. 발레 전공인가? 생각했던 예상도 빗나갔다 (체격이 좋았고, 그 사람이 들고 있던 책이 <The Black Swan>이었다). 이 사람은 컨설팅을 하고 있었고, qualitative modeling을 곁들인 컨설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은 사실 책을 거의 읽지 않는 사람이며,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내가 "그럼 글보다는 방정식이 더 편할 수도 있겠네요"라고 말하니 맞다고, 사실 자신이 이렇게 토요일에 책을 읽으려고 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이 불편한 것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
예전에 어떤 인디책방을 운영하는 작가분이 쓴 책 중에 이런 얘기가 나왔다. 그 작가분은 자신의 페티시는 책을 읽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여자들이 어디에 많은지, 자신이 자주 가는 카페도 친절히 그 책에 나열해 주셨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사체도 책을 읽는 인간이다.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의 시선이 좋다. 그 사람의 표정도 좋고, 종이가 넘겨질 때 사락-하는 그 소리도 좋다. 가끔 책을 쥐고 있는 손가락을 응시하게 되기도 한다.
변태적인 취향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모두 평범한 척하는 변태들 아닌가.
책을 읽는 사람에게 에로틱한 감정이 든다면, 나는 그게 뭔지 이해해 줄 테니 걱정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