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언제 내 얘기를 들어줬어요!” 라는 아내의 앙칼진 목소리에 갑자기 신경이 곤두선다. 방금 전까지 우리는 외식을 하고 들어왔었는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흥분한 마음에 생각이 혼란스럽다.
아내가 부엌으로 가서 쌓아둔 설거지거리를 "덜거덕, 덜거덕" 거리며 씻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릇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에 내 마음도 아슬아슬해져간다. 방금 전까지 습진으로 푸석해진 손이 아프다던 여자가 고무장갑도 없이 설거지를 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화가 났나 보다.
아내는 우리 집에 시집 온지 10년이 넘었다. 연애결혼을 한 우리는 육아와 맞벌이 속에서 남들보다 뒤처지게 살고 싶지 않았다. 누구나 결혼식장 주례에서 그랬듯이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잘 살아보자고 약속하며 막연하게 지금까지 달려왔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또래 여자들과 달리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억척스러웠다. 경제적으로 모자란 것이 아쉬워 그 흔한 외식도 잘 안하고 쇼핑도 자제했다.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그 무거운 검은 봉투를 양손에 들고 오는 아내를 보며 나또한 결혼을 잘했다고 속으로 자랑스러워하곤 했다.
세상에 싸우지 않는 부부나 문제가 없는 부부가 단 한 쌍도 없다고 들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 말도 도움이 안 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인지 내가 말을 건네기만 하면 아내는 이해를 못해주고 다시 나에게 빠른 질문을 쏟아낸다. 가뜩이나 급한 내 성격에 남자의 자존심이 무너져 가는 것을 느끼며 한계가 고지에 다다랐음을 느낀다.
불같이 뜨거워지는 마음을 지니고 거실을 거닐다 소파에 앉았다. 아내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내 말을 아내가 들어줘야만 내 답답함이 해소될 거 같고 이 사단이 해결될 것만 같다.
먼저 말을 건네자니 좋은 말이 아니 나올 거 같고 기다리자니 내 마음 속 앞길이 천길이다. 텔레비전을 보는 눈은 멍해지고 주변의 소리는 병풍 속 그림처럼 아득해져 간다. "하... 답답하다."
설거지가 끝난 후 이것저것 정리하던 아내가 나하고 눈이 마주쳤다. 이때다 하고 “여기 좀 앉아 봐요!” 하면서 빠른 말을 건넸다. 사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건 ‘나 화난 것 좀 알아줘~. 그리고 나하고 대화 좀 해줘~’였지만 입으로 나온 말은 딴판인가 보다.
아내가 퉁명스러운 모습으로 대답도 없이 마지못해 앉는다. 내 맘을 몰라주는 모습에 다시 아내가 미워지기 시작한다. 뭐라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옵션으로 달아야 효과적일까 고민하는 사이에 아내가 먼저 말을 던진다.
“당신 요즘 집에서 한 게 뭐 있어요? 그리고 요즘 왜 이렇게 늦어요? 당신 우리한테 너무 소흘히 대하는 거 알아요? 다른 집 남편은 일찍 들어와서 아이도 봐주고... 그런다는 데, 당신은 뭘 모르는 것 같아! 주변 사람들한테 좀 물어보란 말이에요”
아이쿠! 이젠 흥분이 아니라 분노가 올라온다. 이건 나를 공격한 거 아닌가? 남편을 무시하디니? 나를? “도대체 내가 언제 그랬다는 거야! 나는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순간 목소리가 쩌렁쩌렁 퍼져나간다.
대화는 진전이 없고 감정만 상해져서 우리는 마지못해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늘 밤은 서로가 천길넘어 만길일 것이라. 서운하고 미울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몰라준다고...
다음날 아침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에 잠을 깼다. 어제 감정의 여운인지 몸 마디마디가 따로 논다. 세탁실을 가봤다. 아내는 이른 아침에 벌써 일어나 세탁기를 돌려놓고 잠시 외출을 한 것 같다. 참 부지런한 사람... 왠지 모르게 어제의 일이 부끄러워진다.
세탁기에 돌린 빨래를 바구니에 담아와 빨래건조대에 널려고 베란다로 갔다. 햇살이 뒷산에 코스모스처럼 퍼져나간다. 손을 뻗자 무심히 잡힌 아내의 속옷이 눈에 띈다. 실밥이 터지고 너덜너덜 해지어 탄력 없는 아내의 살색 속옷이 무심코 손에 잡혔다.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 해져버렸다. 결혼하기 전 설레게 했던 아내의 하얗고 부드러웠던 손이 생각난다. 아내도 여자일텐데... 우리가 어디서부터 어긋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문득 베란다 산책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추운 날에도 손을 잡고 재잘거리며 올라가는 노부부가 보인다. 저 부부는 어떤 이념을 가지고 어떠한 소통 방식으로 살아가기에 저렇게 다정해 보일까.
아이가 커가는 만큼 우리 부부의 소통실력은 늘어나지 않은 것 같다. 내 마음을 전달하고 나를 알아줘야 내가 풀릴 것만 같은데, 우리는 육체만 커 나아갔지 대화는 아직 어린아이 같다.
아니다. 아니다... 내가 서툰 것이겠지. 나는 대화를 잘하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
"삐삐삐삑" 경쾌한 버튼 소리와 아내가 들어온다. 양 손에는 가벼워진 초록색과 주황색 재활용 박스가 보인다. “일어났어요?”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순간 내 마음이 들킨 것 같다. 말없이 다가가 빈 박스를 건네 받으니 아내는 나를 잠시 쳐다보고는 부엌으로 향한다.
“덜거덕 덜거덕”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가 가볍게 들려온다. 어제와 달리 아침을 준비하는 그 소리가 나를 안도시킨다. 다행이다.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은 부부가 누가 있을까? 나 역시 그러한데. 행복의 전제는 대화와 소통이 아닐까. 아내가 들어올 때 “미안했어 여보” 또는 “내가 좀 서운해서 그랬어”라는 말을 건네며 대화를 열어가지 못한 내가 아쉬울 뿐이다.
빨래를 널기 위해 내려놓은 눅눅한 젖은 빨래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 안에는 나의 옷도 아내의 옷도, 아이의 옷도 얽히어 있다. “꼬인 게 답답하면 답답한 사람 탓인 게지”라고 중얼거리며 섞여있는 빨래들을 정리한다.
왠지 모르게 꼬인 빨래를 정성스럽게 개어두면 내 마음도 정리되고 소통도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싱긋 미소가 띄어지며 나도 몰래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미안하네 여보. 내가 모자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