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연애는 헤어지고 나서도 죽을 때까지 혼자 계속하는 연애가 있다.
오백만년 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
나는 로맨스 영화를 볼 때 케이지 매치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2시간의 방영 시간 동안 어떻게든 나를 울리기 위해 신파의 싸대기를 때리는 영화와 절대로 울지 않을 것이라고 눈에 힘을 꽉 주는 내가 대결한다. 그래서 굳이 로맨스 영화는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 그런 기조를 가지고 살고 있는 나에게 고비가 찾아왔다. 친구들이 영화를 오랜만에 보자고 해서 신나서 그러겠다 하는데 뚜껑을 까 보니 로맨스 영화다. 분투를 하기 전 피로감이 그대로 몰려왔다. 친구들아 미안하지만 영화는 나중에 보, 라고 할 때 친구가 영화는 내가 쏜다며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내주는 사람이 따거다. 따거는 중국어로 큰 형님이란 뜻이다. 호방한 형님의 나라에게 조선시대 인조가 절을 하듯 나는 바로 영화를 열심히 보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의 제목은 <만약에 우리>라고 했다. 나의 신조는 가정법은 의미가 없다인데, 영화 제목부터 가정법을 디밀고 들어왔다. 소개팅 첫 만남에 괜히 멀리하고 싶은 상대처럼 스크린을 째려봤다. 그런데 어쩐지 제목이 낯이 익었다. 자세히 보니 중국 원판이 있었다. 그리고 무려 내가 1년 전 그 원본을 봤던게 떠올랐다. 어째서 내가 로맨스 영화를 넷플릭스에서 봤는지 도통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대충 귤 까먹고 본 기억이 있었다. 영화가 슬프더다라, PTSD가 온다더라, 구교환이 그렇게 좋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팝콘을 씹었다.
스포일러 최대한 없이 납작하게 영화를 평하자면 영화의 내용은 이렇게 시작한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남자 주인공과(이하 남주) 여자 주인공(이하 여주)가 있었다. 당연히 남주는 여주에게 첫눈에 홀라당 반한다. 둘은 같은 학교라는 것도 알게 된다. 남주의 짝사랑 끝에 여주와 남주는 사귀게 되고(이 과정도 나름 재미있지만) 그 남주와 여주가 사회의 현실에 부딪혀 서로의 꿈을 포기하게 된다. 그런 지리멸렬한 과정에서 남주는 밑바닥을 보이게 되고 지친 여주는 떠나간다. 그리고 둘은 각자의 자리에서 꿈을 이루고 한참 후 둘이 우연히 해외에서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한국판 <라라랜드>다.
영화는 계속해서 가정법을 이야기한다. 수년 후 우연히 만난 남주는 여주에게 우리가 그 때 이러저러했으면 어쨌을까를 오열하면서 묻는다. 하지만 헤어지고 가정家庭이 있는 상황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이야기다. 무려 딸내미가 아빠 지금 어딨어? 하는 이야기처럼 여주가 처참해지는 상황도 없다. 이미 그렇게 시간은 지났고 헤어지고 나서 재건한 새로운 인생의 무게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 때 우리가 그랬으면 어쨌을까 하는 남주의 얼굴에는 미처 아물지 못하는 상처가 있다. 아직 그 연애가 그에게는 마음속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어떤 연애는 헤어지고 나서도 죽을 때까지 혼자 지속해 가는 그런 연애가 있다. 여주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런 남주를 밀어내는 여주 역시 허물어진다. 둘은 서로를 붙잡고 운다. 그때의 여름은 처참하고 또한 찬란했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온 하늘이 맑았다. 나는 그 하늘 어딘가에 머리를 대고 있을 어느 누군가를 떠올렸다. 영화는 현실과 달라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잘 살고 있으면 충분하다. 현실은 가정법이 아니다. 나는 몇 년 동안 꿈에서 몇 백 번의 가정법을 만났지만 꿈에서 깨면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의 가정법은 사치다. 결혼을 했다는 말에 약해지는 여주는 아직 무르다. 차라리 결혼이라도 해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란 것도 있다. 긴 인생을 두고 각기 다른 길을 가더라도 나는 영원히 널 생각하리란 마음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라서 들키면 안된다. 그건 차라리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예의에 가깝다. 나의 서러운 마음이야 어찌되었든 좋다. 나는 이런 영화를 보더라도 웃고 나와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어른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