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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환 관찰일기 (7)

슬픔을 느끼는 포인트, 서로 다른 역치

100명의 사람이 같은 시간의 동일한 공간에서 극도로 격정적인 드라마 장르 영화를 봤다고 가정하자.

시나리오는 캐릭터가 상황을 느끼고 표현하는 부분, 캐릭터 간 감정의 관계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카메라는 감정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데 의도가 있다.

우는 사람이 있고, 울지 않는 사람이 있다.

우는 사람 중에서는 러닝타임 내내 우는 사람이 있는 반면, 특정 장면에서만 우는 사람이 있다. 굳이 수치화를 하자면, 95%의 관객이 눈물을 흘렸을 경우 5%의 관객은 남다른 감정을 소유했다고 가리킴을 받을 것이다. (2024년 한국사회를 사는 몇몇의 사람들은 이들을 T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그렇게나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도 울지 않는 그 사람이 T발력 극강인일까? 아니면,

그정도 스토리라인에 질질 짜는 그 사람이 감정 조정 불가한 무늬만 어른일까?


감정은 ‘상황에 대한 몸의 반응’이라고 오은영 의학박사가 말씀하셨다. 이를 빌면 상황 인식이 감정을 결정짓는다고 볼 수 있다. 나를 상황에 얼마나 대입하느냐, 내가 상황에 얼마나 맞아떨어지느냐, 그 순간 나는 그 감정에 몰입되는 것이다.


오 박사의 박사 학위 논문은 정신분열병 환자의 세로토닌 운반체 유전자와 감수성 간의 연관성을 주제로 한다. 물론 나는 읽어보지 않았다.


아까 그 극장으로 돌아가보자. 1) 되게되게 슬픈 장면이 있는데 나는 눈물이 나 죽겠는데 내 옆에 앉은 그 사람은 한 치의 떨림도 없다. 극장을 나와 팅팅 부은 눈으로 영화를 얘기할 때 나를 보는 그의 눈빛에 안쓰러움(‘왜 저래’)이 담겨 있다. 혹은,

2) 되게되게 통속적인 신파 그 자체인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같이 본 그 사람은 인생 영화라며 별다섯을 기꺼이 내어준다. 대체 어떤 취향을 가진 것인지 궁금해 죽겠는데 따질 수는 없다. 그 장면, 그 대사, 그 음악에 그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므로 그를 손가락질 할 공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게 천추의 한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소시오패스 같은 그 사람이 그릇된건지 논리도 없는 명제에 설득당하는 그 사람이 어리석은건지 ‘판단’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판단하려고 했던 노력은 결실을 맺을 수 없는 노역이 되어 버린다.

바꾸어 말하면 내 감정의 영역이 가진 논리체계에서 그의 감정을 보듬으려는 행태는 노력이라는 탈을 쓴 술책이다. 그의 경험, 이해, 생각, 신념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100% 동일한 분자로 구성되지 못했으므로 100% 동일한 반응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서로를 안타까워 하면서 살아간다. 내가 알고 상상하는 그 사람은 그의 단편에 근거한 것인데, 그의 슬픔에 공감한다며 위험한 도박을 한다.

많은 이상주의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슨하고 한계 많은 소통”이 평안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다음 두 가지 중 하나가 선행되어야 한다. 내가 그의 슬픔의 역치를 수용할지, 또는 내 슬픔의 역치를 그가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고통스럽지 않을지. or 조건이나, 그 중 하나는 무조건이다.


*느슨하고 한계 많은 소통이라는 구절은 영화 <여행자의 필요>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에서 인용하였다.

**구원 환상에 관한 이미지는 심리 상담 티브이 프로그램 <오은영의 금쪽상담소> 홍석천 씨 편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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