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나의 지금 현재를 향하여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나는 누군가를 그/그녀 속에 있는 대상 a 때문에 ‘그 자신보다도 더 그의 속에’ 있는 것 때문에 사랑한다. 간단히 말해서, 사랑의 대상은 내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을 나에게 줄 수 없다. 그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그것의 심장부에 있는 과잉이기 때문에.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이 근본적 불일치 또는 간극이다. 사랑하는 자(erastes)는 사랑받는 자(eromenos)에게서 그가 결핍하고 있는 것을 추구하지만, 라캉이 말하는 것처럼 “한 사람이 결핍하고 있는 것은 타자 내부에 숨겨진 것이 아니다.” 사랑받는 자에게 남겨진 유일한 것은 따라서 일종의 자리들의 교환으로 나아가는 것, 사랑의 대상에서 사랑의 주체로 변화하는 것, 간단히 말해서 사랑을 되돌려 주는 것이다.”-『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슬라보예 지젝 (주은우 옮김, 한나래)
1. 요아킴 트리에의 오슬로 3부작 <리프라이즈>, <오슬로, 8월 31일>, 그리고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오슬로에서 살고 있는 청년 세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이다. 이 작품들이 3부작으로 불리기는 하나 세 편의 영화가 차례대로 나온 것은 아니다. <오슬로, 8월 31일>과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사이에는 두 편의 영화, <라우더 댄 밤즈>와 <델마>가 자리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작품들 사이 순서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다섯 편의 장편 영화들 중 오슬로 3부작과 나머지 두 편의 영화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질문하고자 한다.
먼저 <라우더 댄 밤즈>. 이 영화는 요아킴 트리에가 노르웨이 바깥에서 찍은 (현재까지) 유일한 영화이다. <라우더 댄 밤즈>는 무엇에 관한 영화인가? (장르적으로만 따지자면)이 영화는 가족 영화이다. 가족의 상실에 관한 영화. 상실을 각자의 방식으로, 그러나 함께 견뎌야 하는 자들의 초상. 하지만 오슬로 3부작에는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가족이 영화의 중심이 되지 않는다. 오슬로 3부작은 가족이라는 공동체 바깥에서 오슬로라는 세계를 견뎌야 하는 세대를 찍은 영화이다. 요아킴 트리에는 마치 가족을 찍기 위해서는 노르웨이 바깥으로 나가야만 하는 것처럼 <라우더 댄 밤즈>를 찍었다. 상실의 주체가 변화하자 영화의 공간 역시 변화한다.
그렇다면 <델마>는 어떠한가? 요아킴 트리에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질적인 동시에 장르적인 영화가 바로 <델마>이다. 그러나 오슬로 3부작과 <델마>의 차이는 단순히 장르라는 외피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델마>는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가? 영화에서 델마는 가족에 의해 억압되어 온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며 비로소 가족에게서 벗어나 온전한 주체로서 거듭난다. 자아를 되찾는 마녀. 역사를 환유하는 가족. 그 가족을 뿌리치는 여성. 가족 바깥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내는 마녀. 하지만 오슬로 3부작은 그러한 서사의 대척점에 서있다. 오슬로 3부작의 주인공들은 델마와 달리 자아를 실현하며 온전한 주체로 거듭나는 존재들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아를 찾지 못해 끊임없이 방황하는 인물들이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들이 진정한 주체로 성장했다는 인상은 들지 않는다. <델마>에서 델마의 가족은 그녀가 싸워야 할 명확한 대상이었다면 오슬로 3부작에는 주인공들이 투쟁하거나 저항해야 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델마>의 서사가 주체로 수렴하는 서사라면 오슬로 3부작은 끊임없이 세계를 향해 자신을 발산하는 영화이다. 오슬로라는 세계. 그 세계를 온몸으로 견뎌야만 하는 신세대. 그 세대는 오슬로라는 공간을 어떻게 감각하는가,라는 문제.
하지만 주의해야 한다. 오슬로 3부작이 특정 세대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일 뿐, 세대론을 다루는 영화들이 아니다. 이 영화들에서 주인공들이 속한 청년 세대는 기성세대, 혹은 기성세대가 구축한 세계와 갈등을 빚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속 갈등은 인물들이 속한 세대 안의 개인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인물들은 비록 같은 세대에 속해있지만 세대라는 이름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각각의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오슬로를 마주하고 견뎌야 한다. 요아킴 트리에는 오슬로 3부작에서 인물들이 저항해야 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했다. 오슬로는 그들이 싸워야 할 세계가 아닌 견뎌야 하는 세계이다. 그 안에서 인물들은 세대의 이름으로 환원되지 않는 각자의 삶을 짊어지고 오슬로와 마주한다. <리프라이즈>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영화의 파편적인 플롯과 편집을 기억할 것이다. 요아킴 트리에는 그 안에서 주인공 필립뿐만이 아닌 그의 주변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교차시키면서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삶을 표면으로 드러낸다. <오슬로, 8월 31일>의 오프닝은 앤더스가 속한 약물중독 재활센터의 환자들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환자들은 재활센터에 들어오기 전 자신들의 삶을 묘사하면서 약물중독이라는 이름 하에 규명되지 않는 개인의 환원 불가능성을 각자의 언어를 통해 드러낸다. 이때 개인의 환원 불가능성은 곧 개인과 개인 사이의 절대적인 타자성을 암시한다. 절대적인 거리. 어떠한 이름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실존적 간극. <오슬로, 8월 31일>에서 앤더스가 마지막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러한 타자와의 절대적 간극을 마주한 후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동시에 세계 안에서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실존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선택이다(현실에서의 자살은 대타자에게 보내는 주체의 메시지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을 기억하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프롤로그. 율리에는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해 의대를 그만두고 심리학을 전공하다가 사진을 공부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에게 어떠한 반대도, 조언도 하지 않는다. 언뜻 보면 개방적이고 딸을 존중해 주는 듯한 어머니의 모습이지만 여기서 핵심은 율리에의 어머니가 딸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에서 자신을 배제하는 것에 있다. 그녀의 선택은 온전히 그녀의 책임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조차 그녀를 책임에서 구원해주지 않는다. 요아킴 트리에는 영화에서 율리에가 저항하거나 연대해야 할 모든 대상을 지워버렸다. 이제 율리에는 자신의 선택 이후의 세계를 고독하게 견뎌야만 한다.
2. 영화의 첫 장면은 파티에서 홀로 떨어져 나와 담배를 피우는 율리에를 바라보며 시작한다. 화면에는 오직 율리에만이 담겨있다. 그녀는 분명 파티에 참석한 복장이지만 파티의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스스로를 배제시켰다. 오슬로 3부작에는 모두 파티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때의 파티는 환락의 공간이 아닌 고독의 공간이다. 환락에서 배제되는 인물들. 담배를 피우는 율리에의 뒤로는 오슬로의 풍경이 담겨 있다. 오슬로라는 세계의 풍경. 그 세계를 고독하게 견뎌야만 하는 자의 모습. 영화를 모두 본 사람이라면 이 첫 장면이 두 번째 챕터인 ‘바람 피우기’의 첫 장면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두 번째 챕터 이전에는 프롤로그와 첫 번째 챕터 ‘다른 사람들’이 위치하고 있다. 요아킴 트리에는 두 번째 챕터가 서사의 진정한 시작이라는 것처럼 구조를 만들었다. 왜 이러한 구조를 필요로 했는가? 그리고 이 구조 안에서 무슨 효과가 생기는가?
두 번째 챕터가 영화의 시작점이 될 때 앞선 프롤로그와 첫 번째 챕터 전체는 율리에의 플래시백으로 환원된다. 첫 장면에서 프레임 바깥을 향하던 율리에의 시선 끝에는 악셀이 자리하고 있다. 외화면에서 내화면으로의 전환. 프레임 바깥이 프레임 안으로 환원되는 순간. 이 순간 율리에의 시선 안에서 오슬로라는 세계는 악셀이라는 인물로 환원된다. 율리에에게 있어 악셀은 그녀가 마주해야만 하는 첫 번째 타자이다. 우리는 프롤로그에서 율리에가 그동안 수많은 연인들을 지나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과 악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프롤로그에서 그녀가 만났던 다른 연인들은 모두 그녀가 공부하던 영역으로 대변되는 인물들이다. 의대를 다닐 때 함께 의대를 다니던 연인을 떠났고, 심리학을 공부할 때는 심리학과 교수와 사귀었으며, 사진을 공부할 때는 모델과 사귀었다. 하지만 악셀은 율리에가 전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만화계에서 일하는 작가이다. 그것도 성차별적인 만화를 그리는 작가. 그런 악셀과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곧 삶에서 사랑이 사건이 되는 순간이다. 이전까지 그녀가 경험해 온 사랑이 그녀의 삶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자연적인 현상에 가까웠다면, 악셀과의 사랑은 그녀 스스로가 삶 바깥에서 타자와 마주한 첫 번째 사건이다. 심지어 악셀은 그녀에게 나이 차이를 이유로 이별을 통보하지만 율리에는 악셀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삶이 확장되는 순간. 타자와의 마주침. 율리에는 그러한 악셀의 타자성을 사랑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율리에가 미처 몰랐던 것. 사랑은 타자성을 주체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지우는 것일 뿐이다. 타자성은 극복 불가능한 절대적인 간극이다. 악셀은 이미 율리에에게 이를 경고했지만 율리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첫 번째 챕터에서 그 간극을 마주하게 된다. 첫 챕터인 ‘다른 사람들’에서 율리에와 악셀은 아이를 갖는 문제로 다툰다. 악셀은 최대한 빨리 가정을 꾸리기를 원하지만 율리에는 아직 자신의 삶에 더 집중을 하고 싶다며 반대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둘은 교집합을 찾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다음 챕터로 넘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오프닝으로 돌아온다. 이 알레고리를 거친 후 영화 바깥을 향하던 율리에의 시선은 영화 안으로 들어오고 오슬로라는 세계는 악셀이라는 인물로 함축된다. 이때 율리에는 위층에서 파티의 주인공이 된 악셀을 바라보고 있다. 이 간극은 단순히 세대나 계급의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율리에는 악셀이라는 미스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타자라는 미스터리. 타자성이라는 불가해함. 내가 사랑하는 당신, 당신은 누구인가요? 요아킴 트리에는 오슬로의 모든 정치사회적 토대, 역사적 배경 등을 배제한 후 오슬로의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만으로 세계와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악셀의 파티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던 율리에는 우연히 들어간 파티에서 에이빈드와 만나게 된다. 이때의 파티는 율리에에게 있어 온전한 환락의 공간이다. 악셀과의 파티가 삶의 연장이었다면 에이빈드와의 파티는 그녀의 삶 바깥에 위치한다. 욕망을 위한 공간. 그 안에서 자신들의 내밀한 욕망을 나누는 율리에와 에이빈드. 그렇게 본다면 다섯 번째 챕터에서 등장한 시간이 멈추는 장면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난 율리에가 부엌의 불을 켜자 율리에 자신을 제외한 화면의 모든 것이 정지한다. 그러자 율리에는 곧장 에이빈드가 일하는 카페로 달려간다. 두 사람은 멈춰버린 화면 안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거리낌 없이 나눈다. 표현을 좀 더 정확히 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 멈춘 것은 화면이 아니다. 혹은 시간이 멈춘 것도 아니다. 이 장면에서 멈춘 것은 세계 그 자체이다. 상징계의 멈춤. 그러면서 세계는 율리에를 위한 욕망의 장(場)이 된다. 상상계로의 도피. 이때 세계를 멈춰 세운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율리에가 아니다. 영화 바깥에서 율리에를 지켜보고 있던 요아킴 트리에다. 중단된 디제시스. 영화만이 해낼 수 있는 마법. 요아킴 트리에는 마치 세계가 멈추었을 때 율리에를 관찰하기 위해 디제시스를 잠시 멈춘 것만 같다. 이때 이 장면은 단순히 파티 장면의 반복이 아니다.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파티가 끝난 뒤 분명하게 말했다. “우리 바람 안 피웠어요.” 그러나 멈춰버린 오슬로 안에서 율리에는 에이빈드에게 연인으로서 찾아간다. 반복이 내포한 차이. 율리에는 욕망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모든 것이 멈춘 오슬로의 시민들 안에서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는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마치 상징계의 모든 시선을 조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욕망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현재로 돌아온 율리에는 악셀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율리에는 각자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자면 율리에에게 있어 악셀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에이빈드가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단지 율리에와 에이빈드가 같은 세대이며 서로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가치관의 교집합이 아니다. 에이빈드는 율리에와 마찬가지로 연인 수니바가 있으나 그녀에게서 권태를 느끼는 중이다. 다시 말해 율리에와 에이빈드 모두 도덕 바깥을 욕망하는 인물들이다. 그렇기에 두 인물에게 있어 서로의 존재는 자신의 욕망을 도덕에 구애받지 않고 펼칠 수 있는 영역이 된다. 두 번째 사건. 두 번째 타자. 도덕 바깥에서 만난 타자. 율리에가 악셀에게 되돌아간 두 번째 순간. 이별을 번복하기 위해 되돌아갔던 남자에게 이별을 선언하기 위해 되돌아가는 율리에. 악셀은 처음에는 율리에에게 타자로서 다가왔지만 이제는 타자이기에 이별한다. 전자의 타자는 삶 바깥에서 그녀의 거울에 비친 타자의 이미지이지만 후자의 타자는 그녀의 삶으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성 그 자체이다. 둘 사이의 차이를 잘 음미해야 한다. 율리에는 처음 악셀을 만났을 때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차원에 매료되어 악셀과 사귀었다. 그러나 두 인물이 상징계 내에서 연인으로서 자리 잡았을 때 악셀의 타자성은 극복과 대결의 대상이 된다. 소타자에서 대타자로. 거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타자의 이미지. 잉여의 이미지. 율리에는 존재자 사이에 필연적으로 자리한 간극을 뛰어넘고자 했으나 그것은 불가능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율리에는 다시 거울로 도망친다. 자신이 원하는 타자의 이미지, 에이빈드의 이미지가 있는 거울. 율리에는 그렇게 타자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얻으면서 변화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악셀과 어떤 결말을 맺었는지 지켜보았다. 이제 에이빈드와도 같은 과정을 겪을 차례이다.
3. 여덟 번째 챕터 ‘율리에의 자아도취적 곡예’와 아홉 번째 챕터 ‘크리스마스를 망친 밥캣’은 영화 전체에서 잉여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챕터는 서사적으로만 보면 서사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챕터는 율리에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챕터이다. 정확하게, 두 챕터는 영화에서는 잉여일 수도 있지만 율리에에게는 핵심적인 챕터이다(어쩌면 이건 영화의 모든 챕터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먼저 여덟 번째 챕터. 이 챕터에서 율리에는 에이빈드의 마약을 먹고 환각에 빠진다. 우리는 이미 이전에 율리에가 멈춰버린 오슬로를 뛰어다니며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발현한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한 욕망과 환상이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율리에가 가진 두려움의 기호들이 나타난다. 늙어버린 그녀의 육체. 그 육체를 매만지는 손길들. 그리고 그녀 앞에 나타난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자신의 탯줄을 던지는 율리에. 그것을 지켜보는 악셀과 밥캣.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환상의 내용보다는 환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녀는 왜 마약을 했는가? 단순한 대답.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걸 환상을 통해 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쾌락 원칙이 작동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가진 트라우마와 타나토스가 환상으로 침입한다. 어째서? 이번에는 요아킴 트리에가 세계를 멈추지 않았다. 세계가 지속되는 중에도 율리에는 자신의 욕망을 환상을 경유하여 보고자 했다. 마치 감독의 자리를 욕망하는 듯한 등장인물. 그러나 세계가 지속되는 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두려움과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상상계를 억압하는 상징계. 세계 안에서 그녀가 겪을(지도 모르는) 고통. 그 고통에 대한 두려움. 그녀의 욕망은 세계 앞에서 실패한다.
그리고 다음 챕터.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던 율리에는 악셀이 텔레비전에서 페미니스트와 토론하는 것을 보게 된다. 페미니스트는 악셀이 그린 만화들이 성차별적인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며 비난하고 악셀은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한다. 나는 여기서 논쟁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핵심은 이 모습을 율리에가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가? 악셀은 지금 율리에가 원하는 것을 자신이 몸소 보여주고 있다. 무엇을?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 상징계 내에 자리 잡은 상징적 주체. 우리는 프롤로그에서 그녀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의대를 가고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상징적 주체의 자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다시 상상적 자아로 도피했다. 어째서? 상징적 주체의 자리에는 율리에가 원하는 것이 없다. 그러면서 율리에의 욕망은 끊임없이 방황했다. 그럴수록 율리에는 오슬로의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 앞에 악셀이 연인이 아닌 만화가로, 그것도 논쟁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되어 텔레비전 안에 나타났다. 상징적 주체의 공간. 비록 논쟁이 있을지라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 우리는 이전에 세 번째 챕터에서 율리에가 쓴 글이 인터넷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징적 주체가 되었던 순간. 그러나 정작 그 챕터가 끝난 뒤에 율리에는 그 글에 대해서 언급하지도 않고 작가의 길을 걷지도 않는다. 그런 율리에가 텔레비전의 악셀을 보았을 때 그녀가 진정으로 보는 것은 오슬로의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의 초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율리에의 시선을 본 적이 있다. 영화의 오프닝, 악셀을 올려다보는 율리에. 상징적 주체로서 자리 잡은 악셀을 바라보는 율리에. 이때의 율리에와 지금의 율리에의 차이는 무엇인가? 악셀과 연인일 때 율리에의 시선은 율리에 자신의 삶의 일부를 향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악셀과 헤어진 후 텔레비전 안의 그를 바라볼 때 율리에는 자신의 삶 바깥에 있는 타자로서의 악셀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삶의 일부였던 악셀이 삶의 바깥으로 나간 이후에야, 즉 타자로 되돌아간 이후에야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는 율리에. 바로 이 순간 율리에는 자신의 욕망을 추동하는 것이 주체 자신이 아닌 타자라는 사실과 마주한다. 라캉의 유명한 지적. 주체의 욕망은 곧 대타자의 욕망이다. 율리에는 지금까지 그 명제를 몸소 실현해 왔다. 그렇기에 상징적 주체의 자리에서도 끊임없이 타자의 자리를 욕망하며 상상적 자아의 자리로 도피했다. 그러니 율리에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마주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후 율리에는 에이빈드가 자신이 쓴 소설을 훔쳐보자 화를 내며 말한다. “넌 50살까지 커피나 나르고 싶겠지만 난 더 많은 걸 원해!” 이 악담이 근본적으로 율리에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 것이다. 핵심은 에이빈드가 율리에에게서 악셀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챕터에서 율리에가 쓴 글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던 악셀을 잊으면 안 된다. 율리에에게 있어 그녀가 쓴 글은 곧 아직 지우지 못한 악셀의 흔적이다. 그것을 에이빈드가 보고 있다. 우리는 악셀과 에이빈드를 포함한 율리에의 연인들이 한 번도 같은 프레임에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율리에에게 자신의 연인들은 서로에게 있어 완전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야 한다. 어째서? 율리에가 그들에게서 얻고자 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율리에는 자신이 쓴 글을 악셀에게 보여주며 평가해 주기를 부탁했지만 에이빈드가 자신의 글을 보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녀의 글을 평가하는 것은 에이빈드가 아닌 악셀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율리에가 그들에 대해서 가지는 거울 속 이미지이다. 그런데 전혀 다른 곳에 있어야 할 에이빈드가 거울을 빠져나와 악셀의 흔적을 발견하고 악셀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역할의 부조화. 이건 율리에에게 있어서는 삶의 문제이다. 율리에는 자신의 연인이 바뀔 때마다 삶에서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꿈꿨다. 하지만 그것은 도약이 아닌 방황의 과정이었다. 율리에가 악셀과 이별한 뒤에도 악셀이 계속해서 그녀 앞에 나타날 때 그것은 도약이 실패했다는 (혹은 그 자체로 허상이라는) 사실과 마주하는 것이다. 그러니 에이빈드를 향한 율리에의 악담은 에이빈드가 충족시키지 못하는 욕망의 발현이자 어디에도 주체로서 정착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힐난이다. 이 힐난은 곧 그녀의 거울을 깨트리고 에이빈드의 거울도 깨트린다. 깨져버린 거울. 이제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서로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보지 못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율리에는 진정한 타자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4. 열 한번째 챕터에서 율리에는 암 투병 중인 악셀을 만나러 간다. 또 다른 첫 번째 순간. 자신이 떠나온 과거와 대면하는 순간. 더 이상 그녀는 자신의 연인들을 통해 삶의 도약을 꿈꾸지 않는다. 온전한 대타자와의 만남. 다른 챕터들에 비해 유난히 긴 러닝타임은 그러한 타자에게 다가서기 위해 율리에에게 필요한 시간일 것이다. 이때 그녀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 악셀과 만난다. 율리에는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에이빈드가 아닌 헤어진 악셀을 찾아갔다. 그녀는 자신이 낳을 아버지의 자리에 에이빈드가 아닌 악셀이 오기를 원한다. 이 만남에서 둘은 서로가 가진 두려움을 고백한다. 악셀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율리에는 다가올 삶에 대한 공포를 이야기한다. 두 가지 공포. 둘 사이에는 어떠한 교집합도 없다. 율리에는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젊고 악셀은 삶을 이야기하기에는 죽음이 너무 가까이 있다. 그럼에도 두 인물은 서로에게 다가서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챕터에서 율리에는 악셀이 과거에 살던 집을 찾아가 투병 중인 악셀의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찍은 후 악셀은 율리에에게 말한다. “너한테 추억으로 남는 게 싫어. 목소리로 남는 것도 싫어. 내 작품들로 기억되는 것도 싫어. 내 집에서 살고 싶어. 내 집에서 너와 함께 살고 싶어. 함께 행복하고 싶어.” 이 소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악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이 고백의 요점은 무엇인가? 악셀은 현재를 상실했다. 반대로 그 앞에 있는 율리에가 향유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이다. 악셀은 자신의 불가능을 고백하면서 율리에가 가능한 것을 알려주고자 한다. 악셀의 고백은 곧 지금 현재를 긍정하고 살아가라는 마지막 메시지이다. 끊임없이 타자를 욕망했던 율리에에게 자신의 욕망에 충직할 것을 조언하는 악셀.
그 메시지를 남긴 후 악셀이 세상을 떠난다. 율리에는 그 소식을 듣고도 악셀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한다. 첫 번째 상실의 순간. 악셀의 상실은 곧 복원하고자 했던 과거의 상실이고 복원 이후 다시 재창조하고자 한 미래의 상실이다. <라우더 댄 밤즈>에서 진과 조나, 콘래드는 이사벨의 상실을 함께 견딜 수 있는 서로의 존재가 있었지만 율리에는 악셀의 상실을 오롯이 홀로 견뎌야 한다.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현재가 남아있다. 율리에가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악셀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하던 율리에는 다음날 아침 강 저편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본다. 오슬로의 일출. 그동안 타자를 통해 오슬로를 살아가던 율리에는 본인의 눈으로 오슬로의 지금 현재를 마주한다. 더 이상 오슬로는 한 명의 타자로 환원되는 곳이 아닌 수많은 타자들이 함께 공존하는 시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그렇기에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은 옅은 미소를 띤다. 집으로 돌아온 율리에는 갑자기 유산을 한다. 마치 그녀의 몸이 어머니가 되기를 거부하듯이. 혹은 어머니가 될 기회를 한 번 유예하듯이. 유산을 알게 된 그녀의 표정은 슬프면서도 기쁜 표정이 공존한다. 이제 그녀는 온전한 주체로서 오슬로를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에필로그. 율리에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스틸컷을 찍는 일을 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자신이 사진을 찍은 여배우가 자신과 헤어진 에이빈드와 만나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에이빈드가 율리에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의 자리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율리에가 보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에이빈드가 아닌 온전한 대타자로서의 에이빈드를 본 것이다. 그 모습을 긍정하는 율리에. 무엇이 그를 변하게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지금 눈앞에 있는 에이빈드를 긍정하는 것이 전부이고 핵심이다. 현재에 대한 공존은 곧 변화에 대한 긍정이다. 타자들의 공존을 받아들이는 과정. 집으로 돌아온 율리에는 자신이 원했던 대로 사진작가의 일을 한다. 어쩌면 그녀는 또다시 변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요아킴 트리에는 율리에의 지금 현재를 온전히 긍정하면서 영화를 끝낸다. 그것이 곧 알 수 없는 미래를 긍정하는 것이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긍정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믿는다. 나 역시 그렇게 믿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