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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Apr 18. 2024

사랑은 낙엽을 타고 리뷰

노동자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할 때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첫인상.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처음 보았을 때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하나는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전형적으로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한 안정감. 그는 여기서 새로운 것을 보여줄 생각이 없다. 그저 과거에 자신이 하던 것을 그의 스타일 안에서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상투적이거나 관성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형식적 반복은 과거의 답습이라기보다는 현재에 잔존해 있는 과거의 흔적을 그대로 스크린 위로 옮겨놓기 위한 전략처럼 보였다.


영화에 대한 또 다른 감정은 여기서 기인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분명 2020년대 영화임에도 마치 훨씬 더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처럼 느껴졌다. 다시 말해 그의 전작들과 어떠한 시간적 간극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어디서 느낄 수 있는가? 이 당황스러운 감정은 영화의 내용이나 형식이 아닌 화면 자체의 미장센에서 온 것이다. 영화는 분명 202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 어떠한 미장센도 놓여 있지 않다. 유일하게 영화가 2020년대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에 관한 라디오 뉴스가 전부이다. 인물들은 스마트폰이 아닌 구식 휴대전화를 쓰고 있고(물론 나는 핀란드와 헬싱키의 스마트폰 배급률을 알지 못하지만 그건 요점이 아니다) 인물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주거 환경은 그의 과거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현재를 찍을 줄 모르는 감독인 것도 아니다. 그의 전작들인 <르 아브르>와 <희망의 건너편>은 난민 문제라는 유럽의 현재를 찍은 영화였다. 그랬던 그가 은퇴를 번복하면서 다시 과거의 스타일과 주제의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 선택은 아직 해결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은 과거를 다시 현재로 가져오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현재 안의 유령. 마치 시간이 과거에 멈춰 있는 것만 같은 화면.


이것을 단순히 노동자들의 열악하고 소외된 삶을 비추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때 멈춘 것은 헬싱키의 시간도, 영화 자체의 시간도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노동자의 시간. 무엇이 그들의 시간을 멈춰 세우는가? 자본주의의 굴레. 착취와 억압의 굴레.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시선 안에서 노동자의 삶은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시스템은 여전히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그 안에서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방황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인물들의 시간은 현재와 함께 흘러간다기보다는 현재에 간신히 매달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라디오에서 가끔 흘러나오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은 그들을 현재의 시간 안에 간신히 잡아놓기 위한 수단이다. 이때 이상한 점은 무엇인가? 라디오에서 전쟁 관련 뉴스가 흘러나올 때마다 안사는 뉴스를 끝까지 듣지 않고 라디오를 꺼버린다. 마치 자신이 현재의 시간으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만 같은 모습.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물들은 현재의 시간이 아닌 노동자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시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 시간 안에서 머물고 싶어 하는 것만 같다. 왜 그래야 하는가? 현재의 시간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구축한 세계 안에는 노동자를 위한 자리가 없다. 그렇기에 노동자의 시간이 세계의 현재 안으로 환원되는 것은 세계 안으로 환대받는 것이 아닌 그들의 존재가 자본의 이름 하에서 지워진다는 의미이다.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인물들은 자신들의 시간 안에서 자신들의 존재 증명을 이어나간다. 조금 더 단순하게, 혹은 직설적으로 말하겠다. 그들은 전쟁에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이들이 부도덕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 동안에도 프롤레타리아의 고통은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들의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노동자들은 세계의 현재가 아닌 과거로부터 흐리지 않고 멈춰 있는 자신들의 시간을 어떻게든 보여주고자 한다. 현재의 표면 위에 간신히 붙어있는 존재. 그 존재가 살아가는 시간의 풍경.


하지만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그 고립된 세계를 감상적으로 미화하거나 찬양하지 않는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자신의 초기작인 프롤레타리아 3부작(<천국의 그림자>, <아리엘>, <성냥공장 소녀>)의 연장선에서 찍은 작품이라고 밝혔다. 프롤레타리아 3부작은 어떤 영화들인가?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건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가 아니다. 말 그대로 자신이 속한 세계로부터의 탈출. 그 끝에서 인물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몸을 맡기기도 하고(<천국의 그림자>, <아리엘>) 혹은 자신의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과 마주한 뒤 그 세계 자체를 파괴하고 더 거대한 세계 안으로 환원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성냥공장 소녀>). 다시 말해, 인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세계로부터 탈출한다. 하지만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는 그러한 인물들의 도주나 탈출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 장면에서 안사와 홀라파가 걸어가는 장면은 인물들이 살고 있던 노동자의 시간과 핀란드의 현재가 만나 합쳐진다는 인상까지 든다. 자신의 세계를 짊어지고 현재의 세계와 마주하는 것. 현재의 표면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존재가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갈 때 현재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이들은 핀란드라는 세계의 일부가 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프롤레타리아 3부작에서 가보지 못한 길을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가고자 한다. 이제부터 그 과정을 차례로 따라가 보자.


2. 안사와 홀라파는 어떻게 만나는가? 두 인물은 일을 끝마치고 방문한 술집에서 서로를 처음 마주한다. 공간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다. 술집이라는 공간은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장소이다. 프롤레타리아의 공간. 이 장면에서 이상한 점은 무엇인가? 안사와 홀라파는 이 만남의 중심에 있지 않다. 홀라파는 술집에 올 생각이 없었으나 그의 동료인 후오타리에 의해 끌려온 인물이다. 게다가 이 만남에서 처음 대화를 나누는 인물은 안사와 홀라파가 아닌 그들의 옆에 있는 후오타리와 리사이다. 후오타리가 무대에서 노래를 마치고 내려오자 그의 옆자리에 있는 리사가 그에게 말을 건다. 그러자 후오타리가 안사와 리사가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카메라는 왼쪽으로 패닝 하며 세 인물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낸다. 이 장면에서 화면의 중심에 있는 것은 후오타리와 리사이다. 하지만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화면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있는 안사와 아예 프레임 바깥에 있던 홀라파를 몽타주를 통해 연결한다. 이제부터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 서사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예고한다.


이 장면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영화가 이러한 구조로 진행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장면에서 서사를 창조하는 것은 안사와 홀라파가 아닌 그들의 곁에 있는 리사와 후오타리이다. 후오타리는 술집에 가기 싫어하는 홀라파를 직접 데리고 갔고 리사는 후오타리에게 먼저 말을 건다. 그 안에서 안사와 홀라파의 의지는 부재한다. 그들은 서사의 주변부에서 그저 서사의 흐름에 몸을 맡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주변부에 있는 두 인물을 연결하여 새로운 서사를 창조한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중심에 있지 못한, 주변에 머무르는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나는 지금 계급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의지를 통해 서사를 창조하고 영화의 중심이 된다. 그 안에서 인물들이 창조한 서사는 때로는 실패하고(<보헤미안의 삶>, <황혼의 빛>) 때로는 불확실하며(<천국의 그림자>, <아리엘>) 때로는 불완전하고(<성냥공장 소녀>) 때로는 성공한다(<어둠은 걷히고>). 그것이 어떤 결말을 가져다주든 인물들은 자신만의 서사를 통해 세계에 저항하기도 하고 세계 바깥의 이상을 향해 나아가며 영화의 중심에 분명하게 자리 잡는다. 그들은 세계의 중심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영화의 중심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를 채플린적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안사와 홀라파는 그런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인물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주체적으로 서사를 창조한다는 인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영화가 직접 이들을 서사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것만 같다. 주변부의 인물. 주변부의 세계. 그들은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주변부에 위치한 프롤레타리아의 세계 안에서도 주변부에 있는 인물들이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그러한 안사와 홀라파를 세계의 중심 안으로 환원시키기 위해 영화의 중심에 가져다 놓는 것처럼 보인다.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속한 그들은 이전에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창조한 서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영화 안에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이전 작품들의 흔적을 여러 차례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몇 가지 예시. 버스 정류장에서 술에 취한 홀라파가 잠들어 있자 한 불량배 무리들이 그의 몸을 뒤진다. 누구나 순간적으로 <아리엘>과 <과거가 없는 남자>를 떠올렸을 장면. 하지만 이전 두 작품과 달리 불량배들은 홀라파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간다. 불량배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안사가 나타나 그를 깨워보지만 아무 반응이 없자 그냥 자리를 떠난다. 그다음 장면. 마트에서 해고된 뒤 일하던 술집의 사장이 마약 거래 혐의로 체포되며 안사는 일자리를 잃고 만다. 명백하게 <어둠은 걷히고>의 반복. 차이는 무엇인가? <어둠은 걷히고>에서는 일로나가 가게 사장에게서 임금을 받지 못하자 그녀의 남편 로리가 사장을 찾아가 임금을 줄 것을 요구하나 거절당한 후 곧바로 린치를 당한다.


하지만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는 그런 서사가 작동하지 못한 채 장면이 끝나버린다. 가게 사장이 체포된 후 안사와 사장의 서사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실패한 서사. 왜 실패하는가? 안사는 거기서 새롭게 서사를 창조할 생각이 없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에서 인물들이 창조해 낸 서사는 곧 자신들이 속한 세계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의지의 결과이다. 그런 의지가 부재하기에 안사와 홀라파는 서사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인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의 흐름 속에서 그저 흘러간다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세계의 흐름. 프롤레타리아의 세계 안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이 전부이다. 그렇기에 한 곳에서 일자리를 잃으면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노동을 이어간다. 인물들은 그러면서 그 세계 안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이 전부이다. 서사를 거부하는 인물들.  마치 새로운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냉소하는 듯한 절망.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이들을 바라본다. 인물들이 서사를 포기하자 영화가 서사를 창조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그것이 곧 영화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여기는 것만 같다. 세계로부터 고립된 인물을 세계 안으로 환대하기.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세계가 인물을 거부했다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는 인물이 세계를 거부한다. 그런 인물들을 세계 안으로 들어가도록 이끄는 것. 현재의 표면에서 현재를 거부하는 인물들에게 현재를 선물하는 것. 그것이 인물들에게 비극이 아닌 축복의 몸짓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렇다면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어떤 서사를, 어떻게 창조하는가?



3. 영화를 보고 나면 안사와 홀라파가 홀로 있는 장면이 많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인물들이 홀로 있을 때는 집에 있을 때나 대중교통을 탈 때 정도가 전부이다. 바꿔 말하자면 두 인물은 쇼트 안에서 다른 인물들과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이다. 물론 안사와 홀라파가 모든 영화 속 인물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안사와 홀라파가 노동 이외에 어떤 운동을 만들어내는 순간은 언제나 다른 인물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영화의 첫 장면. 마트에서 일하고 있는 안사를 경비원이 감시하고 있다. 이 시선은 이후 안사가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을 동료 직원에게 나누어 줄 때도 나타난다. 이윽고 경비원이 담당 직원에게 이를 고발하고 안사는 해고된다. 그때 안사의 곁에 있던 동료들이 안사를 옹호하고 함께 일을 그만둔다. 연대의 순간. 무엇을 향한 연대인가? 안사는 이 상황에서 두 가지 관계 안에 종속된다. 안사와 경비원. 그리고 안사와 그녀의 동료들. 이때 안사와 경비원의 관계는 인간의 이름으로 맺은 관계가 아닌 자본주의 시스템과의 관계이다. 자본주의를 체화한 인물. 그렇기에 경비원은 시스템 바깥에서 안사가 벌인 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동료 직원들은 인간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관계이다. 그녀들은 안사가 자본주의의 얼굴 앞에서 홀로 싸우도록 두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얼굴과 인간의 얼굴. 물론 언제나 물러나는 것은 인간이다. 그럼에도 안사가 홀로 물러나지 않을 때 그것은 자본주의의 황폐한 민낯을 드러내는 인간의 저항이자 인간을 향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믿음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


이때 의아한 점은 무엇인가? 그렇게 연대의 순간이 나타났음에도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거기서 더 이상 서사를 밀고 나아가지 않았다. 함께 마트를 그만둔 안사와 리사는 마트에서 나온 뒤 각자의 길을 가며 헤어진다. 물론 이 장면이 연대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장면 이후에도 안사와 리사가 함께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관심 있는 것은 안사와 리사 사이의 서사가 아니다. 어째서? 두 인물은 이미 영화 안에서 같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인물들이다. 지금 나는 단순히 프롤레타리아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두 인물은 이미 서로에게 있어 서로의 삶의 일부이자 환경 그 자체이다. 그러니 두 인물 사이에는 특별한 서사가 진행될 필요가 없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두 인물이 언제나 함께할 것을 알고 있다. 대신 그는 인물들이 전혀 다른 세계에서 찾아온 타자와 마주하며 연대하기를 원한다. 타자와의 연대. 어찌 보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대부분의 영화는 그러한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홀라파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그는 언제나 품에 술을 지니고 다닌다. 근무 중에도 몰래 술을 마시고 근무가 끝나면 술집에서 술을 계속 마신다. 술의 세계. 이때 영화에서 술은 죽음의 이미지로서 작용한다. 안사는 홀라파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가 술 때문에 죽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술의 세계는 곧 죽음의 세계가 된다. 이 알레고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홀라파는 후오타리가 술을 마시는 이유에 대해서 묻자 우울하기에 과음하고 과음하기에 우울하다고 말한다. 단순한 순환논법. 이때 이 논리의 핵심은 오류가 아닌 순환 자체에 있다. 과음과 우울의 순환이 이어질수록 홀라파는 삶에서 멀어진다. 바꿔 말하자면 그는 술을 통해 삶을 망각하고자 하는 것이다. 삶의 망각은 곧 죽음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영화의 초반부, 공장에서 일하는 도중에 담배를 피우는 홀라파에게 후오타리가 말한다. “그러다 가스 터지면 죽어.” 그러자 홀라파가 대답한다. “그전에 폐암으로 죽을걸요.” 그에게는 죽음을 회피하려는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죽음을 향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째서? 그에게 있어 죽음은 삶을 망각하고 동시에 삶으로부터 잠시나마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이다. 이전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인물들이 자신이 속한 세계로부터 도피하거나 저항하는 선택을 통해 삶에서 차이를 생산하고 서사를 창조했다면 홀라파에게는 그러한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현재 자신의 삶을 망각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세계는 삶을 망각하기를 반복하는 그가 머물 수 있는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안사가 마트에서 해고되는 장면과 달리 홀라파가 공장에서 해고되는 두 번의 순간 모두 그의 곁에서 그와 연대해 주는 인물이 부재한다. 세계는 죽음을 향유하는 그를 거부한다. 그의 곁에 언제나 머물러 있는 인물인 후오타리조차 그 순간들에는 무기력하다. 안사가 화면 속 다른 인물들과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이 연대의 순간으로 나타난다면 홀라파는 추방되는 순간의 연속이다.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맥락이 다를 수는 있으나) 망각에 대한 니체의 그 유명한 문구가 적용되지 않는다.


안사와 홀라파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여기서 기인한다. 홀라파와 달리 안사는 홀라파와 식사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술을 한 번도 마시지 않는다. 그녀는 홀라파와 달리 삶을 연장하기 위해 움직인다. 물론 그녀 역시 홀라파처럼 자신의 세계로부터 도피하거나 저항하며 서사를 창조할 의지는 부재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홀라파와 달리 그녀는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삶을 연장하고자 끊임없이 몸부림친다. 그녀의 계속되는 노동은 그녀가 삶을 지속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 두 개의 삶. 두 개의 세계. 노동의 세계와 술의 세계. 생(生)의 세계와 사(死)의 세계. 이 차이는 음악에서도 드러난다. 홀라파는 술집을 방문할 때마다 음악을 듣게 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에서 음악은 프롤레타리아 세계에서의 삶에 대한 표상이자 비가로서 나타났다. 그의 영화에서 음악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지도, 저항의 의식을 일깨워 주지도 않는다. 오로지 인물들이 처한 삶의 고통과 애환을 노래하는 것이 전부이다. 이때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음악의 역할은 술의 역할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 그런가?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에서 음악은 인물들의 삶에 대한 표상이지만 동시에 인물들이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들이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음악은 이들의 삶을 노래하고 있지만 음악 자체는 그들의 삶 바깥에서 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물들은 음악을 통해 삶 바깥에서 삶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들은 음악을 통해 잠시나마 삶 바깥을 향유하고자 한다. 이건 홀라파에게 있어 술이 하는 역할과 같다. 삶에 대한 망각. 이와 반대로 안사는 음악을 듣지 못한다. 그녀는 라디오를 켤 때마다 언제나 전쟁에 관한 뉴스만을 듣는다. 홀라파와의 식사 장면에서 음악을 틀기 위해 라디오를 켜는 순간에서 조차 라디오에서는 또다시 전쟁에 대한 뉴스만이 흘러나올 뿐이다. 그녀는 삶 바깥을 향유할 줄 모르는 (혹은 그것이 허락되지 않은) 인물이다. 라디오가 인물들을 현재의 표면에 잡아두기 위한 매개체라면 음악은 이들을 현재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매개체이다. 삶의 연장을 소망하는 안사에게는 세계의 현재가 메아리치고 죽음을 향유하는 홀라파에게는 삶의 비애가 노래를 부른다. 그렇기에 두 인물은 같은 프롤레타리아임에도 서로에게 있어 완전한 타자이다. 두 인물은 서로를 환대할 수 있을까? 두 세계의 공존은 가능한 것일까? 혹은 이질적인 두 세계가 만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까?


4. 안사와 홀라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면을 따라가 보자. 마트에서 해고된 뒤 취직한 술집이 사장의 마약 밀매로 문을 닫자 안사는 망연자실하게 그 광경을 지켜본다. 곧이어 그 술집에서 술을 마셨던 홀라파가 그녀 옆에 나타난다. 그리고 두 인물의 대화가 이어진다. 첫 번째 대화. 서사의 시작. 이질적인 두 세계의 마주침. 두 인물은 후오타리와 리사가 함께 있던 술집에서 만난 적이 있었지만 한 프레임 안에 잡히지는 않았다. 이후 버스 정류장에서 자고 있는 홀라파를 안사가 깨울 때 역시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그제서야 두 인물의 서사가 시작되는가? 우리는 이 서사가 시작하는 장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사가 일하던 술집에서 홀라파는 손님으로서 술을 마셨다. 그 술집은 안사에게는 노동의 공간이지만 홀라파에게는 유흥의 공간이다. 하나의 공간. 두 개의 세계. 그 술집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한 두 인물은 마주칠 수 없다. 그러나 그 공간이 사라지는 순간 안사와 홀라파는 노동자와 소비자가 아닌 하나의 세계 안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채 만날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의 바깥. 인간과 인간의 만남.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기다리던 타자와의 마주침.


두 인물은 카페에서 함께 커피를 마신 후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다. 극장에서 함께 본 영화는 짐 자무쉬의 <데드 돈 다이>이다. 짐 자무쉬의 좀비 영화. 여기서 나는 이 영화와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직접적으로 비교할 생각은 없다. 대신 나는 영화 안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영화 속에서 극장은 세계의 현재에서 유리된 공간처럼 보인다. 외관은 현대의 극장이라기에는 낡고 오래된 것처럼 보이고 극장의 벽보에는 로베르 브레송의 <돈>이나 자크 베케르의 <구멍>, 장 뤽 고다르의 <경멸>과 같은 고전 영화들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거기다 안사와 홀라파가 극장을 나오기 전 먼저 극장을 나온 두 남자 역시 고전 영화인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와 <국외자들>을 언급한다(혹시 이 극장은 헬싱키에 있는 시네마테크일까?). 시간이 과거에 멈춰 있는 듯한 공간. 마치 프롤레타리아들의 시간처럼 과거에 머물러 있는 극장의 시간. 게다가 안사와 홀라파가 관람한 <데드 돈 다이>는 좀비 영화이다. 죽지 않은 시체의 귀환.  상징계의 질서를 거부하는 존재들. 사라지지 않은 과거의 시간. 세계의 현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 아닌 흘러가지 못한 채 잔존해 있는 과거의 퇴적층을 담아낸 공간이라는 점에서 영화 속 극장은 프롤레타리아의 공간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안사와 홀라파는 극장 앞에서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 이름을 물어보는 홀라파에게 안사는 다음에 만나면 알려주겠다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종이에 적어준다. 그리고 홀라파의 얼굴에 입맞춤을 하고 떠난다.


그렇게 두 인물 사이의 로맨스가 시작될 무렵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이상한 선택을 한다. 안사와 헤어진 뒤 극장 앞에 남아 있던 홀라파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던 중 실수로 안사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잃어버린다. 두 인물이 본격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한 순간 다시 인물들은 분리시킨 아키 카우리스마키. 왜 이런 연출이 필요했는가? 다시 한번 상기하자. 두 인물의 로맨스가 시작된 장소는 극장이다. 프롤레타리아의 공간. 시간이 멈춘 공간. 현재 바깥의 공간.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공간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서사가 시작될 무렵 영화는 다시 두 인물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전화번호를 잃어버린 홀라파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전에 만났던 공간인 극장 앞에서 하염없이 안사를 기다리는 것이 전부이다. 그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시간이 죽어있던 공간인 극장에 현재의 시간이 스며 들어오기 시작한다. 홀라파가 극장 앞에서 안사를 기다리는 물리적인 시간은 절대적으로 현재의 시간이다. 현재와 유리되어 있던 프롤레타리아의 세계에 현재의 시간이 스며드는 순간. 현재를 거부하던 이들이 현재와 마주하는 순간. 첫 번째로 서로를 기다리던 순간에는 끝내 만나지 못하고 엇갈리고 만다. 그리고 두 번째 기다림에서 두 인물은 마침내 서로를 재회한다. 그 자리에서 안사는 홀라파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저녁 식사 대접을 위해 안사는 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홀라파는 꽃집에서 꽃을 산다. 이건 영화에서 두 인물이 처음으로 소비를 한 순간이다. 물론 그전에 안사는 인터넷 카페를 이용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직업을 찾기 위한 과정의 일부였고 홀라파는 매번 술집에서 술을 마시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소비라기보다는 홀라파의 일상의 일부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노동자가 아닌 소비자로서의 초상. 생존을 위한 소비가 아닌 일상 바깥을 향유하기 위한 소비. 안사는 꽃을 선물해 준 홀라파에게 저녁 식사를 제공한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인물들이 술이나 음료가 아닌 식사다운 식사를 하는 유일한 장면이다. 이 식사는 생존을 위한 식사가 아닌 타자를 환대하기 위한 식사이다. 노동으로 찌든 이들의 삶에 잠시 허락된 유흥. 그것은 타자와 함께 있기에 가능하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안사가 음악을 틀기 위해 라디오를 켜자 또다시 전쟁에 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안사는 또다시 라디오를 꺼버린다. 그녀에게는 음악이 허락되지 않는다. 생(生)의 지속을 소망하는 그녀에게 삶의 애환과 비애를 노래하는 음악은 자리 잡을 곳이 없다. 음악은 홀라파만이 향유할 수 있다. 음악에 대한 향유는 곧 술을 향유하고 죽음을 향유하는 것이다. 안사와의 식사 내내 술을 찾던 홀라파는 안사 몰래 술을 마시다 그녀에게 걸린다. 안사는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가 술로 인해 죽고 그 슬픔으로 인해 어머니 역시 그 슬픔에 빠져 죽었다고 말하며 술에 대한 경멸감을 드러낸다. 그러자 홀라파는 자신은 잔소리꾼이 싫다며 집을 떠난다. 환대의 실패. 두 타자 사이의 절대적인 간극. 생(生)의 세계와 사(死)의 세계 사이의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만남은 왜 실패했는가? 두 인물은 현재의 시간이 스며드는 프롤레타리아 공간 앞에서 현재의 물리적인 시간을 견디면서 만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두 인물이 다시 만난 곳은 프롤레타리아의 세계 안이다. 안사의 집. 프롤레타리아의 집. 그리고 두 인물이 프롤레타리아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다. 그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한 두 인물의 간극은 극복할 수 없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안사와 홀라파가 진정으로 서로를 환대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의 세계 바깥, 현재의 세계, 헬싱키의 현재 안에서 마주해야만 한다. 그들의 그 세계 안에 머물러 있는 한 그들의 삶에도, 더 나아가 현재의 세계에도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다른 인물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바깥을 향한 걸음을 시작해야 한다.



5. 이상한 장면이 있다. 영화 안에서, 더 나아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이상해 보이는 장면. 영화의 후반부. 침대에 누워있는 홀라파를 바라보면 화면이 페이드 아웃한다. 뒤이어 도시의 자연 풍경을 찍은 쇼트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그리고 화면은 다시 페이드 아웃으로 사라진다. 그러는 동안 화면에서는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비창”이 흘러나온다. 이 장면은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장면치고는 이상하리만큼 감상주의적이다. 더 중요하게는 이 장면이 서사의 환원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내러티브의 바깥. 하지만 이 장면은 명백하게 영화에서 잉여가 아니다. 이 장면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여기서 카메라는 이전까지 비추던 노동의 풍경이나 도시의 풍경을 담아내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유일하게 자연 풍경을 담아낸다. 이때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카메라가 찍은 것은 단순히 풍경 자체가 아닌 자연을 지배하는 시간 그 자체이다. 자연은 시간의 순리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 시간은 명백하게 프롤레타리아의 시간이 아닌 세계의 시간, 현재의 시간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이 장면을 통해 시간의 흐름 그 자체를 영화 속에 삽입한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흘러나온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이미 들은 적이 있다. 극장에서 만나 안사와 홀라파가 헤어지던 순간. 홀라파가 실수로 안사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잃어버리며 현재의 시간이 그들의 세계에 스며들기 시작하던 순간. 그때 현재의 시간은 극장이라는 프롤레타리아의 공간에 한정되었으나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이제 하나의 시퀀스를 할애하여 영화 전체에 세계의 현재가 스며들도록 한다. 이 장면이 나타난 이상 우리는 필연적으로 장면의 앞과 뒤를 비교해야 한다.


이 시퀀스가 나오기 전 안사는 공사장을 떠돌던 개 한 마리를 입양한다. 안락사 위기에 처했던 개를 집으로 데려와 깨끗하게 씻긴 뒤 한 침대에서 함께 잠을 청하는 안사. 환대의 순간. 작지만 성공한 첫 번째 환대. 뒤이어 후오타리와 함께 술집에 있는 홀라파가 나온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한 여성 듀오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노래의 가사는 분명하게 안사와 홀라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비유이다. 이윽고 홀라파가 술집을 나와 노래를 부르는 여성 듀오를 창문 바깥에서 지켜본다. 카메라는 그녀들을 응시하는 홀라파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듯한 얼굴. 여기서 핵심은 홀라파가 음악을 향유하는 대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 말했다시피 홀라파에게 있어 음악은 그가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자 삶의 바깥을 향유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처지를 노래하고 있는 음악을 한 걸음 떨어져 응시할 때 그것은 자신의 삶 자체에 대한 응시이다. 외부의 시선에서 그가 자신의 삶을 응시할 때, 그는 지금 노래되고 있는 삶과 작별을 고한다. 그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지도, 음악을 향유하지도 않는다. 즉, 더 이상 홀라파는 죽음을 향유하지 않는다. 사(死)의 세계와 작별을 고한 홀라파.


하숙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술을 버린다. 그가 침대로 돌아와 잠을 청하고자 할 때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자연의 시간을 영화 속에 집어넣는다. 변화의 시간. 극장 앞에서 안사를 기다릴 때처럼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물리적인 시간. 그 시간이 지난 후 홀라파는 안사에게 전화한다. 홀라파는 그녀에게 자신이 완전히 술을 끊었다고 말하고 안사는 그를 곧장 집으로 초대한다. 하지만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다시 한번 둘의 만남을 유예한다. 집을 나오던 중 기차에 치이는 홀라파. 홀라파가 종이를 잃어버렸을 때처럼 영화는 다시 한번 두 인물 사이에 시간의 간극을 형성한다. 후오타리로부터 홀라파의 소식을 들은 안사는 그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간다.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홀라파에게 그녀는 간호사가 조언해 준 대로 계속해서 말을 걸고 책을 읽어준다. 홀라파가 그랬듯이 안사 역시 현재의 흐름을 온몸으로 견디며 그를 기다린다. 그렇기에 그녀가 노동을 하고 기차를 타는 일상적인 장면에서조차 프롤레타리아 세계의 유리된 시간이 아닌 현재의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리고 마침내 홀라파가 깨어난다. 눈을 뜬 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한 마디. “나 죽었나요?” 안사의 대답. “살았어요.” 깨어난 홀라파는 꿈속에서 그가 안사와 혼인신고를 했다고 전한다. 죽음을 향유하던 그는 이제 죽음을 거부하고 눈앞에 있는 삶을 긍정한다. 병원 바깥에서 잠시 리사를 만난 안사는 리사와 후오타리의 관계 역시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안사와 홀라파가 그랬듯이 리사와 후오타리 역시 서사를 창조하고 세계의 현재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러니 이 서사는 안사와 홀라파만을 위한 서사가 아닌 모든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서사이다. 현재에서 유리된 세계가 아닌 현재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 그럼으로써 결국 세계와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전하고자 하는 것.


병원에서 퇴원한 홀라파는 안사와 함께 길을 떠난다. 안사는 개 이름을 채플린으로 지어줬다고 말한다. 두 인물과 채플린은 노동의 풍경도, 도시의 풍경도 아닌 가로수가 들어서고 낙엽이 바닥에 흩날리며 노을이 지는 하늘이 보이는 자연의 풍경 속에서 함께 걸어간다. 카메라는 후경을 향해 걸어가는 두 인물과 채플린을 조용히 바라본다. 이들의 걸음은 분명 프롤레타리아 3부작에서 인물들이 보여준 자신의 세계를 탈출하는 여정도, <보헤미안의 삶>에서 세계의 어둠으로 사라지는 걸음도 아니다. 그들은 이제 삶에서 어떠한 변화에 대한 의지와 희망도 없던 세계에서 벗어나 세계의 현재, 유럽의 현재, 핀란드의 현재, 헬싱키의 현재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물론 현재의 세계가 그들을 환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계를 거부하지 않고 먼저 그 안으로 들어서고자 할 때, 서로가 서로를 환대하고 연대할 때, 그들이 찰리 채플린의 방랑자처럼 세계 안에서 운동하고 자본주의에 균열을 일으킬 때 비로소 세계도, 그들의 삶도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첫걸음을 바라보며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영화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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