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리뷰

존재하는 자의 초상

by 이민재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마지막 장면. 인사를 하고 헤어진 뒤 각자의 길을 가던 중 ‘나’는 갑자기 사치코에게 달려가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그 고백을 들은 사치코는 카메라 앞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못한다.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이번에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마지막 장면. 강변에서 홀로 앉아 있던 케이코에게 지난번 그녀와 경기를 했던 선수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케이코는 그녀의 정확한 말을 듣지는 못하지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그녀에게 그녀 역시 인사를 한다. 그녀가 떠난 후 케이코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미아케 쇼의 카메라는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옆모습을 유심히 바라볼 뿐이다. 두 개의 엔딩. 한쪽에서는 인물이 멈추자 영화 역시 멈추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물이 이동하여 카메라를 빠져나간 뒤에야 영화를 멈춘다.


이때 사치코의 얼굴은 카메라에 정면으로 담기고 케이코는 옆모습만을 보인 채 프레임 바깥으로 달려간다. 멈춰있는 자와 이동하는 자. 한 가지 더. 두 영화 모두 마지막 장면에서 인물이 다른 인물과 갑작스럽게 만난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나’와 사치코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 케이코는 자신이 상대했던 여성과 만난 뒤 각자의 길을 가면서 헤어진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그러한 만남 자체에서 끝나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만남 이후 헤어짐에서 끝난다. 이때 이 만남에서 사치코는 ‘나’의 말을 이해했지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른다. 반면 케이코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건넨 인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좀 더 정확하게, 케이코는 상대가 건넨 말 자체는 알아들을 수 있어도 그 인사의 정확한 이유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녀와 싸웠던 선수가 다가와 그녀에게 예의를 표하는 첫 상황. 경쟁의 대상에서 공경의 대상으로. 그럴 때 사치코에게 이 만남은 선택의 문제이고 케이코에게는 의미의 문제이다. 그 순간 사치코에게 세계는 곧 딜레마이고 케이코에게는 미스터리이다. 딜레마와 미스터리.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딜레마는 선택 이후의 윤리적 책임에 대한 질문이고 미스터리는 선택 이후를 예측할 수 없는 불가해함이다. 미아케 쇼는 두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모두 풍경을 담은 쇼트를 보여주면서 그녀들 앞에 놓인 것이 단순히 인물과의 관계가 아닌 세계와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세계 앞에서의 딜레마와 미스터리. 미아케 쇼는 둘 중 어느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를 긍정하면서 영화를 끝낸다.


사치코는 ‘나’와 시즈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 이후 세 인물의 관계는 이전으로 회귀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알기에 사치코는 대답을 유예한다. 영화는 유예 그 자체에서 끝난다. 유예를 긍정하기. 아무것도 정초 되지 않은 카오스를 긍정하기. 카오스 안의 딜레마. 그 딜레마를 마주할 때 사치코는 세계 안에서의 삶이 곧 선택의 연속이라는 사실과 마주하는 것이다. 이전까지 사치코와 두 남자의 관계가 어떠한 이름으로도 정립되지 않는, 그렇기에 자유분방한 관계였으나 세계는 그러한 시간을 오래 주지 않는다. 선택의 시간. 딜레마의 시간. 그 시간이 시작될 때 미아케 쇼는 영화를 멈춘다. 그 순간이 곧 청년 세대가 마주해야 하는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딜레마의 연속. 선택의 연속. 선택 이후의 윤리적 책임. 그 앞에서 방황하는 세대의 초상. 반면 케이코가 상대 선수와 인사를 나누고 프레임을 빠져나갈 때 그녀는 마치 세계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다. 세계 앞에서 멈추는 자와 세계 안으로 뛰어드는 자. 케이코는 직전 복싱 경기를 패배했다. 그녀의 삶은 한 차례 멈추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계는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간다. 멈춰있는 삶과 흘러가는 세계. 그럴 때 케이코의 마지막 달려가는 옆모습은 잠시 멈춰있던 삶을 일으켜 세운 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뛰어드는 모습처럼 보인다. 사치코의 얼굴이 도래하는 미래와의 만남을 유예하는 자의 얼굴이라면 케이코의 옆모습은 손아귀에서 벗어나 점점 멀어지는 불가해한 미래를 마주하고자 하는 자의 초상이다. 유예와 결단. 미아케 쇼는 두 선택 사이에서 어떤 우열도 나누지 않는다.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두 미아케 쇼는 삶과 세계의 불가해함을 온전히 인정하면서 영화를 끝낸다. 사치코가 무엇을 선택할지,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우리는, 영화는 모른다. 케이코가 어떤 미래를 마주하게 될 지도 알 수 없다. 불가해한 것을 함부로 규정하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서 바라보기에, 미아케 쇼의 카메라는 세계의 풍경과 더불어 삶의 풍경의 한 단면을 포착하는 데 성공한다. 아무것도 알 수 없기에 아름다운 것. 미아케 쇼의 영화가 아름다운 이유.


2.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오프닝.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케이코가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다. 그때 케이코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이후 영화의 중반부가 되면 그 편지가 체육관 회장에게 쓰는 편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케이코가 오프닝에서 쓰기 시작한 편지는 영화의 중반이 되어서야 완성된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오프닝에서 편지를 쓰는 장면과 중반부에 편지를 완성하는 장면 사이의 진행은 선형적인 진행이 아닌 케이코의 플래시백이 된다. 그리고 이 플래시백은 곧 케이코가 편지를 쓰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서사이다. 두 명의 케이코. 편지를 쓰기 전의 케이코는 어떻게 편지를 쓰게 되었는가? 그 편지는 어디로 가는가? 그녀의 편지는 목적지에 정확히 도달하는가?


프롤로그와도 같은 오프닝이 끝나고 나면 영화는 케이코의 복싱 체육관으로 넘어간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체육관 안에서 들려오는 여러 사운드를 하나하나 찍어낸다. 이 말을 잘 음미해 주길 바란다. 사운드를 담아내는 것이 아닌 찍는 것. 사운드의 시각화. 청각장애인인 케이코가 세계를 감각하는 방법. 그녀에게 있어 사운드는 듣는 것이 아닌 보는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케이코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세계는 어떠한가? 소리라는 거대한 매개체를 공유하지 못하는 그녀의 삶은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녀와 세계 사이의 명확한 단절을 보여준다. 몇 가지 장면. 케이코가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계산을 할 때 점원이 포인트 카드에 대해서 물어보지만 케이코는 자신이 봉투를 가져왔다는 제스처를 한다. 그다음 장면. 체육관으로 가던 중 한 남자와 케이코가 부딪히며 남자의 물건이 떨어진다. 남자는 케이코에게 물건을 주우라고 하지만 케이코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갈길을 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케이코가 마주한 인물들은 케이코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곧 케이코가 타인의 세계 안에서 어떤 표상의 인물로서 남는가의 문제이다. 편의점 점원에게 있어 케이코는 소통이 안 되는 이상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케이코와 부딪힌 남자에게 케이코는 자신이 잘못하고도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무례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코는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혹은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 두 남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규정했듯이 그녀 역시 자신의 인식 안에서 사태와 인물을 규정한다. 다시 말해, 케이코는 자신의 세계 밖으로 벗어날 생각이 없다. 단절의 순간. 고립되어 있는 케이코의 세계는 타인의 세계와 소통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영화가 촬영된 시기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이다. 타인과의 소통에서 입모양과 얼굴 표정이 중요한 케이코로서는 고립이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케이코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한 대답. 그녀의 세계의 중심에는 복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케이코가 세계 안에 남기고자 하는 자신의 표상이다. 그때 케이코는 자신이 청각장애인 복서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그녀는 그저 복싱이 하고 싶은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 있어 복싱이라는 행위는 곧 그녀가 다니는 복싱 체육관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다시 첫 번째 체육관 장면을 떠올려보자. 카메라는 케이코의 시점에서 체육관에서 들려오는 여러 소리들을 시각화하여 보여준다. 우리는 이후에 영화에서 이러한 장면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 사운드의 이미지화. 이것은 케이코가 세계를 감각하는 방법이기는 하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방법은 복싱 체육관에서만 쓰이는 방법이다. 케이코가 체육관 이외의 다른 곳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공간을 감각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자면 복싱 체육관은 케이코에게 있어 유일하게 사운드로서 존재하는 공간이다. 이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그녀에게 있어 세계는 사운드가 아닌 이미지만으로 존재한다. 사운드를 배제한 이미지. 타자 없는 이미지. 케이코의 자의적인 이미지. 케이코가 세계로부터 고립되는 이유. 하지만 복싱 체육관 안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운드를 감각한다. 그렇기에 케이코는 복싱 체육관에서 온전하고 충만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오해하면 안 된다. 이 말은 케이코가 체육관에서 그녀의 청각장애를 극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미아케 쇼는 영화에서 케이코의 청각장애를 연민의 대상이나 극복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는다. 여기서 그녀의 청각장애는 세계와 케이코 사이의 간극 그 자체이다. 바꿔 말하자면 복싱 체육관과 케이코 사이에는 어떠한 간극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체육관 관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케이코가 복싱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먼저 케이코의 안 좋았던 과거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싸움을 잘하고 싶은 것이 아닌 복싱을 하고 있을 때 머리가 텅 비는 무(無)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텅 비는 상태. 공백의 상태가 아닌 복싱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상태. 관장은 케이코가 재능이나 소질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재능이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다른 선수에 비해서 키도 작고, 리치도 짧으며, 스피드도 느리지만 대신 인간적인 기량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직함과 솔직함을 갖춘 선수. 이 말의 요점은 무엇인가? 관장은 복싱 선수로서 떨어지는 케이코의 재능을 인간적인 기량으로 대체하고 있다. 다시 말해 관장은 케이코를 한 명의 복싱 선수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체육관에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케이코는 다른 체육관이 아닌 오직 이 체육관에서만 인간으로서 충만하게 존재할 수 있다. 복싱 선수 케이코가 아닌 인간 케이코. 관장이 인간 케이코를 온전하게 받아들였기에 두 세계 사이에는 어떠한 소통도 필요하지 않다. 온전한 인간과 온전한 세계. 그런 케이코를 받아준 체육관 관장은 곧 그러한 세계에 대한 표상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관장의 몸이 늙어가고 있다. 점차 병들고 나약해지는 육체. 그와 동시에 체육관의 몸 또한 늙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세계는 사라질 것이다. 그럴 때 케이코는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 거대한 현실에 던져진 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 한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고립된 채 살아가던 케이코는 어떻게 세계와 마주할 것인가?



3. 체육관 안과 밖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순한 대답. 체육관에서 케이코는 복싱을 하고 밖에서는 일반적인 삶을 산다. 이 단순한 사실은 생각보다 큰 차이를 가져온다. 체육관에서 케이코는 복싱을 통해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지만 체육관을 벗어나서는 복싱 선수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케이코의 두 번째 프로 복싱 경기. 영화는 케이코의 경기 후반부를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무엇인가? 우리가 경기에서 보는 케이코의 모습은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이 아닌 상대에게 계속 타격을 허용하는 무기력한 모습이다. 케이코의 공격은 대부분 막히고 상대의 공격은 거의 다 케이코에게 적중한다. 케이코의 어머니는 그러한 딸의 모습을 보며 괴로워한다. 그런데도 케이코는 경기에서 판정으로 승리한다. 미아케 쇼는 이 경기 장면에서 케이코의 승리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카타르시스를 제거했다. 그녀는 승리했지만 승리를 누리지 못한다. 코치로부터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도, 승리한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에서도 케이코는 웃지 못한다. 우리는 오로지 상처로 가득한 그녀의 얼굴만을 볼 수 있다.


왜 그녀는 승리에도 기뻐하지 못하는가? 단순한 대답. 그녀는 자신이 승리했다는 선언을 듣지 못한다. 주체와 세계 사이의 간극. 그녀의 코치와 관장이 승리를 기뻐할 때도 케이코는 그 감정을 공유할 수 없다. 그녀가 경기를 끝낸 후 느낄 수 있는 것은 얼굴의 수많은 상처와 고통이 전부이다. 사운드의 부재는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거대한 간극을 만들어낸다. 이때 케이코는 무엇을 느끼는가? 앞서 케이코가 편의점 점원과 대화할 때, 체육관을 가던 중 남자와 부딪혔을 때 케이코는 자신의 상상적 세계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것을 상기해 보자. 그녀는 거기서 타인의 세계를 이해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링 위에서 모두가 느끼는 감정을 그녀가 공유하지 못할 때 비로소 케이코는 자신이 얼마나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승리의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승리 이후에도 그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없다는 단절을 마주할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복싱 체육관은 그녀가 가장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의 사람들조차 케이코를 고립과 고독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한다. 경기가 끝난 이후에 케이코의 고독은 더 깊어진다. 어머니는 철로 앞에서 케이코에게 복싱을 그만두면 안 되냐고 말한다. 어머니의 눈에는 승리보다 딸의 얼굴에 새겨진 상처가 먼저 들어온다. 케이코는 아무 말없이 철로를 먼저 건넌다. 또 하나의 장면. 늦은 밤, 체육관의 관원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케이코는 홀로 강변에 서있다. 이때 경찰 두 명이 다가와 홀로 서있는 케이코를 조사한다. 케이코는 신분증을 통해 금방 자신이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만 얼굴의 상처에 대해서는 결국 설명하지 못한다. 경찰들은 케이코의 상처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또 한 번의 간극. 그녀의 상처는 오로지 그녀의 경기를 옆에서 지켜본 체육관 사람들과 가족이 전부이다. 체육관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케이코는 복싱 선수가 아닌 청각장애인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세계 안에서 그녀는 또 고립된다. 오히려 케이코의 상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호텔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직원이다. 그건 동료 직원이 단지 수어를 통해 케이코와 소통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가 케이코와 같은 장소에서 노동을 하며 교감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케이코의 동료 직원은 호텔에서 함께 일하는 노동자 케이코를 통해 복싱 선수 케이코를 보는 것이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복싱 선수 케이코는 세계 안에서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 그건 오로지 복싱 링 위나 체육관 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러한 체육관조차 변하기 시작한다. 더 정확하게, 두 번째 경기 이후 케이코가 경험하는 세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경기를 치른 이후 처음 체육관에 갔을 때 케이코와 하야시 코치는 경기에 대한 분석을 한다. 이때 체육관에는 케이코의 동생 세이지가 처음 방문하여 복싱에 대해서 배운다. 영상을 보던 코치는 케이코에게 왜 가드를 제대로 안 하냐고 질문한다. 그러면서 하야시는 케이코가 두려워서 앞으로 달려든다면서 감정을 컨트롤하라고 말하자 케이코는 직접 글을 통해 이야기한다. “아픈 게 싫어요.” 그녀는 고통을 두려워한다. 더 정확하게, 그녀는 고통에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영화의 초반부에 케이코가 복싱 데뷔전을 1라운드 KO로 승리했다는 자막을 보았다. 첫 번째 승리와 두 번째 승리는 그 결과가 같더라도 완전히 다른 의미의 승리이다. 첫 번째 승리에서 그녀는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지만 두 번째 승리에서는 오로지 고통만이 그녀에게 남는다. 케이코는 복싱을 사랑하지만 그에 동반되는 고통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 고통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역설적으로 그녀는 더 달려든다. 그런 케이코에게 하야시와 마츠모토가 가드 훈련을 시킨다. 그러나 케이코는 계속 뒤로 물러나기를 반복하고 결국 코에 부상을 입는다.


그리고 이상한 장면이 이어진다. 체육관에 한 남자 관원이 들어온다. 우리는 이미 그를 본 적이 있다. 케이코가 체육관에서 훈련을 할 때 그는 조심스레 그녀를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케이코와 남자의 서사가 시작되리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아케 쇼는 그 기대를 정반대로 뒤집는다. 체육관에 들어온 남자는 하야시 코치에게 체육관을 그만둔다는 내용의 편지를 관장에게 전해달라고 말한다. 하야시가 이유를 묻자 남자는 여자만 가르치니 여기선 강해질 수 없다고 대답한다. 누구도 예상 못 한 대답. 그가 이후에 체육관의 폐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 대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남자는 케이코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체육관에서 유독 다른 관원들에 비해 더 많은 관심과 지도를 받는 케이코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의 눈에 체육관 안에서 운동하는 모든 관원은 같은 인간이다. 그 안에서 케이코와 같은 타자가 들어오는 것을 그는 견디지 못한다. 남자는 그렇게 체육관이라는 세계를 떠난다. 그러면서 케이코와 남자는 서로 간의 절대적인 타자로 남게 된다. 미아케 쇼는 그걸 알려주듯이 두 인물을 한 번도 한 프레임에 담지 않았다. 절대적인 간극. 극복되지 못한 단절.


이때 남자가 체육관을 떠나는 사건은 케이코에게 어떤 의미인가? 미아케 쇼는 남자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케이코와 마츠모토, 그리고 세이지가 바라보는 쇼트를 보여준다. 이 쇼트에서 핵심은 세 인물 중 케이코 홀로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점이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케이코는 마츠모토와 세이지와 달리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진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케이코가 본 것은 남자가 체육관을 떠난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점은 알지 못한다. 그건 그녀의 곁에 있는 마츠모토와 세이지만이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 쇼트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세 인물이 함께 있는 모습이 아닌 한 쇼트 안에서 공존하지 못하는 케이코의 소외이다. 이 소외는 남자가 케이코의 타자성을 폭로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체육관은 케이코가 가장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세계이며 가장 온전하게 그녀를 받아들이는 공간이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케이코라는 타자가 들어오면서 체육관이라는 세계가 변화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청각장애인이라는 케이코의 타자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동시에 케이코 이외에 다른 관원들의 소외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영화 내내 케이코가 관장과 코치를 제외한 다른 관원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녀에게 있어 체육관은 오로지 자신의 복싱 실력을 연마하기 위한 공간이다. 그 안에서 함께 운동하는 타자들의 자리는 상상하지 못한다.


물론 그것은 케이코의 잘못이 아닌 그녀의 육체가 지니는 필연적인 한계이다. 그럼에도 미아케 쇼는 그 한계를 미화하지 않는다. 이 장면이 중요한 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보이던 체육관에 내재하는 균열을 인지함과 동시에 케이코의 상상적 세계 바깥을 마주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가 따라온 케이코만의 세계가 아닌 여러 관원들이 함께 있는 체육관. 문제는 무엇인가? 그 의미를 케이코는 알지 못한다. 그녀는 체육관 안에서 타자로서 존재하는 자신의 자리를 여전히 마주할 수 없다. 대신 무엇이 남았는가? 케이코는 남자에게서 하나의 가능성을 본다. 어떤 가능성? 체육관을 떠나는 것. 의미와 이유는 알 수 없어도 남자가 떠나는 행위를 통해 케이코는 체육관 바깥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체육관을 떠나는 것은 곧 복싱을 떠나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복싱에서 고립과 소외를 느꼈다. 게다가 체육관이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케이코의 선택의 순간도 점점 다가오고 있다.


4. 영화는 중간중간 체육관 관장의 건강검진 장면을 보여준다. 관장의 몸은 계속 병들어 간다. 그의 육체는 곧 체육관의 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늙고 병들어 가는 몸. 소멸을 앞둔 몸. 몸이 사라지면 케이코의 세계도 무너진다. 하지만 케이코가 체육관을 떠나는 것과 체육관이 사라지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전자가 케이코의 주체적 선택과 관련된 문제라면 후자는 선택의 가능성이 소멸된 채 운명을 마주해야만 하는 삶의 문제이다. 호텔에서 일을 마친 케이코는 체육관으로 향한다. 그녀가 걸어가는 길을 우리는 이전에 본 적이 있다. 그때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케이코. 이윽고 체육관 계단 앞에 도착한 케이코는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되돌아간다. 이 계단 역시 우리는 이미 보았다. 케이코가 행인과 부딪혔던 곳. 무엇이 달라졌는가? 첫 번째 계단 장면에서 케이코는 행인과의 충돌을 무시한 채 체육관으로 향했다. 그때 체육관은 케이코를 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체육관은 더 이상 케이코에게 온전한 세계가 아니다. 집으로 돌아온 케이코는 복싱을 잠시 쉬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쓴다. 우리가 가장 처음에 보았던 장면. 플래시백은 끝났다. 이제 우리는 케이코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케이코에 도달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케이코는 편지를 가지고 체육관으로 오지만 결국 전하지 못한다. 체육관을 나온 뒤 케이코는 계단에서 관장과 그의 아내를 만나게 된다. 세 번째 계단. 관장과 아내를 만난 케이코는 인사를 한 뒤 급하게 도망간다. 관장은 그런 케이코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체육관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낯선 쇼트가 나온다. 케이코가 떠난 뒤 미아케 쇼는 이전 쇼트의 반대편에 카메라를 놓고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는 관장과 아내를 바라본다. 기술적으로만 놓고 보면 이 쇼트는 180도 법칙에 위배되는 쇼트이다. 하지만 요점은 위반 그 자체가 아니다. 미아케 쇼는 이 장면을 통해 변화를 바라본다. 이때 변화하는 것은 세계가 아닌 케이코이다. 케이코가 체육관을 떠나더라도 체육관과 관장은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한다. 단지 케이코가 그 안에서 변화했을 뿐이다. 타인과의 충돌을 뚫고 찾아가던 세계에서 이제는 도망치는 케이코. 왜 도망치는가? 그녀는 자신이 이미 변화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 변화한 자신을 관장에게 보여주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체육관에서 도망친 뒤 케이코는 마치 도피를 하듯이 청각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만남을 가진다. 또 하나의 상상적 세계. 그 사이 관장은 공식적으로 체육관의 폐관 소식을 전한다. 하나의 세계가 사라졌다. 그 소식을 케이코는 문자를 통해 알게 된다. 케이코 자신이 체육관을 떠나기 전에 체육관이 사라진다. 케이코가 체육관을 떠나는 것은 자신의 상상적 세계를 남겨둔 채 복싱 선수로서의 삶을 잠시 유예하는 선택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자신이 원할 때며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 놓은 채 떠나고자 했다(편지에서 케이코는 복싱을 그만두는 것이 아닌 쉬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체육관이 사라지는 것은 그러한 상상적 세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체육관이 사라진 세계 안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미아케 쇼는 어두워진 황혼녘 하늘 아래에서 고독하게 서있는 케이코의 실존적 풍경을 조용히 지켜본다.


물론 아직 한 경기가 더 남아있다.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온 뒤 세 번째 경기를 위한 준비를 하는 케이코. 훈련을 마친 뒤 돌아가는 케이코에게 관장이 말한다. “케이코. 복싱은 싸울 마음이 없으면 할 수가 없어. 싸울 마음이 사라지면 상대에게도 실례야. 위험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만 같은 관장에게 케이코는 아주 작고 여리게, 그러나 온 힘을 다해 대답을 한다. “네” 관장은 체육관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관장이 케이코에게 전한 질문은 곧 체육관이 폐관한 이후에도 복싱 선수로서의 삶을 이어갈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만약 체육관이 사라짐과 동시에 복싱을 그만둘 것이라면 싸워서는 안 된다. 폐관 이후에도 복싱 선수의 삶을 살아갈 의지를 가져야만 시합에 나설 자격이 생긴다. 이 질문을 통해 관장은 케이코에게 체육관이 사라진 세계에서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것을 위해 직접 케이코에게 새로운 복싱 체육관을 소개해준다. 하지만 케이코는 집에서 너무 멀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읽어내야 한다. 첫 번째로 표면적인 의미. 말 그대로 케이코는 집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거절한다. 이 대답에서 핵심은 복싱이 더 이상 그녀의 삶 중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케이코는 복싱 이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두 번째. 이면에 숨겨진 의미. 케이코는 이전에도 다른 복싱 체육관을 다녔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이 다니는 체육관에서 복싱을 하기를 원한다. 그 체육관이 사라진다는 것은 더 이상 복싱을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밤늦게 체육관을 찾아간다.


하지만 이번에도 자신의 편지를 전하지 못한다. 체육관에 들어간 케이코는 홀로 자신의 경기 영상을 분석하고 있는 관장을 발견한다. 그 모습을 본 케이코는 놀라면서 뛰쳐나온다. 그리고는 다시 체육관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복싱을 그만하고 싶다는 편지를 전하기 위해 들어갔지만 도리어 여전히 복싱을 해야 하는 이유를 마주한다. 이때 그녀가 마주한 것은 체육관 주인으로서의 관장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관장이다. 체육관이 사리지더라도 관장은 계속 남아있다. 그러면서 관장은 체육관에 대한 환유를 넘어 한 명의 인간으로 케이코에게 다가온다. 관장의 진심을 알게 된 케이코는 다시 체육관으로 들어가 관장과 함께 거울 앞에서 복싱 연습을 한다. 가장 기초적인 훈련.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복싱. 거울 앞에서 케이코는 자신과 관장이 나란히 훈련하고 있는 모습 자체를 바라보게 된다. 공존의 풍경. 우리는 영화 초반부에 이미 케이코와 관장은 강에서 함께 운동을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케이코에게 관장의 존재는 체육관의 주인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을 곁에서 지지하는 한 명의 인간이다. 달리 말하자면 케이코는 자신의 팬(fan)을 얻은 것이다. 복싱 선수와 그녀의 팬. 체육관이 사라져도 팬은 사라지지 않는다. 팬을 위해서 뛰는 선수. 타인과 함께하는 삶. 상상적 자아에서 상징적 주체로의 도약. 세계를 향해 내딛는 첫 번째 발걸음.



5. 그 팬이 갑자기 쓰러진다. 케이코는 문자를 통해 소식을 듣고 관장의 아내를 통해 자초지종을 알게 된다. 놀란 마음을 추스른 후 케이코는 다시 훈련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마츠모토 코치가 눈물을 흘리며 링 밖으로 나간다. 우리 모두 그 의미를 알고 있다. 곧이어 다시 링으로 올라오는 마츠모토와 케이코는 서로 웃음을 교환한다. 감정의 교환. 케이코가 처음으로 링 위에서 감정을 드러낸 순간. 인간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코치와 선수를 넘어 인간과 인간으로 만나는 순간. 집으로 돌아온 케이코는 세이지와 함께 음악 작업을 하고 있는 여자친구 하나를 만난다. 이미 영화 초반부에 유사한 장면이 나온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케이코와 하나는 어떠한 관계도 형성하지 못한 채 헤어진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가 먼저 다가와 어설픈 수어로 자신을 소개한다. 또 하나의 만남. 만남이 거듭될수록 케이코가 경험하는 세계는 넓어진다. 상징적 세계로의 진입.


다음 장면. 케이코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관장에게 병문안을 간다. 그 앞에서 케이코는 일기를 쓰고 있다. 그것을 궁금해하는 관장의 아내에게 일기장을 보여준다. 일기장에는 복싱 훈련에 관한 기록과 마음의 기록이 함께 쓰여 있다. 관장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 곁에서 일기장을 천천히 읽는다. 일기장을 읽는 동안 화면에서는 케이코의 플래시백이 나온다. 우리는 영화의 초반부가 케이코가 편지를 쓰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낸 거대한 플래시백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이때의 플래시백은 과거의 한 지점에서 출발해 현재의 종착점으로 향하는 목적론적 구조를 하고 있다. 반면 두 번째 플래시백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주체를 재구성하는 하는 역할이다. 일기의 내용은 주로 복싱 훈련에 관련된 것이지만 화면에서는 복싱 훈련 이외에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교류하는 케이코 역시 볼 수 있다. 관장과의 대화. 세이지와의 대화. 늦은 밤 세이지와 하나와 함께 집 앞에서 복싱을 하고 춤을 추는 장면까지. 이 장면들은 모두 이전에 영화에서 묘사되지 않은 모습들이다. 그래서인지 이 장면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했던, 혹은 알지 못했던 케이코의 모습을 다시 들여다보며 채워 넣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다 플래시백이 나오는 동안 관장의 아내가 일기를 읽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세이지가 작곡한 음악이 흐른다. 영화에서의 유일한 음악과 내레이션. 타인이 케이코에게 먼저 다가서자 케이코 역시 자신의 삶을 기꺼이 열어준다.


세 번째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케이코는 마지막으로 체육관에서 훈련을 한다. 훈련이 끝난 후 그녀는 관장이 했듯이 거울을 닦는다. 거울에는 텅 빈 체육관이 비칠 뿐이다. 소멸을 비추는 거울. 다음 장면에서 관장의 아내는 의식을 찾은 남편에게 케이코의 일기장을 읽어준다. 일기장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 케이코는 체육관 폐관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한다. “복싱장이 닫는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받아들이기 힘들다. 용서할 수 없다.” 케이코가 관장에게 전하지 못한 편지는 일기장을 통해 전해진다. 차이는 무엇인가? 케이코는 편지에서 복싱에 대한 권태를 고백하지만 일기장에서는 체육관의 폐관에 대한 분노를 고백한다. 다시 말해 케이코가 관장에게 고백하고자 했던 권태는 분노가 되어 전해진다. 이때의 분노는 권태에 대한 대체가 아니다. 케이코의 권태는 미처 고백하지 못한 채 묻힌 자신만의 진실이 되어버린다. 이제 케이코는 그 진실을 홀로 간직한 채 살아가야만 한다. 거기서 케이코는 고독해진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진실. 일기장에는 편지가 빠져있다. 그렇기에 일기장을 통해 더 가까이서 재구성한 주체에게도 결핍은 존재한다. 물론 고독은 고립이 아니다. 세계는 결국 각자의 고독을 지닌 개인들의 공존이다. 케이코의 세 번째 경기. 두 번째 경기 때와는 달리 무관중 경기로 진행되어 경기장에는 관중이 없다. 그러나 경기를 보는 세이지, 하나, 케이코의 어머니, 그리고 관장과 그의 아내는 케이코의 경기를 보며 함께 있다. 미아케 쇼는 그들을 영화를 통해 연결하며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명백하게 함께 있는 공존의 풍경을 보여준다. 케이코는 그들을 위해 싸운다. 팬을 위해 싸우는 선수. 동시에 자신의 내면에 여전히 존재하는 권태와 싸우는 케이코. 복싱을 계속하고 싶다는, 혹은 해야만 한다는 몸부림. 하지만 결국 케이코는 카운터를 맞고 패배한다. 나는 이것이 복싱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케이코의 무의식이 발현된 결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그저 패배한 것이다. 복싱 선수로서 케이코의 삶은 한 차례 멈추었다. 체육관 역시 사라진다.


체육관이 폐관한 그날 케이코는 자신이 운동하는 강변에 앉아있던 중 자신과 경기를 했던 상대 선수를 보게 된다. 그녀는 케이코에게 지난 시합에 대한 감사함을 전하고 떠난다. 그녀 역시 케이코처럼 복싱을 하면서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공사장에서 일을 병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왜 케이코에게 인사를 했는가? 물론 단순한 예의의 표시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케이코가 이 인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의 문제이다. 케이코는 이 인사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한다. 정확하게, 케이코는 말의 뜻은 이해할 수 있지만 왜 인사를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우리의 눈에 그 인사는 사회적 주체들 간의 일상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케이코에게는 링 위에서 싸웠던 상대를 타자의 자리에서 마주하는 경험이다. 링에서 벗어나는 순간 두 인물의 관계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상대 선수는 케이코에게 예의를 표한다. 대타자와의 만남. 여기서 케이코는 다시 한번 하나의 가능성을 마주한다. 어떤 가능성? 타자와의 공존. 타자에게 먼저 다가가는 삶. 체육관을 떠나가는 남자 관원을 통해 복싱 바깥의 가능성을 마주한 것처럼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상대 선수를 통해 공존의 가능성을 보는 케이코. 그녀에게 있어 사건을 마주할 때 중요한 것은 사건의 의미가 아닌 그것이 지니는 가능성이다. 타자라는 가능세계. 두 번째 사건을 마주할 때 케이코는 첫 번째와 달리 홀로 사건을 마주한다. 고립된 주체가 아닌 고독한 실존. 피투된 실존으로서의 개인. 이제 그녀는 자신의 삶 앞에 놓인 불확실성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인사를 마친 뒤 케이코는 길 위로 올라가 다시 뛰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그녀가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지켜본다. 영화는 거기서 멈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 미아케 쇼는 도시의 풍경을 담은 쇼트들을 하나씩 열거한다. 분명하게 이 쇼트들은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오마주이다. 세계를 담은 쇼트. 세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한다. 케이코는 그 세계 안으로 뛰어들었다. 복싱 선수로서의 삶은 멈추었지만 그녀의 삶은 계속된다. 그 이후 그녀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함께 살아갈 준비를 마쳤다는 점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녀의 미래를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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