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에서 영화의 바깥을 상상하기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영화가 아무리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고 해도, 혹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기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순간 그것은 현실과 다른 층위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허구가 아니다. 영화 속 세계가 아무리 허구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명백하게 실재와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현실과 허구 사이 모호한 공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진자 운동을 하며 간신히 존재하는 (질베르토 페레스의 표현대로) 물질적 유령이다. 완전한 현실도, 완전한 허구도 아닌 세계. 이 세계는 현실의 물질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실에서 발현되지 못한 대안적 세계를 상상하고 그려낼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가능세계이다. “한 편의 영화는 세상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명제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가 아무리 현실에 대한 대안과 외부를 상상할지라도 그것을 스크린 위에서 정초시킬 수 있도록 하는 실재와 현실의 물질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영화는 한계세계이다. 무엇이든 현실화되는 순간 그것은 한계를 내재한다. 영화가 여타 다른 예술에 비해 가지는 본연의 힘이 있다면 그것은 작가 자신이 상상하는 세계의 가능성을 시청각적, 서사적으로 가장 생생하고 오롯이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관객들은 현실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극장이라는 특수한 공간 안에서 감독이 그려낸 가능세계를 온전하게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감독, 혹은 어떤 영화는 그러한 가능세계로서의 영화가 아닌 자신과 영화가 밟고 서있는 토대를 바라보며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때로 영화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은 영화가 그려내는 가능세계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울 때가 아니라 영화가 마주하는 한계를 스크린 바깥의 우리가 공유하며 같은 한계세계 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줄 때이다. 영화가 마주하는 한계가 곧 시대의 한계이자 세계의 한계이며 인간의 한계이다. 어쩌면 그러한 한계와의 조우야말로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는 각자의 방식으로 한계를 마주하고 그 한계 안에서 존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영화들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위대한 독재자>-도래하지 않은 세계를 희망하는 시선
찰리 채플린은 언제나 자신이 없는 세계를 희망하였다. 더 정확하게, 무성영화에서의 찰리 채플린은 방랑자라는 표상을 통해 스스로 사건이 되어 상징계에 균열을 만들고 그 세계에서 추방된다. 대신 추방된 자신의 자리를 상징계 바깥에 존재하던 타자에게 내어주고 세계에 자그마한 변화를 가져온다. 방랑자가 사라진 세계는 그렇게 더 넓어진다. 채플린은 현실과 허구 사이에 존재하는 영화의 유령적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관객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표로서 방랑자를 창조하였다. 이때 이 방랑자라는 캐릭터가 가능했던 것은 무성영화 시기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목소리가 영화에서 발명된 이후 채플린은 더 이상 방랑자 캐릭터를 등장시키지 않았다.
목소리는 어떻게 방랑자를 추방했을까. 찰리 채플린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방랑자는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라기보다는 기호에 가깝다. 그의 영화에서 방랑자는 각 사건에 개입하면서 희비극적인 소동극을 만드는 사건의 도화선으로만 작동할 뿐 인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지만 명확하다. 그에게 목소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무성영화 속 캐릭터가 모두 만화적인 것은 아니다. 방랑자는 마임과 슬랩스틱이라는 과장된 움직임을 구사하면서 그 주위의, 영화 바깥의 인간과는 다른 신체적인 개성을 가진다. 이는 마치 3D 영화에 침투한 2D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가까워 보인다. <시티 라이트>에서 호루라기를 삼킨 후 목소리가 호루라기처럼 나오는 장면은 인간이 할 법한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당시 유행한 20년대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움직임을 보는 듯하다. 만약에 그가 목소리를 가졌더라면 그는 과장된 몸짓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존재할 법한 인간으로의 존재감을 지녔을 것이다. 캐릭터의 목소리는 그 캐릭터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성격, 감정을 선명히 드러내는 매개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 이론가 루돌프 아른하임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다. 영화에서 음성이 추가되는 순간 영화는 스크린 위의 이차원적인 추상적 예술에서 현실을 모사하는 삼차원적인 예술이 된다. 방랑자라는 캐릭터는 유성 영화에 진입할 때 더는 추상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는 입체적인 캐릭터이자 호명된 주체이며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무성 영화일 때만 해도 채플린의 영화는 삶의 희로애락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이야기하는 관념론적 세계에 머물렀다. 이제 이 세계는 유물론적인 세계로 도약한다.
그의 첫 번째 유성영화인 <위대한 독재자>는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찰리 채플린의 대답이다. 영화 속에서 찰리 채플린은 1인 2역을 소화한다. 토매니아의 독재자 힌켈과 유대인 이발사 찰리. 이 연출은 단순히 영화적 아이러니를 생산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다. 그의 전작 <모던 타임즈>를 떠올려보자. <모던 타임즈>에서 목소리는 부르주아와 지배층의 특권이다. 그들은 방랑자와 같은 프롤레타리아와 하층민을 호명하고 착취할 수 있는 목소리를 독점하고 있다. 방랑자의 신체는 그 목소리에 따라 작동하는 하나의 기관이 된다. 그런데 그런 방랑자에게 단 한 번 목소리가 허용되는 순간이 있다. 영화의 후반부, 소녀와 함께 취직한 식당에서 방랑자는 군중 앞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를 가진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기 직전 춤을 추다가 가사를 적어둔 소매가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그는 아무 말이나 뱉으면서 노래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방랑자에게 목소리가 허용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영화 내적으로만 보면 방랑자의 노래는 계급 상승을 위해 부르주아의 음성 언어를 잠시 빌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모던 타임즈>가 개봉한 시기가 1936년이라는 점을 감안해 보자. 이미 유성영화가 발명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시기였다. 목소리의 시대가 도래했다. 더 이상 무성영화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방랑자가 군중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자신의 영화적 원칙을 포기하고 산업과 관객의 욕구를 받아들이는 굴복의 순간이다. 방랑자는 그렇게 산업이 원하고 관객이 원하는 스타로서의 찰리 채플린이 된다. <모던 타임즈>를 마지막으로 찰리 채플린은 방랑자를 포기하였고 무성영화 역시 포기하였다. 그리고 다음 작품인 <위대한 독재자>에서는 자신의 자아를 두 명의 인물을 통해 분리한다. 독재자 힌켈과 이발사 찰리. 이때 토매니아의 독재자 힌켈은 목소리를 통해 등장하고 국가의 목소리를 독점한 인물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토매니아 내의 유일한 스타. 반면 찰리 채플린이 연기하는 또 다른 인물 찰리는 명백하게 그가 연기해 온 방랑자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발사 찰리는 영화에서 종종 이전의 방랑자가 그랬듯이 자신의 육체를 통해 아이러니와 코미디를 생산하고 무성영화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스타와 방랑자. 목소리를 통해 존재하는 자와 몸을 통해 존재하는 자. 문제는 무엇인가? 여기는 무성영화가 아니다. 그가 속해 있는 유성영화의 세계는 명백히 유물론적 세계이다. 영화 속 토매니아를 보고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현된 세계. 여기서 방랑자의 몸짓은 독재자의 목소리 앞에서 무기력하다. 유성영화는 무성영화를 압도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힌켈과 찰리의 자리가 뒤바뀌는 순간이 있다. 목소리를 통해 존재하는 힌켈이 갑자기 방랑자로 보이는 순간. 지구본 풍선으로 발레를 하는 힌켈. 이 장면에서 힌켈은, 혹은 힌켈을 연기하는 찰리 채플린은 어떠한 대사도 없이 그의 육체만으로 연기한다. 누구든지 이 장면을 보는 즉시 힌켈에게서 방랑자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코미디는 곧 실패한다. 힌켈과 방랑자는 공존할 수 없다. 목소리 없는 힌켈은 공허한 인물이다. 또 다른 장면. 박테리아국의 나폴리니와의 회담에서 힌켈은 나폴리니와 몸싸움을 벌이며 코미디를 생산한다. 또 하나의 방랑자적인 순간. 그러나 이 운동 역시 오래가지 못한다. 이 코미디를 멈추는 것은 무엇인가? 상황을 지켜보던 내무부 장관 가비치가 나폴리니가 제안한 조약에 서명하라고 조언하자 힌켈은 곧장 마음을 바꾸고 조약에 서명하겠다고 약속한다. 두 독재자가 만들어낸 몸의 코미디는 단 한마디 말에 멈춘다. 목소리가 몸의 운동을 억압한다. 이때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토매니아라는 세계에 귀속되어 있으며 그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의 논리 하에서만 허용된다. 힌켈의 목소리는 오직 토매니아의 목소리이다.
이번에는 반대의 경우를 보자. 몸짓으로 존재하는 찰리에게 목소리가 허용되는 순간. 명백하게 마지막 연설 장면. 우선 그 장면이 나오기 전의 전조와도 같은 장면을 살펴보자. 힌켈이 유대인 엡스타인과 대출 협상을 하기 위해 유대인 탄압을 잠시 멈출 것을 지시한다. 그러자 지금까지 한나와 찰리를 괴롭힌 돌격대원들이 친절한 태도를 보인다. 이어지는 쇼트. 카메라는 한나를 단독 샷으로 잡고 한나는 카메라 넘어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소망을 이야기한다. 이 쇼트에서는 오로지 목소리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힌켈의 억압하는 목소리가 아닌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러나 도래하기를 희망하는 소망의 목소리이다. 카메라 바깥을 희망하는 시선. 세계 바깥을 소망하는 목소리. 그러나 한나의 이러한 소망은 힌켈의 목소리에 의해 무너진다. 마지막 연설 장면은 한나의 짓밟힌 소망을 대신 이어 주기 위한 찰리 채플린의 선택이다. 슐츠와 함께 수용소를 탈출한 찰리는 얼떨결에 힌켈의 자리에 간다. 동시에 강에서 사냥을 하던 힌켈은 찰리가 된다. 찰리에게 독재자의 목소리가 허용된다. 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힌켈의 언어를 모방하여야 한다. 하지만 찰리는, 더 정확하게 찰리 채플린은 이를 거부한다. 그는 여기서 찰리의 육체를 빌리고, 힌켈의 자리 위에서, 자신의 언어로 발화한다. 그러니 이 장면에서 연설하는 자는 영화 속 찰리가 아니라 그를 연기하는 찰리 채플린이다. 한나와 마찬가지로 찰리 채플린은 카메라 바깥의 세계,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러나 곧 도래해야만 하는 세계를 소망한다.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한나의 목소리가 소시민의 목소리였다면 찰리 채플린의 목소리는 권력의 자리에서 내는 목소리이자 영화를 만드는 연출자로서 내는 목소리이다. 이제 영화인 찰리 채플린은 목소리를 거부하지 않는다. 자신이 밟고 서있는 땅이 유성영화의 세계라는 것도 거부하지 않는다. 한나의 무너진 소망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그는 기꺼이 독재자의 자리에서, 스타의 자리에서 목소리를 낸다. 더 이상 찰리 채플린은 소녀의 곁에서 웃음을 권하며 추상적인 세계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다(<모던 타임즈>). 대신 명백하게 존재하는 유물론적인 세계 위에서 그녀와 함께 세계 바깥을 희망한다. 방랑자에서 스타로. 연설을 마친 찰리 채플린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한나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한나는 프레임 바깥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바라본다. 목소리를 본다는 것. 찰리 채플린은 그녀를 위해 스스로를 추상화시켜 영화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운다. 이제 그는 목소리만으로 한나에게, 관객인 우리에게 남아있다.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그가 꿈꾸는 세계에 대한 소망을 이어간다. 지금 여기에서 아직 오지 않은 그때를. 한계를 마주할 때 비로소 희망할 수 있는 그곳을 바라보며.
<노 베어스>-육체라는 한계에 대하여
<택시>에서 카메라는 택시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건 미학적 실험이기 이전에 정치적 저항이다. 여기에서 택시는 메타포가 아니라 자파르 파나히에게 가해지는 정치적 억압의 실체이면서 동시에 카메라가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물리적, 정치적 공간이자 명백한 한계이다. 자파르 파나히는 그 한계 안에서 영화를 만든다. <노 베어스> 역시 그러한 자신의 물리적, 정치적 한계와 마주하며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러나 핵심적인 차이 역시 존재한다. <택시>에서 자파르 파나히는 자신의 한계를 내재화한 채 그 한계 안에서 영화를 만들지만 <노 베어스>에서 그는 한계 바깥을 욕망하고 그 욕망의 결과물로서 영화를 창작한다. 말하자면 자파르 파나히는 실현될 수 없는, 불가능함 자체를 욕망한다. 그 불가능함 앞에서 자파르 파나히는 무엇을 마주하는가?
<노 베어스>의 첫 장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거리에서 박티아르와 자라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긴다. 그러다가 화면 밖에서 “컷” 신호가 들려오고 카메라는 줌 아웃하며 우리가 지금까지 본 화면이 자파르 파나히의 노트북 화면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별도의 컷 없이 롱테이크로 촬영되었다. 이 오프닝에서 우리는 두 가지 픽션을 마주한다. 튀르키예에서 찍힌 박티아르와 자라의 픽션. 그것을 연출하는 자파르 파나히의 픽션. 두 픽션은 오프닝 쇼트 안에서 교차되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 다른 공간에 속한 채 유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유는 단순하다. 감독인 자파르 파나히가 현장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육체는 이란에 묶여있다. 그렇기에 자파르 파나히는 오로지 노트북 화면에 의지한 채 이미지로 존재하는 자신의 영화를 연출해야 한다. 거기다가 이 오프닝은 어떠한 편집도 없이 롱테이크로 촬영되었다. 쇼트 안에서 자파르 파나히의 시선은 영화 속 영화를 촬영하는 카메라의 시선에 종속되어 있고 우리의 시선 역시 <노 베어스>를 촬영하는 카메라에 의해서 제한된다. 이때의 카메라는 영화 안에서 연출자에 의해 영화 속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기체적 지각의 시선이 아니라 연출자에게 시점을 제공하는 유일한 매개체이자 카메라 자신의 육체에 의해 함부로 이동하지 못하는 한계적인 시선이다. 카메라는 자유롭지 않다. 카메라가 자유롭지 않는 한 이를 통해 영화 현장을 바라보는 감독도, 관객인 우리도 자유롭지 않다. <노 베어스>는 시종 이러한 카메라의 한계를 통해 진행된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자파르 파나히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파르 파나히가 보고 듣는 것만을 그의 곁에서 공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노 베어스>는 지속적으로 우리를 난처한 지점으로 이끈다. 허구와 진실 사이. 픽션과 논픽션 사이의 경계. 영화는 그 경계지대에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영화 본인조차 알지 못한다.
<노 베어스>에서 가장 난처한 지점은 어디인가? 자파르 파나히가 극 중에서 연출하는 영화 속 영화는 극영화이다. 하지만 이 극영화는 온전한 허구인가? 혹은 허구의 방법으로 진행되는 다큐멘터리인가? 이 질문은 영화 안에서 영화 속 영화를 연출하는 자파르 파나히에게도 동일하게 제기되는 질문이다. 영화 속 영화를 연출하는 자파르 파나히를 찍는 영화는 극영화인가? 아니면 다큐멘터리인가? <노 베어스>는 분명 극영화의 방법으로 진행되지만 종종 그 안에서 현실의 그림자가 나타나며 영화를 다큐멘터리의 영역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손짓을 한다. 억압의 그림자. 정치의 그림자. 국가의 그림자. 이 그림자는 극영화 안에서 끊임없이 잔존하며 영화를 불투명하고 모호하게 만든다. 그 앞에서 자파르 파나히의 육체는, 영화를 보는 우리는 무기력하다.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고 모호한 장면. 위조 여권을 구한 박티아르와 자라가 유럽으로 떠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그런데 자라가 갑자기 카메라를 바라보며 자파르 파나히에게 박티아르의 여권이 가짜이며 이윽고 모든 것이 가짜라고 항변한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지금 카메라를 보며 감독에게 항의하는 자라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녀가 영화 속 영화의 인물인지,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인지, 아니면 실제 인물 자라인지 확신할 수 없다. 한 화면 위에 수많은 층위가 혼재한다. 스크린 위에서 그녀는 이 모든 것이 가짜이며 자신도 가짜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상한 점은 무엇인가? 박티아르와 자라는 기본적으로 영화 속 영화, 극영화 안의 인물이다. 박티아르와 자라가 극영화 안에서 자신들의 삶을 직접 재현하는 실제 인물이든, 아니면 그들의 삶을 모방하는 배우이든 간에 그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이 가짜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만 영화가 진행된다. 픽션 안에서 재현의 행위를 하는 배우가 돌연 픽션을 거부하고 현실의 영역에 나타나 말을 건다. 그때 노트북 안에서 안전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던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는 무너진다. 그와 동시에 박티아르와 자라의 영화는 픽션과 현실 사이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방황하기 시작한다. 자파르 파나히는 결국 자신의 영화를 통제하는데 실패한다.
이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 대답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영화 현장에 자파르 파나히가 없다. 그는 원격으로나마 현장을 통제했지만 그의 육체는 튀르키예가 아닌 이란에 묶여있다. 현장 바깥에 존재하는 감독에게 자신의 영화는 손에서 벗어난 채 노트북 안에서 이미지로서만 존재한다. 그 이미지가 스크린을 뚫고 나와 자신에게 맹렬하게 질문한다. 자라는 자파르 파나히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해피 엔딩을 만들려고 이런 거잖아요. 어두운 터널의 끝에 빛을 보여주려고요. 암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겠죠.” 이 대사는 무엇보다도 자파르 파나히 자신에게 향하는 질문이다. 박티아르와 자라에게 선사하고자 한 해피 엔딩은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자파르 파나히 자신의 욕망을 영화 속에 투영한 결과이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자파르 파나히는 영화 안에서 이미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 속 영화의 현장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법이라는 초자아를, 국가라는 초자아를 거부하지 못한다. 그는 오로지 테헤란에서 벗어나 영화 현장과 최대한 가까운 시골 마을에 자신의 육체를 위치시키면서 죄의식을 덜고자 한다. 국가에 저항하는 영화와 끝내 국가를 거부하지 못하는 육체. 그때 영화가 저 멀리 떨어진 감독에게 질문한다. “왜 당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내가 대신해야 하나요?” 그때 영화는 현실이 결핍하고 있는 욕망의 대상을 채워주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의 결핍 자체를 직시하도록 하는 거울이 된다. 감독의 손을 떠난 영화는 산산이 부서진다. 자라는 해변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자파르 파나히가 꿈꾸던 해피 엔딩은 사라진다. 감독은 도망치듯이 영화를 끝낸다.
그 사이 마을을 떠나라는 국가의 명령을 들은 자파르 파나히는 곧장 마을을 떠난다. 차를 타고 떠나던 중 자신이 찍었다는 그 사진을 감춰달라고 부탁하던 솔두즈와 고잘이 국경을 넘어가던 중 총에 맞아 죽은 것을 발견한다. 명백하게 자라의 죽음과 동치 되는 죽음. 국가의 명령을 거부한 자들의 죽음. 차이는 무엇인가? 다시 차를 몰고 마을을 빠져나가던 자파르 파나히는 비장한 표정으로 차를 멈춰 세운다. <노 베어스>는 바로 그 순간에 끝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저 멀리 튀르키예에서의 비극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육체가 여기 있는 한, 나는 지금 여기서 일어난 비극을 직시해야 한다. 자파르 파나히는 영화 속 영화에서 경험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다. 감독이 육체를 지니고, 영화가 육체를 가지는 한 영화는 언제나 사건에 대하여 사후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영화의 죽음을 선고하지는 않는다. 육체의 한계를 지니고서라도 사건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 곧 영화의 윤리이다. 내 눈이 보고, 내 귀가 들으며, 내 피부가 느끼는 것. 거기 영화가 있다. 영화는 그렇게 몸과 함께 살아간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역사의 장벽, 불가능의 몽타주
영화의 마지막 장면. 계단을 내려오던 루돌프 회스가 허공에 헛구역질을 한다. 그러다 갑자기 카메라가 있는 어두운 복도를 응시한다. 이어지는 장면. 현대의 아우슈비츠 박물관에서 개장을 앞두고 직원들이 박물관을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20세기로 돌아갔을 때 루돌프 회스는 조용히 복도를 응시하다 다시 갈 길을 가듯이 계단을 내려간다.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루돌프 회스의 헛구역질, 미래를 응시하는 듯한 시선, 하강의 운동. 이들을 이어주는 몽타주라는 충돌의 운동. 여기에는 어떤 교집합이 있고 어떤 의미가 발생하는가? 수많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 몽타주의 무의미함과 불가능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영화 내적으로만 보자면 현대를 응시하는 듯한 루돌프 회스의 시선은 사실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는, 텅 빈 시선에 불과하다. 스크린 바깥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만이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이 시선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 안에 존재하는 루돌프 회스에게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가 영화 안에 존재하는 한, 그는 우리가 보는 것을 볼 수 없고, 따라서 현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 무엇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가? 역사라는 장벽. 루돌프 회스는 조나단 글레이저의 픽션 안에서 창조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수많은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학살한 아우슈비츠의 소장이다. 조나단 글레이저는 이 실존 인물에 어떠한 다른 허구의 서사도 첨가하지 않았다. 루돌프 회스는 영화의 표면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픽션의 인물이 아닌 역사 위에서 명백하게 실존했던 실제 인물이다. 역사가 있는 한, 그는 현대를 볼 수 없다. 역사 앞에서, 영화의 몽타주는 실패한다. 그럼에도 루돌프 회스가 현대의 아우슈비츠를, 자신의 시점에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가능한 유일한 대답.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역사는 이미 발생했고 루돌프 회스는, 그리고 영화는 그 역사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루돌프 회스에게 벌어질 일을 알고 있다. 그의 국가는 패전할 것이고 그는 자신이 악행을 저지르던 아우슈비츠 앞에서 처형당할 것이다. 그것은 바뀌지 않는다. 계단을 다시 내려가는 루돌프 회스의 모습은 역사 안에서 자신이 있어야 하는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운동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원래 자신의 할 일을 하러 갈 뿐이다. 그의 헛구역질도, 그의 응시도, 영화의 몽타주도 무의미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러한 역사의 한계를 직시하는 영화이다.
또 다른 장면. 잠을 자기 위해 집 안의 불을 끄던 루돌프 회스는 자신의 딸 잉에가 잠을 자지 않고 복도에 앉아 문밖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한다. 그녀에게 다가가 뭐 하냐고 묻자 잉에는 설탕을 나눠준다고 대답한다. 루돌프 회스는 조용히 딸을 안고 방으로 데리고 간다. 이어지는 장면. 열화상 카메라로 바뀐 카메라는 어둠 속에서 땅 속에 사과를 꽂아 두는 소녀를 찍는다. 그러는 동안 화면에서는 루돌프 회스가 자신의 두 딸에게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기괴한 장면 위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는 이질적으로 존재한다. 누구든지 이 장면을 보자마자 질문할 것이다. 지금 저기 나오는 소녀는 누구인가?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 설탕을 나눠주고자 하는 소녀. 혹시 저 소녀는 루돌프 회스의 딸 잉에인가? 그렇다면 사과를 꽂는 저 장면은 착취당하는 유대인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품고 있는 잉에의 꿈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 영화 속에서 한없이 잔혹해 보였던 가족 안에서 미약하게나마 희망의 흔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얼마 안 가 그러한 시도를 무산시킨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열화상 카메라 장면. 이전과 유사하게 아버지 루돌프 회스가 창고에 앉아 있는 딸을 안고 방으로 간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과를 남겨두는 소녀가 등장한다.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할 일을 마친 소녀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순간 이 소녀는 잉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면서 그 소녀를 잉에와 동치 시키고자 한 해석은 실패한다. 이 실패는 곧 루돌프 회스 가족 안에 있을지도 모를 타인의 가능성을 찾고자 한 관객의 실패이다. 사과를 남긴 소녀는 루돌프 회스와 마찬가지로 실제 인물인 알렉산드라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한 소녀. 그 소녀를 잉에와 연결하고자 하는 것은 소녀의 저항 정신에 대한 모욕이다. 알렉산드라는 잉에가 아니다. 알렉산드라의 저항은 잉에의 꿈이 아니다. 알렉산드라의 사과는 잉에의 설탕도,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 부스러기도 아니다. 잉에의 세계와 알렉산드라의 세계는 함께 있지만 공존할 수 없다. 두 소녀의 세계는 서로를 알지 못한 채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에서만 존재한다. 두 세계를 교차시키고자 한 영화의 몽타주는 역사 앞에서 다시 실패한다. 조나단 글레이저는 의도적으로 잉에의 세계와 알렉산드라의 세계 사이의 수많은 은유 가능성을 보여주다가 결국 그 은유가 실패하는 것을 보여준다. 불가능의 메타포. 모든 은유 가능성을 차단하는 역사의 장벽. 나는 그 거대한 장벽 앞에서, 영화가 마주하는 한계 앞에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