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빛, 믿는 자의 빛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0. 몹시 개인적인 고백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샤인>이 개봉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한 편으로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안도감이라는 감정. 누군가는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내가 박석영이라는 감독의 이름을 처음 만난 것은 <바람의 언덕>이 개봉했을 때이다. 그때 나는 박석영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고 그의 전작 세 편(<들꽃>, <스틸 플라워>, <재꽃>)을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뒤, 나는 앞으로 극장에서 이 감독의 영화를 계속 만나고 싶었다. 비록 박석영이 한국영화의 새로운 거장은 아닐지라도 분명하게 이 이름은 한국 독립영화에서 주목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재능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바람의 언덕>은 내가 그 해를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한국영화 중 한 편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비평조차 이 영화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비록 일부 비평가들이 <바람의 언덕>을 언급하며 지지해 주었지만 내가 생각하던 평단 전반의 관심과 지지는 없었다. 그때 나는 평단에 화가 난다기보다는 그 현실 자체가 절망스러웠다. 버림받은 재능. 소외당한 이름. 대중의 무관심을 넘은 비평의 무관심이라는 절망. 아마도 독립영화를 사랑하는 시네필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이름을 한 명씩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름. 그래서 나에게 더 소중하고 간절한 이름. 그때 그 감독의 새 영화를 기다리는 것은 한편으로는 기대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다른 거장의 영화를 기다릴 때와는 다른 감정이다. 언제 다시 이 이름을 만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부디 사라지지 않고 만남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간절함. 나는 영화를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독립영화라는 환경 안에서 계속 영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모두가 알 것이다. 나에게는 박석영이 그 이름 중 한 명이다. 이 글은 나의 간절함에 답해준 박석영에 대한 작은 답례이자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샤인>을 전하기 위한 미약한 몸짓이다.
1. 박석영은 언제나 여성의 고통을 찍었다. 더 정확하게는 버려진 여성들의 고통.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성들. 그들의 고통을 찍는 카메라. 그 안에서 박석영은 어떻게 그들의 고통을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 치열하게 질문해 왔다. 보통 박석영의 첫 세 편의 작품을 ‘꽃 삼부작’(<들꽃>, <스틸 플라워>, <재꽃>)으로 지칭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리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오히려 첫 두 편의 영화인 <들꽃>, <스틸 플라워>와 이후 영화인 <재꽃>, <바람의 언덕>, <샤인> 사이의 간극이 더 크게 느껴진다.
먼저 앞의 두 영화. <들꽃>과 <스틸 플라워>는 극도로 불안정한 영화이다. 단순히 서사나 인물만이 아니라 그것을 담아내는 영화의 형식 자체가 불안정한 상태로 지속된다. 핸드 헬드 카메라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쇼트와 쇼트의 연결은 무언가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이것은 기술적 미숙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박석영은 어떤 식으로든 영화 속 인물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고자 노력한다. 불안정한 삶. 방황하고 도망치기를 반복하는 삶. 고통스러운 삶. 그 삶의 심연에 다가가기 위해 영화는 인물과 함께 흔들린다. 그들의 삶이 그러하듯 영화 전체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안에서 박석영은 인물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자 했지만 동시에 그러한 시도는 인물의 고통을 영화의 표면으로 끌어내기 위해 인물을 착취한다는 윤리적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재꽃>은 그러한 윤리적 한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형식적으로도 새로운 시도를 시작하는 작품이다. 여기서부터 박석영은 이전에 사용하던 핸드 헬드 카메라와 쇼트와 쇼트의 거친 연결을 포기하고 고정된(fixed) 카메라와 스테디캠을 사용하며 화면을 안정적으로 연출했다. 형식의 변화와 함께 피사체 역시 변화했다. 앞선 두 작품에서는 사회와 제도로부터 완전히 버려진 여성들의 삶을 따라갔다면 <재꽃>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가족을 다루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서의 가족은 완전한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박석영은 특정한 개인에게 가족이라는 사건이 도래할 때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가족이라는 개념을 상실한, 혹은 박탈당한 이들에게 가족이 나타날 때. 이때 가족은 단순히 혈연관계를 토대로 한 관계가 아니다. 여기서 가족이라는 사건은 인물들에게 아버지라는 자리, 혹은 어머니라는 자리, 더 나아가 아이의 자리에 대해서 질문하도록 할 것이다. 이 질문은 필연적으로 부모의 윤리와 책임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부모로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르게 말하자면 내가 이 아이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 전작에서 박석영이 사회 바깥에서의 삶, 버려진 이들의 삶 자체를 따라갔다면 <재꽃>에서는 그러한 타자가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질문한다. 사건으로서의 타자. 환대라는 문제. 그것은 단순히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뿐만이 아닌 사회 전체, 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마주해야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명백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재꽃>을 이후의 작품들(<바람의 언덕>, <샤인>)이 아닌 앞선 두 작품(<들꽃>, <스틸 플라워>)과 엮어서 사유할 수 있게 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꽃 삼부작에서 영화의 중심이 되는 것은 결국 소외된 이들, 버려진 이들이다.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인물들이 어딘가로부터 도망치거나 떠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영화의 끝에 가서도 그들은 세계 안에 환대받지 못한 채 남아있다. <바람의 언덕>과 <샤인>에서의 인물들은 비록 각자의 고통을 지니고 있지만 세계 안에서 충만하게 존재하는 인물들이다. 꽃 삼부작의 인물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 그들은 언제나 소외된 채 살아간다. 또 하나의 차이. 세 편의 영화를 삼부작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존재는 정하담이라는 배우의 존재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배우가 작품 안에서 드러내는 고유한 아우라가 아니라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의 횡단성에 있다. <들꽃>에서의 정하담. <스틸 플라워>에서의 정하담. <재꽃>에서의 정하담. 세 영화에서 그녀가 연기한 인물의 배역은 모두 그녀의 본명인 ‘하담’이다. 박석영은 의도적으로 ‘하담’이라는 영화 속 인물에게서 정하담이라는 배우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그럴 때 우리는 세 편의 영화에서 ‘하담’이라는 인물을 넘어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 정하담을 볼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때의 배우는 산업의 논리 안에서 발생한 스타가 아니다. 여기서의 배우는 자신이 연기한 인물에 대한 기억을 자신의 육체에 보존한 채 영화와 영화 사이를 횡단하는 영화적 기억의 담지자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러한 시도를 보고 난 후 잉마르 베리만을 떠올렸을 것이다. <수치>와 <안나의 열정> 사이, 혹은 <결혼의 풍경>과 <사라방드> 사이를 횡단하는 배우의 육체. 거기다 <안나의 열정>과 <사라방드>에서 잉마르 베리만은 제4의 벽을 허물면서 배우 본인을 영화 전면에 드러낸다. 하지만 이 작품들에서 잉마르 베리만이 메타적인 층위에서 배우를 드러내며 배우 자신이 전작을 바라보게끔 만든다면 박석영은 배우를 통해 영화를 보는 우리가 전작을 떠올리도록 한다. 우리는 세 편의 영화를 차례로 보면서 <스틸 플라워>에서의 하담이 <들꽃>에서의 하담을 소환하고, <재꽃>에서의 하담이 <스틸 플라워>에서의 하담을 호명하는 것을 보게 된다. 가장 완벽한 예시. <재꽃>에서 하담은 <스틸 플라워>에서 자신의 전재산을 바쳐 산 댄스 슈즈를 해별에게 선물한다. 영화 어디에도 하담이 춤을 배운다는 이야기는 없다. 이 댄스 슈즈는 명백하게 현재의 영화 안에서 잔존하는 전작의 흔적을 드러내는 표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영화 속 인물인 하담이 아닌 그 인물 자체를 연기하는 정하담이라는 배우를 마주하게 된다. 배우 정하담은 그 모든 인물을 담지한 채 영화 사이를 횡단하며 존재하고 동시에 세 편의 영화를 하나로 이어주는 존재가 된다.
<들꽃>에서의 하담. 영화에서 하담은 가장 연약한 존재 중 하나이다. 그런 하담을 수향과 은수가 구해주면서 하나의 작은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 공동체가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하담은 자기 스스로를 희생하여 공동체를 지키고자 한다. <스틸 플라워>에서의 하담. <들꽃>에서와 달리 그녀는 완벽하게 고립된 존재이다. 그녀를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일거리를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매지만 그저 버려지기를 반복할 뿐이다. 마침내 세계 안으로 정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도달하지만 결국 또다시 버려지면서 완벽하게 세계로부터 고립된다. 완전한 고립. 세계 바깥으로 밀려나는 타자. <들꽃>에서와 달리 <스틸 플라워>에서는 하담을 지켜줄 최소한의 공동체와 연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재꽃>에서의 하담. 앞선 두 편의 영화와 달리 하담은 불완전하지만 안정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노동을 찾아 헤매는 다른 하담과 달리 여기서의 하담은 이미 안정적으로 노동을 하며 지낸다. 그 하담에게 해별이라는 타자가 찾아와 자신을 공동체에 받아줄 것을 요청한다. 이때부터 해별의 요청은 하담의 의무가 된다. 그리고 하담은 그 의무를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끝내 어른들의 세계 바깥으로 밀려나는 해별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인물은 하담이 유일하다. 어른들이 포기한 의무를 짊어지는 소녀. <재꽃>의 마지막 장면은 해별과 하담이 마을 바깥으로 떠나는 장면이다. 누구든지 이 장면을 보면서 하담의 성장을 보았을 것이다. <들꽃>과 <스틸 플라워>를 거쳐 <재꽃>의 하담으로. 가장 연약하고 고립된 존재였던 소녀는 이제 자신보다 더 연약한 존재를 지켜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그것은 곧 하담을 연기하는 배우 정하담의 성장이기도 할 것이다. 꽃 삼부작은 바로 이러한 정하담의 성장을 담기 위한 연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재꽃> 이후 박석영은 더 이상 정하담과 영화를 찍지 않았다. 물론 이 결정에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를 말할 수 있다. 박석영은 이제 정하담을 놓아줄 수 있다. 더 이상 연약한 소녀가 아닌 한 명의 어른이기에. 바로 그런 관점에서 <샤인>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작들과 맺는 관계, 그리고 그 사이를 횡단하는 배우들에 대해서 필연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2. <샤인>의 첫 장면은 정은경과 장선의 대화로 시작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이들이 맡은 배역이 아닌 배우의 이름을 언급했다. <바람의 언덕>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장면을 보자마자 아직 영화 속 배역의 이름으로 호명되지 않은 배우의 존재 자체를 보았을 것이다. 전작인 <바람의 언덕>에서 정은경과 장선은 모녀 관계를 연기하였다. 자신이 버린 딸과 재회하는 어머니.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던 어머니를 마주하는 딸. 가족이라는 사건의 도래. 물론 <바람의 언덕>은 가족의 재결합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연설하는 관습적인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박석영은 가족이라는 사건을 통해 주체로서 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어머니와 딸이 눈이 녹은 언덕에 함께 앉아 있다. 이때 프레임에 담긴 두 인물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모녀가 아니라 각자의 삶을 오롯이 견뎌내며 살아가야 하는, 연약하지만 온전한 주체의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그럴 때 두 인물은 비로소 과거와 작별하고 새로운 삶을 위한 성장을 마친다.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 인물들, 그 인물들의 기억을 가진 배우들을 통해 박석영은 <샤인>을 시작한다. <바람의 언덕>에서 모녀를 연기한 두 배우는 이제 한 소녀를 곁에서 지켜주는 수녀를 연기한다. 물론 두 배우가 연기하는 라파엘라 수녀와 스텔라 수녀는 다른 인물이다. 라파엘라 수녀에 비해 경험과 연륜이 많아 보이는 스텔라 수녀는 라파엘라 수녀의 정신적 어머니와 같은 인물이다. 전작에서 생물학적 모녀 관계였던 두 배우는 유사 모녀 관계로 넘어간다. 여기서 스텔라 수녀를 연기하는 정은경은 <바람의 언덕>에서의 영분보다 오히려 <재꽃>에서의 삼순에 가까워 보인다. <재꽃>에서의 삼순은 다른 모든 인물들의 결함과 죄를 수용하고 포용하는 윤리적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라파엘라 수녀는 그러한 어머니인 스텔라 수녀의 손에서 자라난 딸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첫 번째 쇼트. 스텔라 수녀가 화분 속에 피어난 꽃을 바라보며 말한다. “아니 이렇게 추운데, 너희들은 어떻게 이렇게 이쁘니?” 여기서 카메라의 시선은 화분을 바라보는 스텔라 수녀의 시점 쇼트이지만 동시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 쇼트이다. 그래서인지 이 쇼트는 명백히 인물의 주관적 시점 쇼트이지만 무언가 신적인 시선을 동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스텔라 수녀는 신이 아니다. 하지만 신의 시점과 인간의 시점이 합쳐진 듯한 쇼트, 거기다 수녀라는 자리는 그녀의 시선이 마치 성모 마리아의 시선처럼 느껴지도록 한다. 예수를 잉태한 성모.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온 메시아의 어머니. 이때 마리아는 인간과의 성적인 결합을 통해 예수를 잉태한 것이 아니기에 생물학적으로는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계시를 받아들이기에 윤리적 차원에서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예수가 자신이 짓지 않을 죄를 홀로 감당하듯이 마리아 역시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수용한다. 그러한 마리아의 시선을 체화한 스텔라 수녀. <샤인>은 그러한 어머니의 시선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 텅 빈 운동장에 예선이 뛰어들어온다. 그러고는 운동장을 말없이 뛰면서 돈다. 이때 카메라는 고정된 상태로 운동장을 도는 예선을 조용히 지켜본다. 얼핏 보았을 때 이 쇼트는 객관적 시선의 쇼트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음 쇼트에서 예선을 바라보는 다희가 나타난다. 그러면서 이전의 쇼트는 다희의 주관적 시점 쇼트로 전환된다. 다희는 예선이 지쳐서 멈출 때까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한다. 여기서 객관적 시선을 주관적 시점으로 체화하는 다희의 시점 쇼트는 스텔라 수녀의 시점 쇼트와 마찬가지로 신적인 시선을 동반하는 것만 같다. 달리 말해 다희는 어머니의 시선으로 예선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때 어머니가 하는 일은 그저 아이를 지켜보는 것이다. 스텔라 수녀가 추운 겨울을 버티는 꽃을 바라보기만 하듯이, 운동장을 뛰는 예선을 다희가 멀리서 보기만 하듯이, 어머니는 아이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신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은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 시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다. 신을 향한 인간의 믿음이 아닌, 인간을 향한 신의 믿음. 그것은 곧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믿음이 되고, 인물에 대한 영화의 믿음이 된다. <샤인>은 그러한 믿음 위에서 만들어진 영화이다.
한 가지 더. 박석영의 필모그래피를 성실하게 따라온 사람이라면 예선이 운동장을 뛰는 장면을 보자마자 <재꽃>을 떠올렸을 것이다. 해별이 아버지와 함께 학교를 찾아간 장면. 그 장면에서 해별의 아버지는 학교 안으로 들어가고 해별은 학교 축구장 위에서 원을 그리며 뛴다. 영화 안에서 이 운동이 특별히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 운동은 해별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느끼기 위해 행하는 움직임처럼 보인다. 그렇게 축구장 위를 뛰던 해별은 이제 중학생이 되어 텅 빈 운동장을 다시 한번 뛰어 돈다. 물론 이 운동의 연쇄가 가능한 것은 두 인물을 연기한 장해금이라는 배우의 육체성에 있다. 박석영은 의도적으로 배우의 육체에 내재된 영화적 기억을 소환하여 우리로 하여금 전작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끔 만든다. <재꽃>에서 장해금이 연기한 해별은 가족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아이였다. 보호받아야 하는 아이. 그녀가 찾아온 이상 누군가는 그녀의 보호자가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샤인>에서 예선은 더 이상 보호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의 보호자였던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이제 그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런 예선에게 다희가 다가와 말한다. “너 뛰는 거 싫어하잖아.” 예선의 대답. “졸업하잖아.” 이 졸업은 학교에 대한 졸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장해금에게 있어 해별을 졸업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선의 성인식. 그래서인지 운동장을 뛰는 예선의 모습은 자신의 육체에 남아있는 해별에 대한 기억을 떨쳐내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물론 예선의 삶이 완전히 고립된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는 다희를 비롯한 친구들이 있고 무엇보다 그녀의 또 다른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스텔라 수녀가 있다. 예선을 만나기 위해 스텔라 수녀와 라파엘라 수녀는 항상 예선을 만나던 오름 위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예선은 언덕길 위에서 스텔라 수녀에게 만남을 미루고 싶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려다가 지운다. <바람의 언덕>을 본 사람이라면 이 오름이 <바람의 언덕>에서의 바람의 언덕과 유사한 장소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실존의 충만함으로 가득한 장소. 정은경과 장선의 장소에 장해금이 초대된다. 그러나 예선은 그 만남을 망설인다. 여기서 그 이유를 따지는 것은 논점을 벗어난 것이다. 핵심은 예선이 유예하고자 했던 만남을 라파엘라 수녀가 성사시켰다는 것이다. 예선과 만나기로 했던 오름에서 스텔라 수녀는 피곤함에 지쳐 앉아있고 예선은 길에서 꽃을 보던 중 그대로 잠에 든다. 그 사이 길을 걷던 라파엘라 수녀가 예선을 발견하여 스텔라 수녀에게 데려간다. 다시 말해 실패할 뻔했던 만남을 성사시킨 것은 라파엘라 수녀의 운동성에 있다. 지리적으로만 보면 스텔라 수녀와 예선은 분명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박석영은 이 공간을 파편화하여 둘 사이에 거리감을 조성한다. 그렇게 멀어진 두 세계를 라파엘라 수녀가 하나로 합친다. 쇼트가 인물들을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쇼트를 합치는 운동. 예선과 라파엘라 수녀는 이 만남을 통해 서로를 처음 알게 된다. 이 만남이 가능한 것은 물론 스텔라 수녀라는 같은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스텔라 수녀는 예선과의 만남에서 라파엘라 수녀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두 인물을 연결한다. 마치 어머니가 더 이상 없는 삶을 대비하듯이.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 없는 삶을 준비하듯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함께 살아가는 딸들의 내일을 희망하는 어머니.
스텔라 수녀와의 만남을 가진 후 돌아온 집에는 다희와 서우, 동석이 놀고 있다. 좁은 집이지만 이들의 존재만으로도 프레임 안에는 인물들의 활력이 느껴진다. 그 자리에 예선이 들어온다. 서우와 동석은 예선에게 졸업 기념 선물이라며 돈봉투를 건넨다. 누구든지 이 돈이 할머니를 여읜 예선을 향한 연민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자 예선이 서우와 동석을 집에서 내쫓는다. 예선은 연민의 손길을 거부한다. 이 장면에서 박석영은 컷을 나누지 않고 고정된 카메라를 통해 원 테이크로 촬영하였다. 서우와 동석이 가고 난 뒤 영화는 갑자기 낮에서 밤으로 시간을 건너뛴다. 방 안에는 책상 위 스탠드 불빛만이 어둠을 간신히 밝히고 있다. 시간이 꽤 많이 흘렀지만 예선과 다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다. 이후 예선과 다희의 대화가 이어진다. 낮 장면과 달리 이 대화 장면은 몽타주 되어 진행된다. 예선과 다희는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각자의 쇼트 안에서만 존재하고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하지 못한다. 각자의 세계. 서로가 침범할 수 없는 세계. 둘은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다. 다희가 예선에게 묻는다. “넌 왜 말을 안 해?” 다희는 예전처럼 예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그 이야기 안에는 물론 예선의 고통 역시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예선은 자신의 고통을 나눌 생각이 없다. 예선은 자신의 고통을 홀로 견디고자 한다. 그러니 할머니의 상실이라는 거대한 고통을 겪은 이후의 예선은 이전과 같아질 수 없다. 예선과의 간극을 마주한 후 다희는 집을 떠난다.
홀로 남은 예선은 갑자기 라파엘라 수녀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을 때 라파엘라 수녀는 성당 문 앞에서 쪼그린 채 앉아있다. 라파엘라 수녀가 처음 예선을 만났을 때 예선의 자세. 어째서인지 이 자세는 고통을 견디고 있는 자세처럼 보인다. 거기다가 성당에서 비춰오는 불빛은 예선의 집과 마찬가지로 라파엘라 수녀의 주위를 감싼 어둠을 간신히 밝힌다. 그녀는 왜 성당을 앞에 두고도 안에 들어가지 않은 것일까? 혹시 그녀는 예선의 전화가 오기를 하루 종일 기다린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라파엘라 수녀는 예선의 전화를 받아야만 자신이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선이 라파엘라 수녀에게 전화를 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믿음을 준다는 것이고 그러한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예선의 고통을 함께 견디는 것이 가능해진다.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고통받았듯이, 예선의 고통을 함께 견디고자 하는 라파엘라 수녀. 달리 말하자면 라파엘라 수녀는 홀로 구원받을 생각이 없다. 그녀는 반드시 예선과 함께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선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고통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예선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만이 요구된다. 내가 믿음을 주는 대상이 나에게 믿음을 돌려줄 것이라는 믿음. 예선은 그 믿음에 응답한다. 예선이 라파엘라 수녀에게 묻는다. “저 혹시, 저희 할머니 돌아가실 때 남기신 말씀 없으세요?” 라파엘라 수녀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고는 그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상황을 무마한다. 그렇게 둘의 대화는 끝난다. 하지만 곧 라파엘라 수녀가 다시 예선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예선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했다는 말을 전해준다. “재밌으셨대. 예선이랑 같이 사는 게 재밌으셨대. 그리고 밝고 환하게 친구들하고 잘 지낼 수 있게 기도해 달라고, 수녀님한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우리는 이 말이 라파엘라 수녀가 지어낸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선의 할머니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은 살려달라는 고통의 몸부림이었다. 예선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예선은 라파엘라 수녀의 거짓말을 받아들인다. 더 정확하게, 예선은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라파엘라 수녀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비록 말의 내용은 거짓일지라도, 그것을 전하는 자의 마음은 진실될 수 있다. 그것이 믿음이다. 이 말을 전하고 나서야 라파엘라 수녀는 전화를 끊는다. 다르게 표현하면 라파엘라 수녀는 그제서야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전화를 끊은 뒤 예선은 집을 나와 다희에게 달려간다. 예선 역시 라파엘라 수녀에게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에야 다희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다음 쇼트. 다희는 프레임 끝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이윽고 예선이 달려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가로등 불빛이 어두운 밤 아래에 선 두 소녀를 밝혀주고 있다. 후경에서는 붉은빛의 십자가가 소녀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명백하게 신의 시점 쇼트. 다희는 예선에게 다가와 말없이 그녀를 안아준다. 여기에는 어떠한 말도 필요 없다. 예선은 자신의 고통을 다희에게 아무 말없이 전한다. 그 모습을 하나님이, 그리고 영화가 지켜본다. 예선과 다희가 서로를 믿는 것처럼, 하나님과 영화는 소녀들을 믿는다. 그리고 다음 장면. 성당으로 들어온 라파엘라 수녀는 촛불을 켜고 잘 준비를 한다. 그때 예선에게서 다시 전화가 온다. 이전과 달리 매우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예선. 곧이어 자신의 곁에 있는 다희를 소개한다. 라파엘라 수녀가 예선과 전화를 한 뒤에야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을 상기하자. 그랬을 때 성당 안으로 들어온 라파엘라 수녀에게 다희를 소개하는 것은 예선이 다희를 구원의 공간으로 함께 데려온 것이다. 라파엘라 수녀가 예선을 데려왔듯이, 예선은 다희를 데려온다. 전화를 끊은 뒤 라파엘라 수녀는 십자가 옆에서 빛나고 있는 촛불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리고 화면에 뜨는 오프닝 타이틀. 프롤로그에서 이미 하나의 서사가 끝났다. 완결된 세계. 하지만 박석영은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처럼 또 다른 서사를 시작한다. 완전무결하게 보이는 세계에 곧 균열이 가해질 것이다. 사건의 도래. 새로운 질문의 시작.
3. 영화 속 예선의 세계는 그 자체로 충만하게 보인다. 비록 할머니와 이별했지만 그녀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은 그녀의 세계를 외롭지 않게 해 준다. 특히 프롤로그 이후 예선이 다른 인물들과 함께 있을 때는 인물들의 활력이 쇼트를 가득 채운다. 스텔라 수녀와 라파엘라 수녀, 서우와 동석, 그리고 다희의 존재는 예선의 세계를 충만하게 만들어 준다. 박석영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세계. 언제나 고립되고 외로운 존재의 세계를 그려냈던 박석영의 영화에서 가장 충만한 세계. 이 세계에 새별이 찾아온다. 타자의 방문. 분명 이 방문은 <재꽃>에서 해별의 방문을 떠올리게 만든다. 차이는 무엇인가? <재꽃>에서 해별은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공동체에 스스로 찾아온다. 하지만 <샤인>에서 해별은 예선의 세계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 우연히 들어온다.
새별이 예선에게 찾아오는 과정의 따라가 보자. 새별이 성당에서 홀로 나온다. 해변까지 걸어온 뒤에 사진사의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의자에 자신의 그림을 남겨둔 뒤 다시 걸어가다가 이전에 우리가 보았던 할머니를 만나고 이 할머니를 따라 예선의 집으로 온다. 할머니는 자신이 할 일을 마쳤다는 듯이 집을 나온다. 이 신비로운 장면. 마치 영화 바깥에서 새별이 예선을 찾아오는 듯한 장면. 이 장면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무엇인가? 새별은 노인의 흔적이 담긴 길을 경유하여 노인과 함께 예선의 세계에 들어온다. 사진사의 의자. 할머니와의 동행. <샤인>에서 노인은 서사의 중심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영화 안에서 존재하긴 하지만 예선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중심 서사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한 마디로 그들은 영화에서 잉여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하지만 박석영은 새별이라는 영화에서의 가장 큰 사건의 도래를 노인들의 손에 맡겼다. 가장 잉여로운 자들이 만들어낸 가장 거대한 사건. 마치 이들을 경유해야만 새별이 예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장면.
왜 새별은 노인을 경유해야 하는가? 영화에서 노인들이 잉여로운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의 곁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사는 분명 해변에 의자를 설치했지만 정작 새별이 도착했을 때는 쇼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새별을 데려다준 할머니는 치매로 인해 자신의 딸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 노인들은 죽음의 세계에 발을 걸친 유령적인 인물들로 보인다. 예선의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물. 달리 말하자면 노인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있던 예선과 새별을 이어주는 존재이다. 이때 노인의 유령적 성격은 완전해 보이는 예선의 세계 안에 소외된 인물인 새별이 찾아오게 하면서 균열을 일으킴과 동시에 죽음의 세계에 가까이 다가선 새별을 예선의 세계로 인도해 삶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한다. 어머니로부터 버려진 존재인 새별은 그 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이 있는 인물이다. <들꽃>과 <스틸 플라워>에서 박석영은 그런 버려진 존재들이 살아가야 하는 어둡고 폭력적인 세계를 그려냈다. 죽음과 폭력의 위협이 도사린 세계. 생존을 위해 매일 몸부림쳐야만 하는 세계.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노인들이 막아준다. 그리고 새별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온전한 세계로 소녀를 안내한다. 그러면서 노인들 자신은 그 세계로 들어가지 않는다. 거기에 노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노인들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그 세계를 나온다.
밤이 되고 집에 돌아온 예선과 다희는 새별과 만난다. 세 소녀는 처음 만났지만 아무 위화감 없이 어울려 논다. 여기서 예선을 연기하는 배우가 장해금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 보자. 장해금의 시선에서 새별은 자신이 과거에 연기했던 해별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부모에게서 버려진 아이. 가족의 일원이 되기 위해 찾아온 존재. <재꽃>에서 해별은 끝내 어른들의 세계에서 밀려나지만 그의 윤리적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하담은 끝까지 그녀의 곁을 지켜준다. 이제 장해금은 해별이 아닌 하담의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 하담의 자리에서 하담이 했던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새별은 해별이 아니다. 둘 사이의 차이를 계속해서 떠올려야 한다. 해별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하담의 공동체에 스스로 찾아오지만 새별은 할머니의 안내를 받아 예선에게 도착한다. 또 다른 차이. 해별은 자신을 보호해 줄 어른의 존재를 끊임없이 요청하지만 새별은 그런 어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새별은 영화에서 한 번도 엄마의 존재를 찾거나 엄마를 떠올리며 울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 새별이 성당에서 나와 예선의 집까지 가는 과정에는 아이의 소박하지만 충만한 발걸음이 느껴지고 버려진 존재라기보다는 스스로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여행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선과의 첫 만남에서 다희가 엄마에 대해서 묻자 새별은 그저 “없어”라고 무심하게 말한다. 6살 소녀는 벌써부터 어머니의 부재를 인정한다. 어떤 의미에서 새별은 영화에서 가장 온전하고 성숙한 인물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새별은 예선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별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예선이다. 다시 반복. 예선을 연기하는 장해금에게 있어 새별은 자신이 과거에 연기한 해별의 귀환이다. 이제 장해금은 보호받아야 할 아이를 졸업하여 누군가를 보호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기회. 하지만 새별은 해별이 아닌 것처럼 예선은 하담이 아니다. 둘은 같은 윤리적 어머니의 자리에 있지만 서로 다른 질문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 하담과 예선을 다르게 하는가? 나는 단지 개별적인 두 작품에서 감독이 보이는 태도의 차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그 차이를 발생시키는 원인과 그 원인을 영화 안에서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 <재꽃>과 <샤인> 사이에는 <바람의 언덕>이 자리 잡고 있다. <바람의 언덕>은 박석영이 꽃 삼부작을 졸업하고 다시 시작한 영화이다. 두 번째 시작. 이 영화에서 정은경과 장선은 생물학적 모녀 관계를 넘어 믿음의 관계로 도약한다. 정은경은 생물학적 어머니로서 딸을 찾아가지만 결국 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딸의 곁을 떠난다. 그것은 자신의 삶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연약한 존재의 결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딸이 온전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한 결정이기도 하다. 딸인 장선 역시 함께 그 믿음을 가진다. 영화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그러한 믿음에 기반하였기에 나올 수 있는 장면이다. <재꽃>에서의 하담이 해별의 보호자가 될 때 영화가 끝난다면 <바람의 언덕>은 그러한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를 넘어 서로 간의 절대적인 믿음이 담보될 때 영화가 끝난다. 그 <바람의 언덕>을 함께한 두 배우, 정은경과 장선이 <샤인>에 있다. 다시 말해 전작의 흔적이 영화 안에 내재되어 있고 그것을 감독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재꽃>에서의 정하담이 <들꽃>과 <스틸 플라워>를 담지하듯이, 정은경과 장선은 <샤인> 안에서 <바람의 언덕>에 대한 영화적 기억을 담지한다. 이 결정을 한 이상 박석영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샤인>이 <바람의 언덕>을 내재하는 한, 영화는 <재꽃>이 될 수 없고, 예선은 하담이 될 수 없다. 예선은 새별에게 있어 전혀 다른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4. 영화에서 가장 미스터리하고 동시에 신비로운 인물은 사진사과 그의 딸이다. 두 인물은 영화의 중심에 전혀 머물지 못하고 가장 잉여로운, 그러나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낸다. 돌담길 앞에서 사진사는 자신의 딸 효정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지 않자 음성메시지를 남긴다. 다음 장면. 혜정이 해변에 앉아 파도를 맞고 있다. 이 인물이 새별의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이후의 일이다. 혜정은 예선이 라파엘라 수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쪼그린 채 앉아있다. 같은 해변에는 사진사의 딸 효정이 함께 있다. 그녀는 휴대폰으로 아버지의 음성메시지를 듣는다. 다음 쇼트. 화면 전경에는 효정이 여행 가방 위에 앉아있고 후경에서는 혜정이 쪼그려 앉은 채 파도를 맞는 모습이 한 프레임 안에 잡힌다. 효정은 곧장 가방을 끌고 프레임 바깥으로 나간다. 혜정만이 프레임 안에 외롭게 남아있다. 다음 장면.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시간에 사진사는 의자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화면 오른쪽에서 효정이 들어온다. 그녀는 곧장 아버지에게 다가가지 않고 여행 가방에 앉아 아버지를 지켜본다. 아버지의 노래를 듣다가 천천히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간다. 부녀는 말없이 재회를 맞이한다. 그리고 딸과 아버지는 서로의 사진을 찍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이 모습을 혜정이 조용히 응시한다. 이 부녀와 프레임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인물은 혜정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이 부녀는 혜정이 보는 환상일까? 이 장면에서 핵심은 이 부녀가 영화 속에서 실제 인물인지 아니면 유령인지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존재를 박석영이 유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중심에 머물지 못하는 자들. 새별이 유령적인 인물인 할머니의 안내를 받아 예선의 집에 도착하듯이 혜정은 또 다른 유령적인 인물들인 부녀를 영화에서 홀로 마주한다.
그때 그녀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부녀의 충만한 세계. 하나의 가능성. 어떤 가능성? 자신이 버린 딸과 재회할 수 있는 가능성. 재회 이후에도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박석영은 부녀의 모습을 통해 새별의 엄마와 새별에게 남아있는 가능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부녀는 새별을 예선에게 안내한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세계 바깥으로 밀려나는 혜정을 다시 세계로 돌려보낸다. 그것은 유령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이때 혜정이 예선과 마찬가지로 쪼그려 앉은 자세를 취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쪼그린 채 앉아있던 예선은 라파엘라 수녀가 발견했지만 혜정은 누구도 발견하지 않는다. 예선은 라파엘라 수녀에 의해 구원받지만 혜정은 누구도 구원해 줄 수 없다. 그렇기에 박석영은 그것을 부녀에게, 유령에게 맡긴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완전해 보이는 세계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것. 고립된 자들에게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박석영은 그렇게 세계의 안과 밖을 연결한다.
혜정은 다시 자신의 딸을 찾기 위해 성당으로 온다. 그녀는 예선처럼 성당 앞에서 쪼그려 앉아있다. 그런 그녀를 라파엘라 수녀가 발견한다. 둘의 만남을 카메라는 성당 안쪽에서 바라본다. 라파엘라 수녀가 예선의 전화를 받을 때와 달리 지금은 한낮이다. 성당 바깥은 햇빛으로 환하지만 성당 안쪽은 어둡다. 닫혀있는 문 앞에서 예선과 통화하던 라파엘라 수녀와 달리 혜정은 성당의 문이 열려있음에도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죄인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라파엘라 수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새별의 엄마. 이윽고 그녀가 질문을 던진다. “저 지옥에 가죠?” 질문의 다른 판본. “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예선의 질문에는 거짓말을 통해서라도 대답을 한 라파엘라 수녀이지만 이 질문에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다. 여기서 충만하게 보이던 예선의 세계를 지탱하는 거짓이 드러난다. 예선의 세계는 두 개의 큰 거짓말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하나는 라파엘라 수녀가 예선에게 전한 할머니의 거짓 유언이고 다른 하나는 다희가 스텔라 수녀와 라파엘라 수녀에게 말한 거짓말이다. 다희는 새별과 예선이 함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두 수녀에게 새별을 삼촌이 맡기고 간 예선의 사촌동생이라고 말한다. 이 거짓말은 예선의 세계를 더 충만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혜정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별을 엄마의 품에 돌려보내는 것뿐이다. 그렇게 된다면 예선의 세계는 무너질 것이다. 어머니의 자리에 가고자 하는 예선의 욕망 역시 실패한다. 두 명의 어머니. 한쪽은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딸을 필요로 하고 다른 한쪽은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딸을 다시 찾는다. 새별은 반드시 한 어머니에게로 가야만 한다.
새별의 진실을 알게 된 라파엘라 수녀에게 스텔라 수녀가 온다. 그녀는 이미 새별이 예선의 사촌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텔라 수녀는 새별과의 작별을 예선에게 알려주는 일을 라파엘라 수녀에게 맡긴다. 라파엘라 수녀가 이를 스텔라 수녀에게 부탁하자 스텔라 수녀는 단호히 말한다.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말해줘야지.” 그럼 더 힘들어할 것이라는 대답에 다시 한번 스텔라 수녀가 말한다. “그럼 또 돌봐주면 되지.” 여기서 스텔라 수녀는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윤리적 딸인 라파엘라 수녀에게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바람의 언덕>에서 자신의 딸 장선에게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을 요구했던 정은경은 이제 어머니로서의 삶을 요구한다. 무거워진 책임. 그것을 자신의 딸이 기꺼이 짊어지기를 바라는 어머니.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딸의 모든 고통과 죄를 책임진다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진정한 의무는 딸로 하여금 그러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로서 성장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스텔라 수녀와 라파엘라 수녀가 모두 겪어야 하는 성장이다.
스텔라 수녀는 새별이 예선의 사촌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미카엘 신부와 대화를 나눈다. 이 대화에서 미카엘 신부는 스텔라 수녀에게 이런 말을 한다. “스텔라 수녀님, 수녀님이 다 하면 하나님은 할 일이 없어.” 이 말은 단순히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내려놓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미카엘 신부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떤 어머니일지라도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할 수는 없다. 어느 순간이 되면 어머니는 딸을 자신의 품에서 놓아주어야 한다. 그때 어머니에게는 오로지 믿음만이 요구된다. 딸을 향한 믿음. 딸의 곁을 언제나 지켜줄 하나님에 대한 믿음. 스텔라 수녀는 라파엘라 수녀와 대화를 나눈 후 다시 한번 미카엘 신부와 대화를 한다. 여기서 스텔라 수녀는 어제 새벽 성당에 들어온 참새가 창문에 부딪혀 죽은 이야기를 한다. 물론 여기서의 참새는 메타포가 아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스텔라 수녀가 자신의 죄의식을 고백한다는 것에 있다. 참새를 구하지 못한 죄의식. 그것은 곧 어머니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에 대한 죄의식이다. 그러자 미카엘 신부는 자신이 그 참새를 봤으며 살아서 다시 날아갔다고 말한다. 여기서 미카엘 신부의 이야기가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카엘 신부는 스텔라 수녀에게 절대적인 믿음만을 다시 한번 요구한다. 참새는 분명 살아서 돌아갔을 것이다. 예선이 새별이 없더라도 잘 살아갈 것이다. 라파엘라 수녀는 예선을 잘 돌봐줄 것이다. 믿음의 연쇄. 모든 여성들은 그렇게 신 앞에서 어머니이자 딸이 된다. 이제 예선이 새별의 어머니가 될 차례이다.
5. 예선이 한밤 중에 친구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더니 서우와 동석에게 갑자기 돈을 달라고 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새별에게 작별 선물을 사주기 위함이지만 누구든지 그 말의 이면을 보았을 것이다. 예선은 새별과 함께 도망칠 계획을 하는 것이다. 서우와 동석은 이 요구를 거절한다. 우리는 프롤로그에서 서우와 동석이 예선에게 돈을 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예선이 거절했지만 이번에는 서우와 동석이 거절한다. 이 거래에서 돈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서우와 동석은 자신들의 돈이 새별에게 향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은 새별과 함께 노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지만 새별의 삶을 책임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은 우정의 관계는 맺을 줄 알지만 어머니의 자리에 대해서는 아직 무지하다. 어머니의 윤리를 함께 나누어 책임지고자 한 예선의 시도는 실패한다.
집으로 돌아온 예선은 새별을 등에 업고 바깥으로 나간다. 도망치기 위한 몸부림. 하담이 되고자 하는 장해금의 몸부림. 어른들의 세계 바깥으로 밀려난 자신을 구해준 하담처럼 새별의 보호자가 되기를 원하는 장해금. 하지만 이제 장해금은 어른들의 세계를 믿어야 한다. 어두운 길을 걸어가던 예선은 전봇대 빛 아래에서 멈춘다. 빛이 그녀를 멈춰 세운다. 프롤로그에서 예선은 전봇대 빛 아래에서 다희의 품에 안겼다. 그때 다희는 예선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 모습을 붉은 십자가의 표상을 한 하나님이 지켜보았다. 그러나 지금 예선은 새별에게 있어 그런 어머니가 될 수 없다. 예선은 그 빛 아래에서 자신의 불가능을 마주한다. 그런 예선을 담아내는 화면 어디에도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다. 그 길은 신이 예비한 길이 아니다. 예선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날이 밝았다. 스텔라 수녀는 혜정과 함께 새별을 기다린다. 정은경은 혜정의 죄를 문책하는 대신 <재꽃>에서의 삼순처럼 그녀의 죄를 용서하고 포용해 준다. 혜정은 그렇게 스텔라 수녀의 또 다른 딸이 된다. 딸에게 믿음을 주는 어머니. 그 사이 라파엘라 수녀는 새별을 데리고 혜정에게로 간다. 새별은 예선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자 하지만 예선은 대답하지 않는다. 두 소녀는 그렇게 작별한다. 그리고 새별은 엄마의 품으로 돌아간다. 박석영은 이 순간을 멀리서, 원 테이크로 담아낸다. 프레임 왼쪽에서 새별과 라파엘라 수녀가 걸어온다. 스텔라 수녀가 새별을 혜정에게 데려다준다. 모녀는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고 프레임 오른쪽으로 빠져나가고 라파엘라 수녀도 프레임 왼쪽으로 빠져나간다. 스텔라 수녀만이 화면 중앙에 남아 프레임 바깥의 새별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 장면에는 어떠한 상투적인 감동이나 감상주의도 없다. 박석영은 이 순간이 전혀 감동스러운 순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라파엘라 수녀는 새별이 없는 예선의 세계가 얼마나 공허한지 알고 있다. 새별은 자신을 버린 엄마와 다시 살아가야 한다. 혜정은 자신이 한 번 버린 딸에 대한 죄의식을 평생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스텔라 수녀와 라파엘라 수녀,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는 새별이 언제 다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이 장면을 찍은 롱쇼트는 누군가의 시점 쇼트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신의 시점 쇼트일까? 나는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이것은 영화의 시점 쇼트이다. 영화는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모녀에게 어떤 삶이 예정되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믿음을 가진다. 영화 속 인물들이 믿음을 가지듯이 영화 역시 믿음을 가지고 모녀의 미래를 긍정한다.
새별을 보낸 뒤 라파엘라 수녀는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 예선을 처음 만났던 오름에 올라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하나님에게 질문한다. “또 다 이유가 있으시겠죠. 다 뜻이 있으시겠죠. 쟤는 또 혼자가 되고, 다 사랑하게 만들어놓고 빼앗아가는 것까지 다 이유가 있으시겠죠!” 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신은 침묵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라파엘라 수녀는 예선을 하나님에게 맡긴다. 이제 예선은 새별이 없는 세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세계를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그 세계를 잘 견뎌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선을 하나님에게 맡긴다. 그러면서 라파엘라 수녀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선의 윤리적 어머니가 된다. 다음 쇼트. 방 안에 홀로 있는 예선이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하나님, 죄송해요. 제가 기도를 처음 해봐서 잘 모르겠는데, 그냥 너무 죄송해요. 별이가 잘 지내게 해 주시고요. 수녀님도 잘 지내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저도 이제 좀 잘 돌봐주세요. 그냥 좀 더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예선의 첫 번째 기도. 라파엘라 수녀가 그렇듯이 예선 역시 새별의 삶을 하나님에게 맡긴다. 그 믿음을 통해 예선은 새별의 진정한 어머니가 된다. 어머니의 윤리를 실천하는 예선. 그 믿음을 라파엘라 수녀와 자기 자신에게까지 나누는 소녀. 그렇게 소녀는 성장한다. 영화의 마지막 쇼트. 오름길을 오르는 예선의 뒷모습을 찍는 카메라. 박석영은 언제나 그렇듯이 가장 추상적인 순간에 영화를 마무리한다. 성장의 순간. 자신의 윤리적 어머니인 라파엘라 수녀와 같은 길을 오르는 소녀. 박석영의 여성들은 그렇게 또 한 번 성장한다. 그것은 박석영의 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박석영은 더 성장한 영화와 함께 돌아올 것이다. 그 믿음을 가진 채 나는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