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정치 영화의 어떤 경향에 대하여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작년 한 해 한국 시네필들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킨 두 편의 영화가 있다. 하나는 일본의 네오 소라가 만든 <해피엔드>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폴 토마스 앤더슨이 연출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이다. 두 편의 영화는 분명히 소재와 장르에서 명백한 차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두 영화를 나란히 놓았을 때 어떤 기시감이 드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비록 두 영화가 서로를 직접 호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근원에는 동시대의 흐름과 마주하며 유사한 질문을 영화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사투의 흔적이 있었다. 한 편에서는 동시대의 정치적 흐름에 대한 감각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이러한 정치적 흐름을 기반으로 하여 전통적인 영화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즉 20세기를 기반으로 한 영화적 관습과 장르에 대한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이들은 동시대의 정치적 흐름을 20세기적 영화 관습 위에서 조화롭게 표현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현시대의 영화적 환경 안에서 고전적인 영화는 아직까지도 지속 가능한지, 만약 불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두 영화는 정치 영화와 장르 영화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불안정하게 존재하다가 그 끝에서 어떤 돌파구를 모색하거나 대안을 상상하고자 한다. 20세기 영화에 대한 21세기의 질문. 혹은 21세기 앞에 선 20세기의 대답. 이 글에서는 그러한 영화적 곤경 위에서 현대 영화가 정치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경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해피엔드> - 청춘 영화는 정치 영화를 견딜 수 있을까?
네오 소라의 <해피엔드>는 근미래 일본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여 진행된다. 파시즘이 도래한 미래. 이방인에 대한 혐오와 정치적 검열이 재림한 시대. <해피엔드>는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무대 위에서 일본 청춘 영화의 장르를 끌어들인다. 문제는 무엇인가? 두 장르는 영화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하는 대신 오히려 각자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투쟁하고 불화하며 이질적으로 존재한다. 영화의 첫 장면. 코우와 유타를 비롯한 친구들은 불법으로 영업하는 클럽에 찾아간다. 다인종으로 구성된 이들은 정식으로 클럽에 입장하는데 실패하자 뒷문을 통해 몰래 들어간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히 청소년들의 일탈을 다룬 청춘 영화의 장르적 관습의 반복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갑작스럽게 경찰이 클럽으로 들이닥치자 모든 인물들이 클럽 밖으로 나가지만 오직 유타만이 끝까지 남아 음악을 즐기며 춤을 춘다. 프레임 안에서 홀로 남아 음악을 즐기는 유타의 모습은 경찰의 존재를 모른다기보다는 차라리 애써 외면한다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달리 말하자면 청춘 영화는 프레임에 침입하는 정치 영화에 맞서 자신의 운동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저항한다. 21세기적 운동에 대한 20세기의 저항. 21세기의 정치적 환경은 20세기의 장르 영화를 허락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장르 영화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코우와 유타가 클럽 밖으로 나와 경찰에게 검문을 당하던 도중 친구들이 불을 끄고 그 틈에 도망치는 장면에서 역시 어떠한 정치적 저항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오로지 정치 영화의 억압에 맞서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하고자 하는 청춘 영화의 활력만이 느껴진다. 전자 음악 동아리에서 유타를 제외한 인물들은 모두 소수 인종이지만 네오 소라는 이들에게서 정치성을 배제하고 관습적인 청춘의 표상만을 남겨놓는다. 이들은 전공투 세대로 대표되는 앞선 세대와 달리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저항에 관심이 없다.
이는 단순히 전자 음악 동아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네오 소라는 디스토피아적인 정치적 배경과 달리 영화의 주 무대인 학교는 유토피아적으로 묘사했다. 여기에서 학생들은 정치적 의제는 물론이고 학생으로서의 진로와 학업 문제에도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학교는 디스토피아적인 정치적 조건 안에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10대들의 공간이다. 그것은 오직 청춘 영화 안에서만, 더 정확하게는 청춘 영화의 관습적인 이미지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네오 소라의 관심은 단순하게 20세기적 청춘 영화의 이미지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현대의 정치적 조건 하에서도 견딜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네오 소라는 정치적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에 관심이 없다. <해피엔드>의 정치성은 영화의 핵심적 테마가 아닌 영화의 조건 그 자체이며 그럴 때 영화의 정치적 배경은 하나의 풍경으로서 자리 잡는다.
유토피아처럼 보이는 학교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교장이다. 밤 사이 유타와 코우는 교장의 고급 자동차를 수직으로 세워놓는 장난을 친다. 명백하게 이 장난은 그들에게 있어 청춘 영화적인 10대 청소년의 일탈에 불과하다. 이때 네오 소라는 코우와 유타가 차를 세워놓는 장면을 영화에 넣지 않았다. 우리는 코우와 유타의 대사를 통해 이것이 그들의 행동임을 유추할 뿐 그 과정 자체는 빈칸으로 남아있게 된다. 공백으로 남은 영화의 빈칸은 정치적인 풍경으로 채워진다. 그렇기에 교장은 이 장난을 청춘 영화의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교장에게 있어 자동차는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표상하는 상품이다. 코우와 유타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 행위는 교장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자 도발이다. 적어도 영화 속 정치적 조건 하에서는 그러하다. <해피엔드>의 정치적 풍경은 청춘 영화적인 운동을 정치적으로 변형시키고 재해석하도록 만든다. 그러면서 학교는 점차 정치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물론 그러한 변모를 주도하는 것은 교장이다. 자신의 차에 장난을 친 범인을 찾기 위해 학생들을 심문하던 교장은 코우를 추궁하면서 재일 한국인인 코우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던 정치적 소수성이 수면 위로 모습을 나타낸다.
청춘 영화를 위한 공간이었던 학교가 정치적으로 변하자 정치적인 인물 역시 서사의 중심부로 들어온다. 교장에게 추궁을 당한 그날부터 코우는 자신의 정치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후미와 가까워진다. 유타와 달리 후미에게는 오직 정치적 자아만이 존재한다. 그녀는 유타와 코우가 청춘 영화적인 운동을 할 때 거리로 나가 시위를 하며 정치적인 운동을 만들어낸다. <해피엔드>를 지탱하는 것은 그러한 두 개의 운동이다. 청춘 영화의 운동과 정치 영화의 운동. 한쪽에서는 디스토피아를 피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창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디스토피아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두 세계를 담지하는 인물인 유타와 후미는 한 프레임 안에서 공존하지 못한다. 오직 코우만이 두 세계 사이를 오가면서 영화 전체를 지탱하고자 한다. 혹은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유타와 후미는 코우를 자신의 세계에 끌어들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인물들이다.
그러한 힘의 대결을 통해 영화의 중심부로 들어오는 쪽은 후미이다. 더 정확하게, 영화의 정치적 풍경은 후미의 세계를 영화의 중심부로 들어오도록 한다. 결정적인 전환점. 교장에게 심문을 받은 후 복도에 나와있는 코우에게 후미가 처음으로 말을 건다. 잠깐의 대화가 이어지고 유타가 프레임으로 들어오자 후미는 곧장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자연스럽게 코우와 유타의 대화가 이어지는 순간 영화에서 처음으로 지진이 발생한다. 영화 속에서 지진은 파시즘이 자신을 재생산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일종의 예외상태이다. 거대한 자연재해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전체주의는 확장된다.
이상한 점은 무엇인가? 지진이 발생해 학교 건물이 흔들리는 순간 네오 소라는 갑자기 영화의 모든 사운드를 지운다. 화면에서는 건물이 흔들리고 물건들이 떨어지지만 정작 우리는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다. <해피엔드>에서 소리는 유타와 후미가 저항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다. 유타는 스피커를 통해 어른들을 속이면서 청춘 영화적인 운동을 만들어내고 후미는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권력에 저항한다. 그렇다면 지진이 발생하는 순간은 모든 저항이 불가능해지는 예외상태이기에 어떠한 소리도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조금 다른 해석을 말하고 싶다. 영화에서 실제로 지진이 발생하는 순간은 단 두 번이다. 한 번은 후미와의 대화 이후 유타와 코우가 대화하는 장면. 다른 한 번은 유타가 음악 용품 가게에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갔을 때이다. 유타가 가게에서 면접을 보고 있을 때 코우와 후미는 가게 앞에서 시위 중이었다. 다시 말해 영화에서 지진이 발생하는 순간은 유타와 코우, 그리고 후미가 한 장소에 있을 때이다. 어쩌면 영화 속 지진은 자연재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타의 세계와 후미의 세계가 코우를 매개로 하여 충돌할 때, 즉 청춘 영화와 정치 영화가 충돌하는 순간에 대한 메타포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해석을 더 밀어붙인다면 첫 번째 지진 당시 사운드의 공백을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소리가 지워진 채 흔들리는 화면은 정치적 예외상태에 대한 표현이자 동시에 유타의 청춘 영화적 세계와 후미의 정치적 세계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진동하는 코우의 내면적 갈등을 표상하는 방식이다. 이때 핵심은 충돌 자체가 아닌 충돌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에 있다. 첫 번째 지진 이후 유타와 코우가 세워놓은 교장의 자동차가 쓰러져 뒤집힌다. 이걸 계기로 하여 교장은 학교에 AI 감시 시스템을 도입하여 학교를 사회의 축소판으로 재생산한다. 두 번째 지진 이후 시위대와 대치하던 경찰은 폭력을 사용하며 시위대를 강제로 진압한다. 지진 이후에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정치적인 대답이다. 달리 말해 유타의 세계와 후미의 세계가 충돌할 때 이기는 쪽은 언제나 후미이다. 유타는 가게에서 면접을 할 때 자신은 옛날 음악만을 듣는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 가게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상관없이 옛날 음악을 들으며 20세기적 영화 안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유타는 더 이상 문 바깥에서 펼쳐지는 정치적 풍경을 외면할 수 없다. 학교에 돌아온 뒤 유타는 코우와 후미가 당시 시위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학교로부터 추궁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된다. 동시대의 정치성은 이제 친구의 삶에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이건 유타 역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후미가 영화의 중심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영화의 주요 무대인 학교 역시 정치적인 공간으로 변해간다는 의미이다. 교장의 자동차가 지진으로 뒤집힌 이후 학교에 AI 감시 시스템이 들어온다. 누가 보더라도 미셸 푸코의 파놉티콘 개념에서 차용한 이 시스템은 청춘 영화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학교에 대한 저항은 곧장 벌점으로 돌아온다. 동시에 청춘 영화를 위한 전자 음악 동아리의 공간 역시 사라져 간다. 학교는 안전을 이유로 동아리실을 폐쇄하고 음악 장비를 옮겨 마련한 폐건물의 (오프닝에서 클럽으로 사용되었던) 지하 공간 역시 재건축으로 인해 폐쇄된다. 청춘 영화를 위한 공간을 영화에서 자리를 잃어간다. 이제 학교와의 투쟁은 오로지 정치적인 저항만이 허락된다. 일본 자위대가 순수한 일본인을 위한 수업을 위해 이방인 학생들을 교실 바깥으로 추방하자 감시 시스템은 이들에게 무단이탈을 명목으로 벌점을 부여한다. 자신들을 비추는 스크린을 바라볼 때 이들이 마주하는 것은 더 이상 학생이라는 이름 하에 평등한 규칙이 적용되는 학교가 아닌 학교라는 사회 안에서 자신들이 지니는 타자성, 그 타자성에 대한 억압 그 자체이다. 후미는 이들과 함께 교장실을 점거하며 정치적 저항을 시작한다. 그때 코우는 미국으로 떠날 톰을 위해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파티를 하고 있다. 점거 농성이 점차 해체되어 가는 듯한 때에 코우가 음식을 들고 나타나 시위를 지원한다. 교장실에 도착한 코우는 후미에게서 배운 민중가요를 부른다. 오프닝에서 전자 음악을 즐기던 코우는 이제 시위 현장에서 정치적인 노래를 부르며 정치적 세계로 넘어온다. 코우는 그렇게 유타의 세계를 떠나 후미의 세계를 선택한다.
교장은 결국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며 굴복한다. 졸업식 리허설 날 교장은 감시 시스템을 철거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차를 세워놓은 범인의 자백을 요구한다. 그때부터 리허설 현장은 감시 시스템 철거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갈라지면서 격론이 오간다. 그 순간 유타가 단상에 올라 그 장난은 자신이 혼자 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누구든지 이 선언이 코우를 위한 유타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선언이 영화에서 유타가 하는 최초의 윤리적 결단이라는 것이다. 유타는 청춘 영화적인 자신의 행동을 윤리적으로 책임진다. 이를 두고 유타가 후미의 세계로 흡수된 것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유타의 선언에는 어떠한 정치적인 요소도 없다. 여기에는 오로지 코우를 위해 모든 윤리적 책임을 홀로 감내하고자 하는 우정의 이름만이 있을 뿐이다. 온전하게 청춘 영화적인 순간. 유타의 선언과 동시에 학생들의 토론은 즉각 중단된다. 유타는 정치적인 공간으로 변한 학교를 앞에 두고 자신의 선언을 통해 학교를 다시 청춘 영화의 공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러면서 유타는 그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위해 그 자신을 희생한다. 후미가 자신이 떠난 이후에도 학교에 있을 후배들을 위해 교장과 싸웠듯이 유타 자신도 청춘 영화의 무대로서의 학교를 위해 자신의 존재를 지운다. 이 선언을 통해 유타는 한 명의 주체로서, 한 명의 어른으로 성장한다. 유타만을 위한 성인식. 그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며 퇴학을 당하지만 그 선언을 통해 진정한 성인이 된다.
동시에 이 선언과 함께 유타는 정치 영화와의 완전한 결별을 고한다. 그는 특정한 정치적 진영을 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정치적 담론 자체를 무효화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것이다.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 변하는 풍경 안에서도 유타는 꿋꿋하게 청춘 영화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곧 정치적 풍경만으로 이루어진 사회와의 결별이다. 비록 이 선언을 통해 학교를 다시 청춘 영화의 공간으로 되돌렸을지언정 학교 바깥의 사회는 여전히 정치적인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그곳에서는 청춘 영화가 허락되지 않는다. 그 세계에 유타를 위한 자리는 없다. 유타는 그렇게 정치적 풍경으로부터 추방당한다. 혹은 그 스스로를 지운다.
졸업식 이후 전자 음악 동아리 친구들은 각자의 삶을 위해 흩어진다. 코우와 유타 역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다. 육교에서 헤어지기 전 유타는 코우에게 장난을 치고 카메라는 이 순간 화면을 멈춘다. 누가 보더라도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를 떠올리게 만드는 오마주. 트뤼포는 앙투완 드와넬의 삶이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을 때, 그래서 영화 바깥을 욕망하며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 볼 수밖에 없을 때 영화를 멈추었다. 하지만 네오 소라는 프리즘 프레임이 끝난 이후에도 장면을 계속 지속하며 두 소년의 미래를 긍정한다. 아직 어떤 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했지만 두 소년의 미래는 모두 불안정하다. 거기다 영화 속 정치적인 풍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코우는 소수자로서 끊임없이 투쟁을 이어나갈 것이다. 코우가 정치적인 세계를 살아갈 때 유타는 청춘 영화적인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일본 사회의 소수자인 코우가 주류 사회로 들어가 정치적으로 투쟁할 때 주류 일본인에 속하는 유타는 제도권 바깥에서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야 한다. 두 세계는 과연 화해할 수 있는가? 만일 이 장면을 ‘해피엔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들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이 아닌 그러한 삶의 조건 안에서도 변하지 않는 우정에 대한 믿음에 있을 것이다. 이 우정은 단순히 두 인물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닌 두 개의 이질적인 세계 사이를 이어주는 힘이다. 단순히 정치적인 타자를 환대하는 것을 넘어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을 살아가는 이들과의 공존을 긍정하는 것. 그것이 디스토피아적인 현시대에서 유토피아를 상상할 수 있는 첫걸음이다. 네오 소라의 카메라는 두 소년의 마지막을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 화면을 멈추었다가 이내 영화 이후에 펼쳐질 두 소년의 우정을 믿으면서 인물들을 떠나보낸다. 영화에서 두 소년의 우정은 끝난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화 바깥에서의 우정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풍경 안에서 또 다른 풍경을 창조할 것이다. 네오 소라는 청춘 영화가 더 이상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가장 근원적인 힘인 우정의 존재만은 긍정한다. 그것이 현시대에 청춘 영화가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일지도 모른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서부극이 사라진 그곳에는 무엇이 달리고 있는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혁명 영화가 아니다. 영화에는 분명 혁명을 외치면서 권력에 대항하는 여러 집단과 세력이 있지만 폴 토마스 앤더슨은 그들의 혁명 활동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해피엔드>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정치성은 그저 영화의 조건 그 자체일 뿐 감독 자신이 탐닉하는 대상이 아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진정으로 추동하는 것은 인물들의 정치적 열망이 아닌 인물들의 리비도, 그리고 장르 영화의 서사적 동력에 있다.
영화의 오프닝을 따라가 보자. 퍼피디아 베벌리힐스를 포함한 프렌치 75 단원들은 스티븐 록조가 운영하는 이민자 수용소를 습격한다. 여기서 이상한 장면이 등장한다. 퍼피디아는 갑자기 스티븐 록조를 성적으로 자극하는 말을 내뱉으며 그가 발기하도록 만든다. 단순히 백인 남성에 대한 조롱으로 읽을 수도 있으나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이후에도 퍼피디아와 스티븐 록조를 추동하는 핵심 동력이다. 수용소 습격을 마친 뒤 도망치는 차량 안에서 나누는 대화에서는 혁명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자신의 넘치는 리비도를 발산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퍼피디아와 프렌치 75 단원들에게 있어 혁명은 폭력적 행위의 명분이자 외피일 뿐 핵심이 아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퍼피디아를 혁명가로 만든 것은 그녀의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그녀의 리비도와 욕망을 혁명가의 위치에서 발현하도록 하는 정치적 조건이다. 정치적 조건은 그렇게 인물의 욕망과 행동을 재배치하고 생산한다.
거기다 스티븐 록조는 어떠한가? 프렌치 75에게 습격을 당한 이후에도 그들을 곧장 체포하는 대신 퍼피디아를 미행하고 그녀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충족한다. 그는 퍼피디아와 관계를 맺을 수만 있다면 그들이 테러를 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퍼피디아가 체포된 이후 프렌치 75 단원들을 소탕하는 작전 역시 정치적인 목적보다 퍼피디아를 소유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것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처한 조건이 정치성을 끊임없이 생산하기 때문이다.
퍼피디아가 사라지자 영화를 추동하던 리비도의 활력은 곧장 사라진다. 프롤로그가 끝난 후 나오는 첫 내레이션. “16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때 장면은 아기 샬린을 비추다가 세르지오 센세에게 가라테를 배우는 16살의 윌라 퍼거슨으로 전환된다. 이 전환에서는 어떠한 시간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다. “16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내레이션은 정치적인 내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퍼피디아의 에너지가 사라짐과 동시에 운동을 멈춘 채 변화를 상실한 영화 속 세계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그 세계를 다시 운동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대령으로 진급한 스티븐 록조는 백인우월주의 비밀 클럽인 ‘크리스마스 모험가’에 가입 권유를 받자 그는 과거 자신과 퍼피디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없애기 위해 밥과 윌라를 찾아간다. 후반부 내내 스티븐 록조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은 자신을 순수한 백인으로 만들기 위한 도착적 욕망이다. 그럼에도 이 욕망은 정치적으로 배치된다. 윌라와 밥의 거주지를 알아낸 스티븐은 이렇게 명령한다. “거기 군을 파견할 이유를 만들어.” 스티븐 개인의 욕망을 위한 이 운동은 곧장 정치적 운동으로 전환된다. 스티븐의 군대는 윌라를 찾기 위해 불법 이민자들이 근무하는 치킨 너겟 공장을 습격하고 윌라의 학교에서 진행되던 댄스파티도 중단시킨다. 그러면서 도시의 풍경은 곧장 정치적으로 변한다. 퍼피디아의 운동이 영화에 역동성을 만들어낸 것처럼 스티븐의 운동도 멈춰있던 세계를 다시 움직이도록 한다.
그 사이 멈춰있던 밥 퍼거슨의 운동 역시 다시 시작된다. 스티븐이 자신의 딸을 노린다는 사실을 듣게 된 밥은 집결지를 알아내기 위해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며 암호를 알아내고자 하지만 마지막 암호를 기억하지 못해 시간을 유예한다. 이때부터 시작된 밥의 운동은 스티븐의 정치적 운동과 달리 오로지 자신의 딸을 되찾기 위한 가족 영화의 운동이다. 스티븐의 운동이 정치적인 풍경을 생산할 때 밥은 그 풍경 위에서 자신만의 장르적인 운동을 이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가장 정치적인 인물은 세르지오 센세이다. 밥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세르지오를 찾아갔을 때 우리는 세르지오가 이민자들을 위해 마련한 은신처를 마주하게 된다. 세르지오의 지휘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은 퍼피디아의 운동 못지않게 역동적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리비도도 느껴지지 않는다. 퍼피디아와 달리 세르지오는 오로지 타자의 현존을 수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움직이며 스티븐의 운동에 저항한다. 물론 이 시퀀스에서의 역동성은 유려한 촬영과 편집, 음악의 활용에도 있지만 결국 진정한 영화적 역동성은 그 안에서 자신의 딸을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밥 퍼거슨에 있다. 정치적 운동 안에서의 장르적 운동. 폴 토마스 앤더슨은 바로 그러한 장르적 운동을 따라가며 영화를 만든다. 달리 말하자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세계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 세대의 격렬한 정치적 운동이 아닌 낡고 진부해 보이지만 여전히 그 가치가 살아있는 가족애, 인류애 등에 대한 믿음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보여주듯이 영화에서의 정치적 운동은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윌라를 찾은 뒤 그녀를 처리하기 위해 스티븐은 아반티를 만난다. 카메라는 먼저 두 인물의 접선 장소를 마스터 쇼트로 보여준다. 이 풍경은 명백하게 서부극에서의 모뉴먼트 밸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가장 미국적인 장르인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장르의 영화. 거기서 백인우월주의 남성과 아메리카 원주민이 만난다. 20세기 풍경 위의 20세기적 인물들. 그곳에서 두 인물은 21세기의 소녀를 두고 거래한다. 처음에 아반티는 어린아이를 처리하기 싫다며 거절하지만 결국 스티븐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거래를 마친 뒤 돌아가던 스티븐은 자신의 배경을 알아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에서 보낸 킬러 팀에 의해 총에 맞아 도로 밖으로 굴러 떨어진다. 팀의 암살은 완전하게 정치적인 행위이다. 백인의 순수성을 보호하기. 정치적 운동은 또 다른 정치적 운동에 의해 중단된다. 윌라를 마약 카르텔에 데려다준 뒤 아반티는 갑자기 윌라를 풀어준 뒤 총을 들고 카르텔을 숙청하고 자신 또한 죽는다.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는 이 행위는 윌라를 위한 행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백인우월주의자의 정치적 운동에 맞선 아메리카 원주민의 저항으로 보인다. 그 저항 이후 아반티 본인 역시 사라진다.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아반티는 아메리카 원주민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윌라에게 넘겨준다. 아반티의 차를 타고 도주하던 윌라는 자신의 뒤에서 누군가가 추격해 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식적인 설명. 도망치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그 뒤를 쫓는 백인. 서부극의 배경 위에서 펼쳐지는 서부극의 운동. 차이는 무엇인가? 윌라의 뒤를 팀이 쫓고 그 뒤에는 딸을 찾기 위해 밥이 운전하고 있다. 세 개의 운동. 그러나 세 운동의 목적은 각기 다르다. 윌라는 오로지 살기 위해 도망치고 팀은 순수하게 정치적인 목적만을 위해 그녀를 뒤쫓는다. 그리고 밥은 가족을 찾고자 하는 일념 하에 장르 영화의 운동을 지속한다. 이 추격의 운동은 20세기적인 장소 위에서, 서부극이 펼쳐지던 장소 위에서 벌어진다. 21세기의 소녀를 쫓아가는 두 명의 20세기 인물.
그러다가 윌라는 차를 세우고 길 옆으로 빠진다. 경사로에 의해 시야에 제한을 받은 팀은 그대로 윌라의 차에 충돌한다. 서부극에서의 아메리카 원주민과 달리 21세기의 윌라는 이 운동을 지속하는 대신 20세기 장르의 운동을 중단한다. 20세기의 공식을 따라 그대로 질주하던 백인은 충돌을 피하지 못한다. 차에서 내린 팀에게 윌라는 프렌치 75에서 사용된 암구호를 말하고 팀이 대답을 못하자 그대로 총을 쏜다. 첫 번째 살인. 이 살인은 단순히 자신을 쫓아오던 추격자를 살해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정치적 질문을 통과하지 못한 이를 프렌치 75의 이름으로 정치적 각성의 순간이다. 그 후에 현장에 도착한 밥은 딸과 다시 조우하지만 딸은 똑같이 암구호를 댄다. 아버지가 대답을 한 이후에도 딸은 다시 한번 아버지에게 묻는다. “당신 누구야?” 두 번째 질문은 정치적인 질문을 통과한 뒤에도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타자성에 대한 질문이다. 윌라는 이제 밥이 자신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곳까지 밥 퍼거슨을 올 수 있도록 한 것은 가족에 대한 일념을 통한 가족 영화의 운동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자신을 아버지라고 말하는 밥 퍼거슨에게서 그녀가 보는 것은 아버지 자체가 아니라 그를 아버지로서 만들어준 가족 영화의 운동성 그 자체이다. 밥의 품으로 돌아가는 윌라는 바로 그러한 가족 영화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정치적 운동은 사라지고 가족 영화의 장르적 운동만이 남아 20세기의 장소를 벗어난다.
집으로 돌아온 뒤 윌라는 밥이 숨겨두었던 퍼피디아의 편지를 읽는다. 편지에서 어머니 퍼피디아는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적절하고 안전한 때가 오면 네가 날 찾아낼 거야.” 그 세상이 오기 위해서는 분명 정치적 저항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편지는 결국 어머니가 딸에게 보내는 것이다. 딸은 어머니와 만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면서 투쟁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리비도를 충족시키기 위해 혁명을 부르짖던 어머니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네오 소라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이 일상이 된 시대에도 여전히 장르 영화가 내세우는 근원적인 가치를 믿는 폴 토마스 앤더슨. 윌라는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싸우러 나간다.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윌라와 그 세대의 몫이다. 그 미래를 긍정하면서 영화는 물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