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자란 마음

동네야구를 주름잡다

by 홍시궁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옛말) 때 주먹야구는 최고의 놀이였다. 말랑말랑한 고무공(또는 테니스공)만 있으면 운동장 한쪽 구석에 줄을 척척 그어서 야구장을 만들고는 몇 시간이고 놀 수 있었기 때문에 참 많이 했다. 이김을 위한 꼬맹이들의 달뜬 열망과 함성이 봄날 오후의 학교 운동장을 쩌렁쩌렁 울리곤 했다.

그러다 5학년이 되었고, 3월 어느 봄날 다이아몬드형 야구장의 홈으로 늘 쓰던 호두나무 아래에서 한층 굵어진 주먹으로 언제나처럼 야구를 하고 있었다. 1반 담임선생님이 홈 뒤 호두나무 아래에 앉아서 우리가 주먹야구하는 모습을 보신다는 걸 문득 알았다. 새로 전근오신 젊은 남자 선생님이셨는데,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남지읍에서 근무하셨다고 했다. 1시간 정도 물끄러미 우리가 주먹야구하는 모습을 구경하시다가는 슬그머니 가시고는 했다.


그다음 주 달날(월요일) 오후에 1, 2반이 같이 체육을 하기로 갑자기 결정되었다. 우리는 좋아라 운동장으로 냅다 달려갔고, 거기에 1반 선생님이 계시고 옆에는 커다란 마대자루가 하나 놓여 있었다. 국민체조를 두세 번 하며 몸을 푼 후 남학생은 야구, 여학생은 피구를 한다고 했다. 야구?

이윽고 1반 선생님이 마대자루를 쏟아내자 생전 처음 보는 포수 미트, 1루수 미트 등 야구 글러브 여섯 개와 연식 공 두 개 그리고 나무로 깎아 만든 배트가 한 개 나왔다. 그때의 그 생경한 이물감과 그게 무엇인지 인지했을 때의 갑작스러운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각 반에서 9명씩 선수를 만들고 1반 선생님으로부터 규칙을 들었다. 그날 우리는 생전 처음 야구라는 걸 해보았다.


그 후로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야구를 했다. 알고 봤더니 1반 선생님이 야구를 엄청 좋아하셨고, 우리는 그 선생님의 지휘(?) 아래 반 대항 야구경기를 하면서 또 운동장을 내달리고 함성을 지르고 세이프와 아웃 사이의 팽팽한 신경전을 이어갔다. 우리 반은 투수와 3번 타자를 담당했던 나의 활약 덕분에 세 번 중 두 번은 꼭 이겼다.


우리 반이 이기면 이길수록 1반 담임선생님의 질긴 승부욕에 불을 질렀고, 경기가 진 날 종례시간에는 1반 담임선생님의 따가운 질책과 비는 듯한 애원의 목소리가 복도를 따라 우리 반으로 넘어왔다. 우리 반 선생님은 여자분이셨지만, 그럴 때마다 얼굴에 살포시 미소를 머금으시면서 "반장, 좀 져주면서 해라. 피구도 매번 이기는데..." 부탁(?)하시고는 짧게 종례를 마치고는 했다.

학교에서의 이런 야구 사랑은 동네에 가서도 이어졌다. 우리는 시멘트포대나 비료포대를 가지고 글러브를 만들어서는 울퉁불퉁한 논바닥에서 엄마들이 저녁 먹으라고 데리러 올 때까지 야구를 했다. 지나가던 어른들이 “이노무 손들, 집에 안 드가나!” 고함지르셔도 우리는 빠따를 휘둘러 안타를 쳐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듬해에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나의 야구사랑은 더 커져만 갔다. 이제 막 집에 들어온 중고 컬러TV(네 발에 여닫이문이 있던)로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개막전을 본 날 저녁에는 나무방망이를 휘두르는 붕붕 소리가 고향집 뒷마당을 울렸다. "시끄럽다!"라고 내지르시던 그 무섭던 아버지의 고함도 귓등으로 들었다. 작대기로 한 대 얻어맞고서야 비 맞은 고양이 마냥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다른 친구들도 저마다 제일 좋아하는 팀을 하나씩 정하고는 골목마다 모여서 서로 자기 팀이 최고라며 핏대를 세우고는 할 정도로 야구는 축구를 넘어서는 최고의 즐길거리였다.


그 열망은 내기가 달린 동네 대항 야구경기로 이어졌다. 동네별로 만원씩 내놓고 이긴 동네가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나는 우리 동네(거문리)에 사는 5~6학년 13명 정도를 모아서 팀을 꾸렸고, 다른 동네에 시합을 제안하고는 했다. 당시 원동이라는 마을에 나와 라이벌을 겨루던 친구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 동네와 자주 맞붙었다. 시합을 앞두게 되면 우리는 저녁밥을 먹고는 뒷산에 모여서, 팔굽혀펴기, 오리걸음 등등으로 체력을 다지고 한 명당 100번씩 방망이를 휘두르며 승리에 대한 다짐을 쌓고는 했다. 심지어는 버스를 타고 이웃 영산면에 있는 동네로 원정시합을 가기도 했다. 질 때보다는 이길 때가 훨씬 더 많아서 경기가 끝나고 나면 우리 동네 꼬맹이들은 자주 그 맛있던 자장면으로 배를 채우곤 했다.

노리, 사창, 부곡, 온정 등등 주변 일대 동네와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야구경기를 하면서 국민학교 시절을 다 보냈지만, 중학교에 가서도 주말이면 청암, 길곡, 비봉 등으로 원정을 다녔다. 한 번은 임해진이라는 낙동강 가에 있는 동네로 갔는데, 2만 원 내기를 하기로 해놓고는 돈이 없다면서 수박을 10통 걸겠다고 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안된다며 부러 어깃장을 놓았고, 결국 15통으로 시합이 성립되었다.


그날도 우리 동네가 이기는 바람에 임해진 아이들은 다들 자기 수박밭으로 달려가서 1~2통을 따서 들고 왔다. 우리는 서늘한 그늘에서 기다리다 수박이 오면 한 통씩 헤딩으로 박살내고는 와싹와싹 수박을 베물었다. 그 더운 여름날의 그 다디단 수박의 통쾌한 맛이란!


내 야구 실력이 입소문이 나서 중학교 3학년 헹님들 팀과 하기도 했다. 나이 때문에 주전투수는 할 수 없었지만, 외야수를 보다가 중간에 투수가 흔들리면 내가 나서서 마무리를 했다. 내 공이 원체 빠르다 보니 중학교 2, 3학년 헹님들도 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헹님들은 삼진을 당할 때면 으레 "니 죽는대이. 조심하그래이" 하면서 윽박질렀지만, 나의 공은 헹님들의 마음에 상처만 새기며 포수 미트에 아름답게 내리 꽂히곤 했다.

내 국민학교, 중학교는 실로 동네야구의 시절이었다. 주먹야구로 시작해 국민학교 5학년 때 처음 야구를 배우고 그 재미에 맛들려서 야구로 '동네깨기'를 하러 다니던 그 시절의 그 열망과 몰입과 재미는 최고였다. 아부지가 논에 가서 피 뽑고 가라고 하면 냅다 도망쳤다가 저녁에 돌아오면 삽짝이 잠겨있는 불상사를 맞기도 했지만, 동네야구는 내 최고의 즐거움이자 지금 말로는 힐링 그 자체였다. 경기를 이기고 나면 세상이 다 내 꺼였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끝끝내 9회까지 다 채우고서야 경기를 마쳤던 그 고집이 지금은 그립다. 판정이 애매할 때는 목소리 드높여 온갖 야구규칙을 다 들먹이며 끝끝내 유리한 결론을 이끌어내고야 말았던 그 앞뒤 없던 배짱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사회인야구를 하면서 어느 정도 그 시절의 그 열망과 고집과 배짱을 피워보려 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경기규칙과 심판으로 채워진 사회인야구에서는 오직 내 안에서만 터뜨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맹탕의 야구가 싫지는 않지만, 거친 논바닥에서 돌에 쓸리고 무릎이 까지면서도 오로지 이김을 위해 몸을 날렸던 그 12살의 '나'를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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