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면 한 달 내내 비가 내렸다. 지리한 장마가 끝나면 매미가 울어댔다. 매미가 울면 곧 무더위가 닥쳤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이내 여름방학이 코앞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철기(잠자리의 시골말)가 날아다녔고 뒤이어 태풍이 왔다. 태풍이 물러나면 여름도 사위어갔다.
해마다 여름방학이 되면 두 감정이 얽혔다.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지극의 기쁨과 농사일을 도와야 한다는 시큼한 짜증! 이 상반된 두 감정이 서로 갈마들며 유년의 여름방학을 채색했다.
방학하는 날 아침에는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학교로 줄달음쳤다. 수업은 두세 시간 정도 했는데, 건성건성 수업을 들으며 방학 때 놀거리 얘기로 친구들과 왁자지껄했다. 곧 종업식을 했고 담임선생님이 통지표를 나눠주셨다. 다른 친구들은 통지표를 받으며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선생님이 "맹이리는 전부 수(秀)" 하시는 말씀에 고개가 빳빳이 들렸다. 어깨는 여봐란듯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친구들의 시샘과 질투가 뒤섞인 눈총을 뒤통수로 느끼며 통지표를 받았다. 선생님이 <탐구생활>을 시작으로 방학숙제를 다 설명하고 나면 우리는 "와!" 교문을 향해 내달았다. 그때 그 기쁨과 행복감은 이글거리는 여름 해 너머까지 내달았다.
집에 돌아오면 맨 먼저 통지표를 아부지한테 내밀었다. 통지표에는 '수'가 8개 찍혔고, 선생님 평가란에는 늘 '품행이 방정하고 타의 모범이 됨'이라는 단정한 글자가 품위있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부지는 "잘했다" 한 마디만 하시고는 논일을 가셨고, 엄마는 그날 저녁에 애호박을 총총 썰어 넣은 수제비로 마음을 내셨다. 하지만, 방학의 기쁨은 그날로 끝. 그야말로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부터 시큼한 짜증이 시작되었다. 아부지가 꼭두새벽부터 소 꼴(소가 먹는 풀)을 베러 가시면 8시까지 지게나 리어카를 가지고 가서 실어와야 했다. 집에 와서는 작두로 꼴을 자르고 쌀겨를 섞어서 누렁이한테 여물로 주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밭에 가서 오전 내내 김매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이 축구하러 가자고 대문 밖에서 부르면 냅다 줄행랑을 놓기 일쑤였고, 그런 날이면 아부지는 저녁때 “맹이리는 밥 주지 마라”는 말씀으로 되갚았다.
점심을 먹고 나면 뒷산으로 소를 데리고 가서 꼴을 먹여야 했다. 산에는 싱싱한 풀이 지천으로 널렸기 때문에 누렁이에게는 최고의 시간이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논에 가서 피를 뽑기도 했지만, 누렁이를 먹여 키우는 일이 보통 나의 하루 일과였다.
누렁이를 데리고 뒷산으로 가서 꼴을 먹이는 일은 그래도 괜찮았다. 동네 또래 동무들이 다 같이 꼴을 먹이러 갔기 때문에 재미난 놀이들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2시쯤 뒷산 절골 근처에 모였다. 소들을 산에 풀어놓고 깻묵이나 다래를 따 먹으러 다니거나 계곡에서 가재를 잡았고, 여석아들은 시원한 그늘에서 공기놀이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저마다 집에서 밀가루며, 식용유며, 설탕이며, 프라이팬 등을 준비해 와서 계곡 근처 물 맑은 곳에서 호떡을 구워 먹기도 했다. 또래 남녀 동무들이 모여서 왁자하게 떠들면서 만들어 먹던 호떡의 다디단 풍미는 아슴한 추억과 함께 가끔 코끝으로 스민다.
그날도 우리는 절골 계곡에서 가재 잡으랴 가재 튀김하랴 호떡 구우랴 그야말로 호떡집에 불 난 듯 정신없이 놀았다. 그날은 마침 동무 한 놈이 집에서 담근 동동주 한 주전자를 가져온 터여서 동동주 몇 잔에 우리는 불콰한 얼굴로 질펀하게 퍼졌다. 산에 풀어놓았던 소는 까맣게 잊은 채 우리들만의 재미로 흥청거렸다.
6시쯤 되자 동무들은 자기 소를 찾아서 다들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더 있다 갈 생각에 느긋하게 산그늘을 즐겼다. 산그늘이 깊어지자 나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근처에 있겠거니 하고 누렁이를 찾았지만, 누렁이가 보이지 않았다. 새끼를 밴 지 석 달이 지난 터여서 먹성이 대단했기 때문에 가끔 높은 데까지 올라가기는 했지만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남아있던 친구 몇 놈도 같이 찾았다. 산그늘 깊어가는 그 어디에도 누렁이는 보이지 않았다. 친구 몇 놈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는 슬슬 내빼기 시작했다. 어둠살이 내린 산에 혼자 남았다. "음메~", “누렁아~” 부르면서 온 산을 다 헤매고 다녔지만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어둑한 산길을 혼자 내려갔지만 희한하게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아부지의 작대기와 엄청난 불호령만 감돌뿐이었다. 새끼를 밴 누렁이가 우리 집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기 때문에 두려움은 점점 더 커졌다. 삽짝 앞에 다다랐지만 성큼 들어갈 수가 없었다. 골목을 되짚어 다시 돌아 나왔다. 밑에작은집 육촌 동무 놈을 부르려다 말고 다시 집으로 갔다. 역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건니작은집 동갑내기 육촌 고모한테 도와달라고 해야겠다 마음먹고 갔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갔더니 엄마가 삽짝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날이 어두웠는데도 소가 집으로 오지 않으니 지레짐작을 하셨나 보았다. 아부지한테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아부지는 한 마디 말씀도 없으셨다. 후라시를 찾아들고 작은집 아재들하고 같이 뒷산으로 올라가셨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마당에 나왔더니 뒷산에서 불빛이 왔다 갔다 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듯 불빛이 엄청 많았다. 애가 타고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누렁아, 퍼뜩 돌아온나' 속으로 몇 번을 뇌까렸는지 몰랐다. 엄마는 남의 속도 모르고 "누렁이 올 끼다. 걱정 말고 숙제나 하거라" 하셨지만, 숙제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부지는 10시가 넘어서 오셨다. 누렁이는 없었다. 아부지 혼자 삽짝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나는 죽었다'고 속으로 복창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누렁이가 지내던 외양간 옆 광에 나를 밀어 넣고는 "잘못했제?" 하고 가버리셨다. 12시 무렵에 엄마가 나를 꺼내 주기까지 쥐와 친구 하며 광에서 보내야 했다. 대나무로 만든 창살 사이를 통과해 짙은 어둠 속으로 스미는 달빛이 그리 아름다운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자다가 누렁이한테 뿔로 받히는 꿈도 꾸었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외양간으로 내달았다. 혹시나 싶었는데 거짓말처럼 누렁이가 와 있었다. 누렁이는 온 산을 다니며 신나게 꼴을 먹다 한골이라는 옆동네 앞산까지 갔더랬다. 밤이 되어서 한골에 사는 아부지 친구 집에 몰래 들었다가 아침에 그 친구분이 발견하시고 데려오셨다고 했다.
누렁이를 보는 순간 진짜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아부지가 째려보시는 통에 그도 여의치가 않았다. 그날 오후에 뒷산으로 오르는 누렁이 엉덩이에 대고 나는 애먼 매질을 해대고 있었다. "니 한 번만 더 내빼라. 그때는 니 죽고 내 죽자, 알겄제?" 윽박을 질렀지만, 누렁이는 아는 지 모르는 지 몸에 들러붙는 파리를 꼬리채로 내쫓으며 엉금엉금 산길을 오를 뿐이었다. 그날도 누렁이는 온 산을 누비며 신선한 풀로 한껏 배를 채우고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이내 매미도 울어댈 게고, 무더위도 미쳐 날뛰는 여름이 시작될 게다. 이맘때 매~앰맴맴 하고 우는 매미소리는 어릴 적 여름방학의 기억을 소환한다. 누구에게나 유쾌한 여름방학의 추억 한 자락은 있을 게다. 세상 다 가진 듯한 푸근한 마음으로 풀밭에 누워 그 더운 여름하늘 한쪽에 걸린 흰구름을 바라보던, <탐구생활>을 옆구리에 끼고 산으로 들로 다니며 곤충을 관찰하고 그려내던 그런 추억 말이다.
그런 추억들은 기억할 만한 게 별로 없는 요즘 삶에 시원한 하늬바람처럼 시원하다. 그 추억들 사이로 내비치는 '소 잃고 광에 갇힌'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 애들한테 들려주고 싶은 유쾌하면서도 짠한 한 자락의 여름 동화다. 하루는 지나가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일진대, 이런 동화 같은 추억들로 앞으로 내 하루하루를 ‘구름에 달 가듯이’ 쌓아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