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허례와 위선
세 여인의 이름
순례길을 가던 크리스천은 언덕 아래에서 세 여인을 발견했다.
그들의 이름은 단순, 나태, 거만이었다.
손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지만, 정작 그들은 그것을 죄의 사슬이라 여기지 않았다.
· ‘단순’은 안일함 속에 머물며 말한다.
“이대로가 얼마나 살기 좋은데요.”
무지와 무감각은 축복이 아니다.
진리에 대한 무관심은 결국 방심으로 이어진다.
· ‘나태’는 게으른 영혼이다.
“그냥 좀 쉬면서 수다나 떨어야겠습니다.”
몸의 게으름이 아니라,
기도를 미루고 말씀을 외면하는 영적 게으름이 문제다.
· ‘거만’은 교만하다.
“남의 일 참견 마시고 당신 일이나 하시오.”
말씀의 경고는 귀에 들리지 않고,
충고는 오히려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크리스천은 눈물로 그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들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혼자 길을 떠나야 했다.
담을 넘어온 사람들
이어서 크리스천은 담을 넘어온 두 사람을 만났다.
이름하여 허례와 위선.
그들은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담을 넘어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이는 도둑과 강도의 길이었다(요 10:1).
'허례'는 신앙의 외형만 좇는다.
예배 참석, 의식, 규례에만 집착하면서도
마음에는 생명이 없다.
'위선'은 입술로는 경건을 말하지만, 삶은 세상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좁은 문 대신 지름길을 택했지만,
결국 그 길은 멸망으로 이어졌다.
두루마리를 꺼내든 크리스천
이 모습을 지켜본 크리스천은 마음이 무너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읽었다.
그것은 십자가 앞에서 받은 은혜의 증표였다.
말씀을 읽는 동안 그의 마음은 다시 굳건해졌고,
순례의 발걸음은 진리의 길로 향했다.
✍ 묵상 질문
· 나는 단순처럼 무감각하지는 않은가?
· 나는 나태처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가?
· 나는 거만처럼 교만하여 권면을 거절하지 않는가?
· 나는 허례처럼 신앙을 외형으로만 채우고 있지는 않은가?
· 나는 위선처럼 삶과 믿음이 따로 놀고 있지는 않은가?
개미에게 배우는 지혜
성경은 말한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 6:6)
우리는 흔히 개미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배웠다.
그러나 동물행동학의 관점에서 보면,
개미의 활동은 신념이 아니라 생존 본능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개미를 들어 인간의 게으름을 경고한다.
개미의 질서와 협동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엿본다.
하버드대학의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평생 개미를 연구하며 사회생물학을 개척했다.
나는 그의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작은 생명체 안에도 하나님이 부여하신 질서가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개미 사회에는 청소부, 장의사, 수확자 등 다양한 역할이 존재한다.
냄새 하나로 역할이 구분되고, 질서가 유지된다.
인류보다 훨씬 오래된 그들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보여준다.
나는 그들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인간을 신으로 여긴 개미 사회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개미』라는 소설에서
개미들이 인간을 신으로 섬기는 상상을 펼친다.
"복음 비슷한 메시지가 개미 사회에 퍼지며,
‘손가락’이라는 종교적 상징이 번진다.
새 여왕개미는 종교를 불편해하며 신앙을 가진 개미들을 학살한다.
그러나 손가락을 신으로 섬기는 개미들은
끝까지 예언자 개미를 탈출시키려 헌신하고,
지렁이의 몸에 들어간 뒤,
하늘로 날아오른 박새에 의해
‘신의 나라’로 들어간다.”
신앙을 비틀어 풍자하는 측면이 있으나,
동시에 우리 존재의 한계를 성찰하게 한다.
나는 인왕산에 올라 바위 위를 기어가는 개미를 보았다.
내가 손톱으로 바위를 긁자 개미는 즉시 달아났다.
개미에게 그 진동은 천둥과 번개였다.
그 순간 나는 개미에게 신 같은 존재로 다가갔음을 깨달았다.
꽃의 이름을 부르는 이
E.O. 윌슨 교수와 나는 같은 대상을 보았지만,
결론은 달랐다.
그는 무종교자였고, 나는 신앙인이다.
나는 이철환 작가의 짧은 이야기를 떠올린다.
“꽃의 이름을 알고 싶으면,
언젠가 꽃이 자기 이름을 알려 줄 것이다.”
실제로는 지나가던 이가
“은방울꽃이 예쁘다”라고 말했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나는 평생 그 꽃의 이름을 알고 싶어
그 꽃 앞에 앉아 있었지만, 월슨 교수는 그렇지 않았다.
마침내 사도 바울은 내게 그 꽃의 이름을 가르쳐 주셨다.
변할 수 없는 고백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
세상은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를 존경하지만,
나는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의 이름을 안다.
그 이름을 전하는 것이 내가 걸어가는 순례길의 이유다.
✍ 최종 묵상
· 나는 단순·나태·거만의 길을 따르는가, 아니면 좁은 문을 통과하는가?
· 나는 허례와 위선의 지름길을 택하는가, 아니면 진리의 길을 걷는가?
· 나는 개미처럼 작은 질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