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끝, 하늘의 문 앞에서
천로역정의 끝, 하늘의 문 앞에서
존 번연의『천로역정』에는 백 명에 가까운 인물이 등장하지만
끝까지 걸어 천성에 이른 이는 많지 않다.
신실, 소망, 크리스천, 작은 믿음—
그들은 흔들리면서도 끝내 주님을 향해 걸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24:13)
한 목회자의 고백이 떠오른다.
그는 여덟 날 동안 천국의 환상을 보았으나,
그곳에서 자신이 당연히 만나리라 여긴 이의 부재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천로역정』을 읽는 우리는 안다.
그것은 단지 허황된 환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일어나는 현실임을.
장로와 권사의 직분을 가졌으나 ‘무지’의 길을 걷다가
천국 문 앞에서 끝내 마귀에게 끌려가는 이들이 있음을.
신앙은 말이 아니라,
끝까지 걸어가는 순종의 길이다.
나는 과학을 연구해 온 사람이지만,
믿음의 여정에서는 언제나 성령의 도우심을 구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일으키고,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생명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절망의 감옥 같은 시간에도
하나님은 내게 ‘신실’한 이들을 보내셨고,
그들을 통해 다시 믿음을 세워 주셨다.
하나님은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시며
죄인을 결코 포기하지도 않으신다.
그분은 언제나 회개의 눈물을 귀히 보신다.
이제 나는 안다.
이 글을 써 온 모든 시간이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일하신 흔적이었음을.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각자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고후 5:10)
그러나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은 소망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화평케 하는 자—복이 있도다.” (마 5:3–10)
나는 그 얼굴들을 떠올린다.
천성문 앞에서 미소 짓는 신실,
고개를 떨군 작은 믿음,
눈을 감고 기도하는 소망.
그 길 끝에서,
우리 모두가 그 복된 무리에 속하기를—
조용히, 진심으로 소망한다.
마귀와의 싸움, 순례자의 본질
순례란 무엇인가?”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할 것이다.
“순례란, 끊임없이 마귀와 사탄의 시험과 싸우는 길입니다.”
『천로역정』은 이 진리를 끝없이 증언한다.
크리스천은 아불루온과 싸웠고,
절망의 거인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았으며,
허영의 시장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겨내
마침내 천성에 이르렀다.
작은 믿음 역시 그러했다.
연약함, 불신, 죄의 유혹에 휘둘렸으나
끝내 포기하지 않고 천성문까지 도달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기도하라 하신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이 기도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하늘을 향한 순례자의 호흡이다.
그림에 대하여
이 책에 담긴 88점의 그림은, 대부분 48.5 ×37cm 크기의 한지 위에 수채 물감으로 그려졌다.
한지는 물을 머금고 색을 품는 종이이다. 그 위에 번져 가는 물감의 결을 따라, 나는 마치 신앙의 여정처럼
선 하나, 색 하나를 더하며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나는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Emil Nolde, 1867–1956)를 오랫동안 사사하며, 그가 일본지 위에 남긴 3천여 점의 수채화를 10여 년 동안 탐독했다.
놀데는 “일본지에 수채를 그리면, 화가가 의도하지 않은 생명의 선과 색이 태어난다”라고 했다.
그 말처럼, 한지는 나의 손을 벗어나 스스로 숨을 쉬며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냈다. 그 예기치 않은 번짐 속에서 나는 신의 숨결과 같은 어떤 섭리를 느꼈다.
89점의 그림 가운데 일곱 점은 특별한 사연을 지닌다. 그림 속에서 내가 예상치 못한 형상이 나타났을 때, 나는 그 이미지를 AI에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장면을 샤갈의 꿈결 같은 빛으로 다시 그려주세요.”
그렇게 태어난 일곱 점의 그림은,
인간의 감성과 인공지능(AI)의 상상력이 손을 맞잡은 작은 기적의 결과였다.
이 모든 그림은, 나의 신앙과 사색, 그리고 순례의 기록이다.
물감이 번지고 마르는 그 찰나마다, 나는 다시 한번 묻는다.
“빛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2025년 봄, 서울, 여의도에서
박시룡
글을 쓰는데 참고한 책들
성경전서(2003). 표준새번역 개정판. 대한성서공회
한영스터디 성경(2004), The NIV Korean-English Study Bible. Word of Life Press, Seoul
메시지 신약(2014). The Message: the New Testament(E. H. Peterson). 김수현, 윤종석, 이종태 번역. 복 있는 사람
메시지 구약(2013). The Message:the Old Testament(E. H. Peterson). 이종태 번역. 복 있는 사람
천로역정(2022). Pilgrim's progress (J. Bueyan). 최종훈 번역. 포이에마
천로역정(2018). Pilgrim's progress(J.Bueyan). 유성덕 번역. CH북스
천로역정(2020). The Pilgrim’s Progress(J.Bunyan). 박영호 번역. CLC
함께 걷는 천로역정(2016). 이동원. 두란노
성경배경주석(2010). The Bible Background Commentary. (J.H.Walton, V.H. Matthews, M.W. Chavalas & C.S. Keener). IVP
내가 본 지옥과 천국(2009). 신성종. 크리스천서적
비전성경사전(2001). 하용조. 두란노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에게(2016). 이상학. 두란노
예수, 우리의 복음(2006). Jesus A Gospel(H.J.M. Nouwen). 윤종석 번역. 복 있는 사람
순전한 기독교(2014). Mere Christianity(C.S. Lewis). 장경철 이종태 번역. 홍성사
사도 바울(2009). Paul, The Apostle(J. Pollock). 홍종락 번역. 홍성사
예수를 믿으면 행복해질까(2019). 이철환. 생명의 말씀사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한다(2023). The Reason for God(T.Keller). 최종훈 번역. 두란노
개미(2001). Les Fourmis(B. Werer) 이세욱 번역. 열린책들
신의 언어(2007). The Language of God: A Scientist Presents Evidence for Belief (Frencis S. Colin) 이창신 번역 김영사.
새, 우리들의 선생님(2001). The Birds Our Teachers(J. Stott). 이기반 번역, IVP
솔로몬의 반지(2000). Er redet mit dem Vieh, den Voegeln und den Fishen(K.Lorenz).
김천혜 번역. 사이언스북스
사회생물학(1992). Sociobiogoy(E.O.Wilson) 이병훈, 박시룡 번역. 민음사
과부 황새 그 후(2004). 한국황새복원연구센터. 지성사
동물행동 이야기(2010). 박시룡. 자음과모음
황새, 자연에 날다(2014). 박시룡. 지성사
황새가 있는 풍경(2019). 박시룡. 지성사
끝나지 않은 생명이야기(2021). 박시룡. 곰세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