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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Nov 14. 2023

홍익인간 전당이야기 2

 2-1. 재사(再思) 전기 



 홍익인간 전당(弘益人間 殿堂)이야기는 두 번째 주인공으로 선인(仙人) 중의 한 명인 재사(再思) 명예의 전당에 올린다.  

 재사는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인식되는 고구려의 건국 공신 중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않은 한민족 최초의 무명인사이고, 재사의 생을 통하여 고구려 건국 역사와 당시 왕들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정사(正史) 역사에서 기자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중국인 기자가 세운 나라로 국가적인 엄격한 측면에서는 한민족의 국가가 아니다. 따라서 실질적인 한민족 최초의 국가는 고구려이다. 단군신화 속의 구려 조선은 정사 역사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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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사(再思)  전기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 서고(書庫)에서 책을 보다 잠시 잠이 들었는데, 나는 꿈 속에서 마치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 이야기처럼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장자는 꿈에서 깨어나 “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됐던 것일까.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일까?”하고 생각하지만, 나는 선인(仙人)이기 때문에 이 꿈이 나의 전생임을 명확히 안다.    

  

 내가 어떤 인연으로 고주몽을 도와 BC 37년경 고구려 건국을 도우고수많은 차원의 환생을 거쳐 지금의 세종대왕 시절에 태어나 당시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지는 모르나사료들이 두서가 없음으로 환생의 기억을 더듬어 정리해보고자 한다.  

 꿈에서 본 나의 전생과 현생을 이야기하면서, 사료에 있는 이야기는 청색, 사료에 없는 이야기는 적색 문장으로 구분하였다.      




 1. 전생     


 나의 이름은 재사(再思)로, 흔히 세간에서는 고구려 건국 공신인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를 오·마·협(烏·摩·陜)이라 하고, 나와 무골과 묵거를 재·무·묵(再·武·默)이라고 하지만, 나와 무골과 묵거는 원래 고조선의 신교(神敎)의 맥을 잇고 있던 선인(仙人)으로 모두 선배(先輩) 출신이었다. 


 내 이름인 재사(再思)는 역사를 살펴보고 기록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원래 신교의 전통에 따라 천체를 보며 천기를 읽고 미래를 예측하고 조율하는 무인(巫人)이었는데, 삼베로 만든 마의(麻衣)를 즐겨 입었다. 

 둘째인 무골(武骨)은 무(武)에 출중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원래 선도수련법을 익혀 도를 통한 도인(道人)이었는데, 못쓰게 되어 사람들이 쓰레기로 버린 낡은 헝겊을 이것저것 모아 빨아서 바늘로 꿰매고 누벼서 만든 회색 장삼인 압의(衲衣)를 즐겨 입었다. 

셋째인 묵거(默居)는 소리없이 조용하게 선교의 가르침을 전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선교의 교리를 통하여 덕(德)을 쌓은 성인(聖人)이었는데, 물풀(수초, 水草)로 만든 수조의(水藻衣)를 즐겨 입었다.    

  

 내가 처음 고주몽을 만난 것은 BC 30년대쯤에 보술수의 모둔곡(毛屯谷)에서 무골·묵거와 함께 도를 닦는 중이었을 때다. 

 당시 고주몽은 오이·마리·협보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하여 아버지의 나라인 졸본부여로 가고 있었다.  

    

 나는 고주몽의 모습에서 그의 과거와 미래를 보는데, 내가 보는 고주몽의 가계(家系)는 이렇다.     

 

 옛날에 천제(天帝)가 태양신(太陽神)과 달의 신(월신, 月神)으로 변했고, 태양신이 큰 아들인 인신(人神) 해모수를 낳고, 달의 신이 작은 아들인 지신(地神) 해부루를 낳았다. 양쪽 모두 해씨(解氏)로 천제의 화신(化身)인 동시에 후손(後孫)인데, 해모수는 인신으로 최초의 단군(檀君)이 된다.  

 이 후 단군 해모수가 부루(夫婁, 扶婁)를 낳아 단군 부루가 되고, 해부루가 금와를 낳아 해부루 금와가 된다. 

 다음 대에 단군부루가 고주몽을 낳고, 해부루 금와는 정비와의 사이에서 첫째 대소와 막내 갈사를 낳고 유화부인과의 사이에서 둘째 도모를 낳는다.


가계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천제(天帝)

태양신(太陽神, 1대)- 인신(人神) 단군 해모수(2대)-단군 부루(해부루, 3대)-고주몽(추모, 4대)

달의 신(월신, 月神, 1대)-지신(地神) 해부루(2대)-금와(해부루, 3대)-대소. 갈사. 도모 외 4인(4대)

물의 신(수신, 水神, 1대)- 하백(河伯, 2대)- 유화, 훤화, 위화(3대)


 단군 부루 고주몽의 탄생 비화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단군 해모수가 강가에서 놀다가, 강의 신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 훤화(萱花)와 위화(葦花)를 보게 된다. 해모수는 첫 눈에 유하에게 반해서 구리로 된 집을 만들어 그 안에 술상을 차려놓고 자매들을 초대하고, 자매가 그 안에 들어가서 술 마시고 노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유화를 잡는다. 

 해모수가 자기 큰딸을 납치하고 감금했다는 말에 하백이 사람을 보내 꾸짖자, 해모수는 유화를 돌려보내려고 하는데, 그새 둘이 정이 들어서 유화가 돌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해모수는 정식으로 하백에게 혼인을 요청한다.     


 하백은 해모수의 청혼에 자신과 재주를 겨루어 이기면 허락하겠다고 하고, 해모수는 유하를 얻기 위하여 하백과 재주를 겨루게 된다.  

 하백이 잉어로 변하자 해모수는 수달로 변해 잡고, 사슴으로 변하자 승냥이로 변해 잡으며, 꿩으로 변하자 매가 되어 잡는다. 하백은 해모수와 술법 겨루기를 한 뒤에 세 번을 해모수가 이기고 나자, 그를 사위로 인정하고 신방을 차려 준다. 

 하백은 혹시나 해모수가 자기 딸을 버리고 혼자 하늘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싶어서, 해모수에게 7일은 지나야 깨는 술을 먹여서 취한 사이에 유화와 함께 가죽 자루에 넣어서 그의 오룡거에 실어 하늘로 올려 보내려 한다. 하지만 하백의 생각과는 달리 해모수는 하늘로 올려 보내기 전에 술에서 깨고, 유화의 비녀로 가죽 자루를 찢은 다음 혼자서 오룡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해모수의 도망에 화가 난 하백은 부모의 허락도 없이 외간 남자와 놀아난 유화가 가문을 욕되게 하였다고 생각하고, 유화의 입을 석 자로 쭉 늘려서 추녀로 만든 뒤 백두산 근처의 우발수로 추방해 보내버린다. 유화는 이후로 우발수에서 지내게 된다.       


 어느 날 부여의 금와왕이 사냥을 나가 우발수 강가를 지나게 되는데, 강가에서 고기를 잡던 강력부추(强力扶鄒)라는 어부가 금와왕에게 "요새는 물고기 잡으려고 강에 쳐둔 그물이 이상하게 자주 찢어진다"고 호소한다. 그래서 금와왕이 쇠로 된 그물을 쳐 두게 했더니 입술이 석 자나 되는 여자가 물고기를 먹다 말고 그물에 걸려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늘어진 입술 때문에 무슨 질문에도 대답을 제대로 못하자, 금와왕이 칼로 입술을 세 번 잘라내고 나니 그제서야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금와왕 해부루와 유화의 만남을 이렇게 이루어진다. 말문이 열린 유화는 금화왕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한다. 유화의 사연을 들은 금와왕은 유화를 거두어들여서 동부여의 궁궐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준다.     


 어느 날 부여의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天帝)가 내려와서 이르기를, “장차 내 자손을 시켜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이 곳을 피해가거라, 동명(東明)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이른다, 동해의 물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 만하다.”고 말한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이 것이 부여의 가섭원 도읍 시대로 이름하여 동부여(東扶餘) 혹은 가섭원 부여라고도 한다.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 것은 이처럼 이복형제인 금와왕 해부루의 부여(扶餘) 땅을 빼앗은 것인데, 천제인 해모수가 작은 아들인 해부루에게 큰 아들인 해모수에게 다스리는 땅을 양보하라 한 것으로 중국 특유의 가부장적 문화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어느 날 동부여의 가섭원 궁궐에서 태양 빛이 유화를 계속 쫓아와 비춘 뒤 임신하고, 후에 왼쪽 겨드랑이로 5되 크기의 알을 낳는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금와왕이 알을 깨트리려 하나 껍질이 단단해서 깨뜨리지 못하고, 몇 번이고 알을 내다 버려도 동물들과 새들이 와서 알을 감싸주며 보호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유화에게 돌려준다. 이후 유화가 알을 포대기에 싸서 따뜻한 곳에 고이 놓아뒀더니 알을 깨고 한 아이가 나오고, 아이의 이름을 추모(鄒牟)라 짓는다. 추모는 나라 이름 추(鄒)와 소 우는 소리 모(牟)의 합성어로 구려(句麗)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의미이다.    

 추모는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걸으며 말을 깨우치고 자라서는 힘이 세고 활도 잘 쏘았는데, 어느 날 왕자들과 사냥을 나갔다가 다른 왕자들이 하나도 못 잡아 쩔쩔매고 있을 때 혼자 노루를 무더기로 잡기도 한다. 이에 샘이 난 왕자들이 노루를 모두 빼앗고 추모를 나무에다 묶어놓고 돌아가 버린다. 그런데 다음 날 추모가 나무를 뿌리째 뽑아서는 묶여서 나무를 등에 진 채 그대로 걸어 궁으로 돌아간다. 

 추모는 성장하여 부인 예씨를 맞이하여 아이를 가지고, 부부가 모친 유화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던 중, 그를 시기한 대소를 비롯한 동부여의 왕자들의 간계로 피살당할 뻔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후 유화는 금와왕의 아들이었던 대소 왕자와 그 형제들이 추모를 시기하여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 금와왕 해부루 에게는 해씨 성의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금와 왕 사후에 동부여를 계승할 사람이 대소왕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유화는 아들인 추모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아들을 부여 밖으로 도주하게 만들 계획을 세운다. 

 유화는 어느 날 추모에게 채찍을 들고 와서 왕의 말들을 내리쳐서 가장 멀리 뛴 말을 골라 그 말의 혀에 가시를 놓아두게 한다. 그리고 금와왕에게 부탁하여 왕자들에게 경마시합을 시키게 하고, 시합에서 추모가 우승을 한다. 금와왕이 추모에게 상을 내리는데, 추모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제대로 먹이를 먹지 못해 비실비실 해져있었던 그 말을 택한다. 경마에서 승리한 우수한 말은 결국 다른 왕자들의 몫이 되고, 비실비실한 말이 추모의 몫이 된다. 

 추모는 어머니 유화의 기지로 명마를 타고 무사히 가섭원 부여에서 벗어나고, 가까운 벗인 오이·마리·협보와 함께 어머니와 임신한 아내를 남겨둔 채 옛날 동부여가 있던 졸본 땅으로 떠난다. 넷은 뒤따르는 부여군의 추격을 피해 압록강 동북방의 엄 호수를 건너고, 강의 신 하백의 도움으로 자라와 물고기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 무사히 강을 건넌다. 그리고 강을 건넌 후 부여군을 따돌리기 위해 이곳 모둔곡으로 들어와 우리를 만난 것이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인 추모와 의기투합해 그를 도우기로 하고, 추모를 따라 졸본 땅으로 향한다. 

 이후에 추모를 중심으로 한 우리 일행은 졸본 땅에 도착하고, 그 곳에는 추모의 친가 혈족인 할아버지 해모수와 아버지 부루 단군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졸본부여라 했다.  우리가 선교의 가르침으로 그들을 설득하여 추모는 왕녀 3명 중 차녀와 결혼해 졸본부여 왕의 사위가 된다.    

 

 BC 37년, 추모가 22세 되던 해에 해모수의 위업을 이어 국호를 북부여라 고치고 동명제(東明帝) 즉 동명왕(東明王)이 된다. 

 당시 오이(?~?)와 마리(?~?)와 협보(?~ BC 3년 이후)는 공신이 되었고, 주몽은 우리에게 각각 성을 지어 주는데, 재사는 극씨를 받아 극 재사가 되고, 무골은 중실씨를 받아 중실 무골이 되고, 묵거는 소실씨를 받아 소실 묵거가 된다. 우리는 당시 관직에 나가지 않는데, 신교의 선인으로 남아있던 교인들과 함께 신앙생활과 포교활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홀본(忽本)이라고도 불렀던 졸본(卒本) 땅은 말갈에게 자주 약탈을 당하고 있었는데, 주몽은 자주 졸본 땅을 약탈하던 말갈족을 물리쳐서 그들이 다시는 졸본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고, 이때 두 번째 부인 소서노를 맞이한다. 

 소서노(召西奴)는 졸본 사람인 거상(巨商) 연타발(延陀勃)의 딸로 추모성왕과 혼인하기 이전에 북부여의 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혼인하고, 우태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인 온조와 비류를 얻으나, 남편 우태가 일찍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된 후 졸본으로 돌아와 살다 주몽과 인연이 맺어진 것이다. 

 동명왕과 결혼한 소서노는 북부여의 창업의 기반을 다질 때 집안의 많은 재물을 이용해 내조하며 이를 도운다. 이 때문에 동명왕은 소서노를 극진히 아끼며 후하게 대접하였고 소서노가 데리고 온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 또한 친자식처럼 아낀다.     


 BC 33년 동명왕은 왕위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날에 궁실(宮室)과 성(城)을 수축하고, 근처에 있던 비류국(沸流國) 왕 송양(松讓)을 만나 자신이 하늘의 자손임을 밝히며 화친(和親)을 권했다. 비류국은 압록강의 만주 쪽 지류인 비류수(沸流水, zh:浑江) 상류에 있었던 부족국가였다. 

 비류국 송양은 " 북부여보다 비류국이 더 오래됐다면서, 만든 지 얼마 안 된 북부여가 비류국 밑으로 들어오는 게 오히려 맞는 거 같다." 고 도발하면서 활쏘기 대결을 청했다. 

 먼저 송양이 사슴 그림을 100보 밖에다 두고 활시위를 당겼으나 힘겨워했다. 반면 그 모습을 본 동명성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를 들고 오게 하고, 100보 밖에 매달아 놓고 쏘아 옥가락지를 박살 내 송양을 깜짝 놀라게 했다.

 동명왕은 송양이 떠나고 신하들에게 "저놈이 날 무시하는 건 우리나라가 새로 만들어졌기에 고각(鼓角)이 없어서 그래. 고각의 위의(威儀)가 없어서 비류(沸流)의 사자가 왕래함에 내가 왕의 예로 맞고 보내지 못하니 그 까닭으로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고각은 국가 대사가 있을 때 위엄을 주기 위해 부는 뿔피리를 말한다. 

 당시 북부여에는 부분노(扶芬奴)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동명왕에게 "제가 비류국의 북을 가져오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동명성왕이 "적국에 있는 물건인데 어떻게 가져오려고?"라고 하자, 부분노는 “왕께서는 천제의 아들이기에 각종 고난을 이겨내고 오셨습니다. 천제가 우리를 돌봐주는 한, 가져올 수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결국 부분노가 비류국의 북을 가져오고, 북이 사라진 걸 알게 된 비류국에서 고구려에 따지기 위해 사신을 보내는데, 동명성왕은 북에다 시커멓게 칠을 해 오래된 것처럼 위장한다. 결국 그 모습을 본 비류국의 사신은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가고, 그 소식을 들은 송양도 반박을 하지 못한다.

 이 후 송양이  "고구려와 비류국, 어느 나라의 수도가 먼저 세워졌는지 확인해서, 더 일찍 세워진 나라 쪽을 섬기도록 하자!"고 주장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동명왕은 궁궐 지으면서 썩은 나무로 기둥을 세워 마치 1,000년도 넘는 듯한 모습을 하도록 한다. 


 결국 송양이 주몽에게 패배를 인정하여 굴복하고, 이로부터 동명왕은 성을 해에서 고(高)’ 이름을 추모에서 주몽(朱夢)으로 바꾸어 고주몽이 되고, 구려(句麗)의 옛 땅을 되찾겠다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고구려(高句麗)로 바꾼다. 이분이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인 주몽(朱夢)이다. 주몽은 추모의 한자 차음어(遮音語)로 활을 잘 쏜다는 의미이다.      

 주몽은 나라가 커졌다는 의미로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불리며, 비류국을 다물국(多勿國)으로 개칭한다. 

 다물(多勿)은 '원래 상태로 되돌리다'라는 의미이다. 송양의 영토를 정복하였지만 제후국으로 직접 다스리도록 그에게 땅을 되돌려 준다는 의미로 사용했는지, 아니면 구려의 고토(古土)인 중국 땅을 되찾겠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구려라는 이름만으로 보아서는 후자가 옳은 것 같다.


 여기까지는 동명왕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우리가 동명왕과 의기투합한 것은 그가 천제의 아들이었고, 핍박받는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누구보다도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잘 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동명왕이 고구려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남쪽으로 동족(同族)을 향한 정복 전쟁을 강행하면서 우리와의 사이에 문제가 생기 시작했고, 무골과 묵거는 궁(宮)을 떠났다.      


 BC 32년, 동명왕은 즉위 5년째 되는 해 10월에 오이와 부분노(扶芬奴)에 명해서 태백산 동남쪽에 위치한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고 성읍으로 삼고, 겨울 11월에 장수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여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사실 비류국과 행인국과 북옥저는 삼한의 땅으로 신교신자들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삼한의 백성과 신교 교인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피를 흘렸다. 이때 무골과 묵거는 신교신도들과 함께 있다 목숨을 잃었고, 궁에 남아있던 나만 남았다. 

 이때부터 신교 교인들은 동명왕과 척을 지게 되었고, 동명왕에게 이들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나와 동명왕 사이도 차츰 사이가 벌어져 결국 나는 먼 곳으로 떠나 은거하였다. 북부여가 고구려로 바뀌었듯이 동명왕이 변했으니, 동명왕과 나의 인연은 그것으로 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나마 협보가 도와서 은거 중에도 포교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당시 협보는  장수였던 무관 오이, 마리 등과는 달리, 행정관료나 학자로 활동하면서 동명왕의 정복 전쟁에 찬성하지 않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나를 도왔던 것이다.       


 BC 24년 8월 (동명왕 14년), 동부여에 남아있던 유화는 아들이 건국한 북부여에 가지 못하고 결국 동부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에 금와왕은 태후의 예로써 유화의 장례를 치르고는 신묘를 지어 주었다. 이후 고구려에서는 유화를 시조인 동명왕과 더불어 시조신으로 섬기며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BC 24년 같은 해 금와왕을 이어 대소왕(帶素王, 재위: 기원전 24년~서기 22년 2월)이 동부여의 왕이 되었다.      


 BC 19년( 동명왕 18년) 4월, 동명왕은 동부여에서 아들 유리가 도망쳐 오자 태자로 삼았다.

유리는 부러진 칼을 가지고, 자신의 아버지라며 찾으러 왔다. 유리의 말에 의하면 어렸을 적에는 장난꾸러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릴 적 길거리에서 참새를 쏘다가 실수로 물을 길어 가던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는데, 화난 부인이 “이 아이가 아비가 없어서 이처럼 논다.”고 꾸짖었다고 한다.

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어머니가 “너의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서 나라에 용납되지 못했다. 그래서 남지(南地)로 도망하여 개국(開國)하여 왕을 칭했단다. 떠날 때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내가 남긴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칠각형의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시오. 만약 이것을 찾는다면 곧 나의 아들임을 알겠소.’라고 했다” 고 대답했다고 한다.

 유리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산에 가서 칠각형의 돌과 소나무를 한참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지쳐 돌아왔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침, 마루 위에 앉아 있다가 자신의 집의 소나무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이 칠각형이었다. 이에 기둥 밑 칠각 주춧돌 아래에 칼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곧 기둥 아래를 뒤져서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찾아냈고,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 구추(句鄒), 도조(都祖) 등의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卒本)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임금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고, 기뻐하며 많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리를 태자로 삼았던 것이다.


  BC 19년(유리왕 1년) 9월에 동명왕이 40세로 승하하여 아들 온조가 사당을 세우는데, 태자 즉위 5개월 만인 유리가 암투 끝에 왕이 된다. 협보는 내정을 관장하는 대보(大輔)의 직위까지 오르는데, 유리왕의 태자 즉위에 큰 역할을 한 때문이었다.       

 BC 18년(유리왕 2년) 7월에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을 왕후로 삼는다. 그리고 이 해에 이복동생인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다.

 BC 17년(유리왕 3년 ) 10월에 왕후가 사망하고, 임금은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후실로 삼는다. 한 사람은 골천 사람 화희(禾姬), 다른 한 사람은 전한 사람 치희(稚姬)이다. 어느 날 유리명왕이 사냥을 가는데, 두 여인이 크게 싸워 결국 치희가 돌아가 버리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유리명왕이 급하게 그녀를 찾아가 달래나 끝내 치희는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이때 유리명왕이 슬픔을 느끼고 지은 시가 바로 그 유명한 황조가(黃鳥歌)다.     


 유리왕은 주변 국가들과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고, 특히 국력이 강한 부여와는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BC 9년(유리왕 11년)  선비족과 전쟁을 벌이고 부분노를 시켜 선비를 복속시켰다.

 BC 6년(유리왕 14년) 봄 정월, 동부여 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인질 교환을 청하였다. 임금은 동부여가 강대한 것을 꺼리며 태자 도절(都切)을 인질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자 대소가 화를 냈다. 그해 11월, 대소가 군사 50,000명을 이끌고 침략하여 왔으나,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자 곧 돌아갔다.


 유리왕의 계속된 전쟁으로 협보와의 사이에 마찰이 계속되는 가운데, 유리왕이 무당과 무속신앙을 믿고 과한 사냥을 계속하면서 결정적으로 협보와의 사이에 금이 갔다.

 BC 1년(유리왕 재위 19년) 가을 8월, 교제(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지낼 때 쓸 돼지가 달아났다. 임금은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시켜 쫓게 하였다. 그들은 장실(長屋) 늪 가운데 이르러 돼지를 발견하고 칼로 그 다리의 힘줄을 끊었다. 임금이 이것을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제천(祭天)에 쓸 제물에 어떻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가?” 임금은 마침내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그해 9월, 임금이 병에 걸렸다. 무당이 말하였다. “탁리와 사비가 귀신이 되었습니다.” 임금이 그를 시켜 귀신에게 사과하게 하니 곧 병이 나았다.

 같은 해 12월, 임금이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5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大輔) 협보(陜父)가 간하여 말하였다. “임금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치안 관련의 행정을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을 가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습니다. 만약 임금께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저는 정치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흩어져서 선왕의 업적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유리왕의 침략전쟁과 과한 사냥 그리고 무당과 무속에 대한 믿음이 계속되자, 협보의 간언이 이어졌고, 결국 유리왕은 협보를 내치고 신교(神交)를 탄압하였다.  

서기 1년( 유리왕 재위 12년) 1월, 유리왕의 장남 도절태자가 죽는데, 사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서기 3년 (유리왕 22년)에 수도를 졸본성(=오녀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이후 남하정책을 펼친다.

서기 3년(유리왕 22년)에 협보가 유리왕에게 "정사를 소홀히 하니 바로잡으소서"라고 간하자,분노한 유리왕이 협보를 대보에서 파하고 관원(官園)의 일을 보게 한다. 

 관원은 관청의 정원(庭園)을 돌보는 정원사로 개국 공신에게는 사실상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일이다. 유리왕의 토사구팽에 실망한 협보는 그대로 고구려를 떠나서 남쪽의 한(南韓)으로 떠나 버린다.   

  

 협보가 떠나자 나를 잡으러 궁에서 군사들을 보내왔다. 나는 많은 신도들과 함께 감옥으로 끌려갔고, 협보와 공모하여 역모를 도모했다는 혐의로 참수형이 내려졌다. 





-  "재사(再思) 전기 2편(현생 편)" 에서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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