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먼저, 나를 이해해 준 까만 건반

by 빛소영

어릴 적 우리 집엔 커다란 피아노가 있었다.

별생각 없이 오가며 띵동거렸던, 나에겐 그냥 ‘집에 있는 물건’ 중 하나였다.


일곱 살 어느 날.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그 친구는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였다.

작은 손으로 건반을 누르며

맑고 예쁜 소리를 만들어냈다.


나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소리, 그 손끝, 그 표정까지.

무언가 마음 깊은 곳이 두근거렸다.


친구가 돌아간 뒤,

나는 그 아이가 치던 곡을 따라 쳐보았다.

배운 적도, 악보를 본 적도 없었는데

그 소리가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마음이 먼저 기억해버린 것처럼.


내 손이 기억하고, 귀가 따라가고,

마음이 흘러갔다.


엄마는 말이 없었다.

그저 나를 한참 바라보다

피아노 선생님을 찾으셨다.


내 나이 일곱 살.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날, 나는 피아노와 통했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무도 없던 거실,

혼자 앉아 두드리던 건반.

그 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내 안에서 울리던 감정이

소리로 흘러나왔고,

피아노는 그걸 알아들어줬다.


그게 내가 세상과 처음으로

소통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마치

아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하나의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피아노 앞에 앉았다.

세상 누구와도 나눌 수 없던 말들을

건반으로 조용히 풀어냈다.


기쁠 때는 경쾌한 리듬으로 춤을 추고

슬플 때는 조용히 함께 울었다.


피아노는 나에게

‘배워야 하는 기술’이 아니라

내 감정을 들어주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 작은 손끝으로 나는

나를 달래고, 위로하고, 살아냈다.


아무도 몰랐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내 인생은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