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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Oct 17. 2023

새벽밤을 날아서

<밝은 밤> 독후감 응모작


15년 만이었다. 새벽까지 베개가 젖도록 내내 운 것은.

 그것도 책을 읽다가 말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자기 전에 항상 베개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그리고 아침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일어나 학교에 가고 다시 울기를 가장 누군가가 필요한 시기에 그저 끊임없이 반복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나는 어렸으며 의지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학교에서는 물기를 가득 머금은 솜처럼 수축하여 있다가 자기 전에 쏟아내듯 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게 그 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어느덧 그런 일도 희미해진 성인이 되어 하루하루 바쁘게 보낸다.


 그런 나에게 이 소설은 떠올리기 싫은 과거로 생생하게 되돌리는 힘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딱 15년이 더 지났지만, 내가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물러있음을 느꼈다. 내 안에 있는 ‘작은 소녀’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소설 속의 주인공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후,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희령’이라는 지역에 가고 외할머니와 우연히 재회한다. 그리고 백정의 딸로 태어나 전쟁을 겪으며 한 많은 인생을 살았던 증조모 ‘삼천’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언의 위로를 받는다. 한편, 소설의 현재 시점에서는 지연의 언니의 죽음 이후로 서로 조심스럽지만 결국 상처를 주게 되는 지연과 어머니의 이야기가 오버랩되며,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애환이 소설 내내 바느질하듯이 촘촘히 엮여간다.

 증조모는 할머니에게, 할머니는 엄마에게, 엄마는 다시 딸에게 삶에서 받은 상처와 사랑을 모두 쏟아내며 삶의 원형을 다시 반복해 간다. 마치 세포가 자가복제를 하듯이, 지리멸렬하고 처절한 삶은 계속된다는,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여자 팔자는 뒤웅박이다’라는 말로 흔히 농담처럼 소모되듯, 사람들이 굳이 알려고 하지는 않는 평범한 어머니와 할머니들, 그리고 딸들의 이야기이다.


소설 속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어머니, 할머니들도 힘든 삶을‘살아내셨다’. 굴곡 많은 시대에 여자로 태어났단 이유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고 존재 자체로 귀히 여겨지지 못한,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불행하게 살다가 내가 어릴 적 일찍 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특히 내 기억 속의 친할머니는 소설 속 지연의 할머니처럼 나에게 예전에 살아온 얘기를 많이 하셨다. 두 집 살림을 차린 할아버지의 본처로서 9형제를 모두 키워내시며 인생의 모진 풍파를 견디신 할머니는 어머니가 없는 어린 손자 손녀를 돌본다는 명목으로 나와 잠깐 같이 사셨다. 할머니의 옛날 얘기가 그때는 지겨웠는데, 책을 읽으며 많이 생각이 났다. 할머니의 얘기를 들으면, 저 시절에는 어떻게 다들 살았을까 싶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여자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한 인간이 아니라 삶이 정해준 프로그램대로 사는, 아이를 낳고 키우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세상과 남자들은 여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지만, 고분고분하게 살 수밖에 없는 세상. 결국 할머니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라지지 않는, 삶의 애환과 함께 요양원에서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 나와 동생이 갈 때마다 진수성찬을 차려주며 항상 다정하셨던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친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외할머니도 여자로서 힘든 삶을 살아오시며 자식들을 키워내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막내딸이 죽고 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나와 동생을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외할머니의 마음을 나는 이제 영원히 알 길이 없다. 외할머니의 진수성찬과 조기를 발라주시던 따뜻한 손길만이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내 편이 없는 채로 방치된 채 외롭게 자라왔다. 삶은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삼켜야 할 알약이었다. 혹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혼자만의 길고도 지난한 싸움. 돌아보면 쉽지 않은 인생이었다. 스스로 죽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길 뿐이다. 그러나 친할머니가 물려주었는지, 삶의 괴롭힘에 지지 않으려는 기질과 근성으로 어린 시절을 버텼다. 사실 마음속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살아계셨어도 나한텐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는, 삶이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본능적인 직감이 나를 내내 괴롭혔다. 그만큼 나에게는 어머니의 죽음 자체보단 어머니의 생전 불행한 삶이 더 상처였다. 어머니는 항상 괴로워 보였고, 그런 어머니에게 공감이나 사랑을 바라기는 힘들었다.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고 혼자였다. 하지만 그런 사랑을 바라는 지극히 당연한 내 마음조차도 죄책감을 느낄 만큼 일단 어머니의 행복을 바랐던 것 같다. 딸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나마 나를 지탱했던 약간의 꿈도 빛도 희망도 잃어가고, 소설 속 지연처럼 이런저런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며 마음의 문을 닫은 내가 있다. 감정표현에 서툴고 억압된 어머니에게 공감받지 못하고 상처를 ‘쌓아가듯’ 받아 온 지연에 심정에 공감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나와 같았으니깐, 책 속의 모든 문장이 사무치게 피부에 바로 와닿은 적은 처음이다.


 그렇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설 속의 할머니와 지연의 어머니 미선, 그리고 주인공 지연의 이야기에 나와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삶이 그렇게 계속 겹쳐 보였다. 선명한 그들의 얼굴이, 친할머니의 옛적 이야기가, 아른아른 눈이 깜빡이듯이, 종이 위에 살포시 겹쳐졌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그들은 세상에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솔직히 지연이 내심 부럽기도 했다. 서로 미워하고 상처를 주어도 살아있다는 것은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거니깐, ‘다시 웃을 수도’ 있다는 거니깐.


 사실 오랫동안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초년부터 이 정도의 외로움과 고통을 내게 주진 않았을 테니. 그래서 소설에 나오는 ‘고양이 같은’ 명숙 할머니처럼 사람들에게 기대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멀리했다. 더 이상 상처받기 싫었기 때문이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과 실망감은, 힘든 삶을 살았던 할머니, 외할머니와 그리고 어머니의 인생을 타고 나에게 내려오는 뿌리 깊은 여자의 삶에 대한 회의감과 자연스레 하나가 되었다. 또한 여자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으면서 대접받기를 원하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 종이 조각처럼 내팽개치는 이기적인 남자들에 대한 환멸을, 항상 나의 일부로서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과 얽히기도 싫고, 최대한 거리를 두고 안전하게 떨어져 살다가 죽고 싶었다.

 그런 나의 아픈 무의식과, 나의 혈육들로부터 나와서 다시 나에게로 얽힌 서사가 보이는 것은 가슴이 아픈 일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나의 치부와, 아픈 상처를 동시에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아픈 내 마음을 인정하니, 마음이 너무나 편했다. 마치 과거의 나 자신이 받지 못한 위로를 한 번에 받은 느낌. 내가 원하던 것은 이런 공감이었을까? 결국 내가 원하던 것은 ‘과거의 나 자신에게 전하고 싶었던 스스로에 대한 위로’였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잘못 먹은 것을 다 토해낸 사람처럼 홀가분했고, 새벽 4시에 깊은 잠이 들었다. 며칠 뒤에는 생전 꿈에 나오지 않으시던 외할머니가 갑자기 꿈에 나오셨다. 꿈에 나온 외할머니는 여전히 다정했고, 나를 위로해 주셨다. 장례식도 찾아뵙지 못한 손녀 꿈에 나와서 할머니는 나를 걱정하셨다.



‘깊은 밤을 날아서’라는 노래가 있다.   

   

“우리들 날지도 못하고 울지만 / 사랑은 아름다운 꿈결처럼 / 고운 그대 손을 잡고 / 밤하늘을 날아서 궁전으로 갈 수도 있어…….”     

 마치 노래 가사처럼 이렇게 나는 그저 책 한 권을 통해 과거를 나를 만날 수 있게 되었고 나 자신의 오래 묵은 어둠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새벽 밤을 날아서’ 과거로 가고, 할머니들과 어머니를 만났다. 그들의 손을 잡고 과거로 돌아가 다시 어린 소녀가 된 듯, 새벽 내내 울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천문연구원이라는 주인공의 직업과 맞물려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우주’에 관한 언급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중략)…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이 구절을 보는 순간,‘나는 그저 세상의 일부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표현처럼, 언젠가는 사라질 우주의 먼지로서,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고 상처 입고, 상처 주고, 모든 것을 잊은 채 다시 사랑하는 숙명을 지닌 인간이란 존재. 그래, 나도 인간이다. 인간이니깐, 마음이 있으니 아픈 거야. 거기에는 어떠한 이유도, 가치판단도, 자기 연민도, 분노도, 실망도, 상처도 없었다. 상처를 받고 아픔을 느끼는 나의 생생한 ‘마음’이,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이 그 순간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여린 마음을 건드는 것은 처음에는 아픔이지만, 결국에는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이다. 이 세상에 엔트로피도, 시간도, 우주의 끝도 초월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사랑이다. 삼천이가 새미와 나누었던 사랑, 그 딸들인 지연의 할머니와 재비의 딸이 나누었던 사랑, 그리고 다시 지연으로 내려오는 사랑. 그것이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닌가 싶다.     


 더불어 소설을 쓰신 최은영 작가님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책을 통해서 치유받는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읽었지만, 서른이 넘은 지금에야 그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그 누가 건넨 다정한 위로의 말보다도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남아있는 생에는, 흘린 눈물만큼 다시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영겁의 시간이 지나, 돌아가신 할머니와 외할머니, 어머니와 우주의 별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날을 꿈꾼다.      


 언젠가 우주는 사라지겠지만, 그들은 나의 기억과 마음으로 만들어진 우주 속에, 어쩌면 나라는 존재를 통해, 지금도 내 안에 생생히 살아있음을, 그들이 내게 보내는 사랑과 함께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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