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들은 소위 말하는 ‘정신병자’이다. 남편을 잃고 외로움에 주변의 있는 모든 남자와 스캔들을 일으키는 불안정한 여자 ‘티파니’, 아내의 외도로 실성한 정신병원에서 막 돌아온 남자 ‘팻’, 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팻에게 티파니는 이렇게 말한다. ‘내 안엔 추한 부분이 있지만, 난 그걸 좋아해요 다른 부분들만큼이나!’ 이 대사를 듣는 순간 난 그녀가 몹시 부러웠다. 어딜 가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방황하고 흔들리는 그녀이지만, 자기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고 긍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당신이 옳다>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존재에 확신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즉 마음이 아픈 이유를 ‘나 기근’현상으로 설명한다. 누구나 자기 존재가 주목받을 때 사람은 살아있는 가치를 느끼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한 개인이 너무나도 쉽게 소외되기 때문이다. 개개인에 대한 주목보다는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이 가진 소위 ‘스펙’에 집중한다. 내가 가진 개성이나 본래의 고유한 성질이 ‘카테고리화’되어 개별적 존재가 아닌 집단으로 묶여버린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아닌 우리가 가진 외적인 조건들에 집착한다. SNS에 흔히 보이는 수많은 사진과 글들을 살펴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표현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남들이 보는 자기 자신의 ‘외적인 조건’들을 과시하거나, 우월감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우월한 ‘집단’ 속에 넣으려는 성향이 물씬 느껴진다. 그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진짜 ‘나’가 부재한 내가 되고 싶은 ‘나’에 집착하는 기괴한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개개인의 진짜 속마음, 진짜 모습은 환영받지 못하며 가짜 ‘나’를 드러내는데 집착하는 ‘관종’, 혹은 자신을 꽁꽁 감추고 숨어버린 ‘히키코모리’, 극단적인 두 유형이 나타난다.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을 개별적인 존재로서 인정하지 않는 문화가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정신병자 혹은 너무 보편적인 사람들이다.
나 역시도 오랫동안 진짜 ‘나’와 사회가 원하는 ‘나’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나는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인줄 알았다. 그러나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진짜 나의 감정, 나의 현재 모습은 깡그리 무시한 채 나의 부정적인 모습을 전혀 인정하지 못했다. 단 한번도, 나의 어두운 모습을 들여다보려하지 않은 것 같다. 최대한 밝고 아름다운 이상적인 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은연중에 의식한 채 검은 부분을 억지로 흰색으로 덧칠하며 살았다. 추한 부분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 역시 관종이나 히키코모리와 다르지 않았다. 마음이 아팠는데 아픈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니까, 내가 정상인줄 알았다. 곪은 상처는 마음 속 깊이 있어, 아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상처와 아픈 마음을 자각하니, 서서히 진짜 내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 내 모습은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사랑을 갈구하고, 우울하고, 슬프고, 감정기복이 심한, 영화에서 봤던 티파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했고, 난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진짜 나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혹은 드러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심리적 CPR’, 즉 ‘진실된 공감’을 이야기한다. 응급 환자한테 심폐소생술을 하듯, 마음이 아픈 사람한테는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 같은 툭 던진 질문이, 무겁지 않고 오히려 가벼운 ‘공감’이 사람의 마음을 다시 따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내가 읽었던 무수히 많은 심리학 서적에서는 아픈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을 ‘포기’하라는 조언이 많았다. 특히 몇 년 전에 붐이 일었던 ‘힐링’트렌드와 맞물려 욕심과 인정욕구가 많은 현대인들에게 쉬어가라는 스타일의 책들을 많이 읽다보니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 정답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당신이 옳다>에서는 사람이 아픈 이유는, 원래 사람이라는 존재가 자기 존재에 주목을 받아야 ‘살 수 있다’라고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공감’이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의 마음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원래 관심이 필요하고, 원래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마음이 아픈데,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쉬게도 해보았지만, 왠지 해결되지 않는 찝찝함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그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피’가 아닌 정면으로 내 상처를 마주하고,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진심으로 공감하고 소통해야만 ‘성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너무 어려웠다. 내 상처를 보여주기도 싫고, 다른 사람의 상처에는 관심도 없고, 공연히 다른 사람의 상처를 건드렸다가 민폐를 끼치는 것도 싫고, 그러다 너무 깊은 관계가 되는 것도 싫었다. 내 상처도, 타인의 상처도 귀찮고 불편했다. 그래서 나이는 먹었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성장하지 못했다. 그게 나의 문제였고, 지금의 내 모습이다.
하지만 <당신이 옳다>를 우연히 읽게 되어, 이제 나의 문제를 자각하고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힘을 얻은 것 같다. 이런 나를 인정하니, 타인에게도 예전보다 더 부드러워지고 상냥해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책을 읽고 난 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고민이 있었을까?, 다들 요즘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낼까?’라는 궁금증이 생기는 걸 보면 확실하게 발전이 있다.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는 별 것 아닌 말, 이런 사소한 말이 타인의 심장에 정확하게 적중하고, 서로 소통하고, 위로하는 일. 그 별거 아닌 일이 사람을 살린다면, 나라고 못하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아직 서투르지만, 그 동안 나의 상처를 회피하고, 타인의 상처를 외면했던 나의 성향을 변화시키고 싶다. 결국, 나도 사람, 너도 사람 인 것을, 그리고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기 때문에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을. 그리고 각자의 모습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 받고 싶고, 또 공감받고도 싶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티파니’와 ‘팻’이 댄스 경연대회에 나가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다. 오합지졸이었던 두 사람이 아름답게 춤추는 장면을 보며 ‘조화’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두 정신병자들이 춤을 추는데 그 어떤 장면보다 생동감이 넘치고 몰입감이 있었다. 과연 두 사람은 정신병자였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모르는 겉만 정상인들이 판치는 사회에서 자신을 제대로 긍정할 줄 아는 ‘건강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춤으로 소통하는 장면이 바로 책에서 말하는, 그리고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공감’이라는 심폐소생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