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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비 Dec 22. 2019

인문학에 대하여 글을 쓰고 싶다

인문학과 삶에 대하여 작은 의견과 소통의 첫걸음, 글쓰기



  중학교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문득 내면의 목소리 '나는 누구인가, 지금 이 생각하는 나는 무엇일까? 나란 존재의 근원은?' 그 당시 어느 과목에서의 배운 '질풍노도의 시기'가 그것을 설명해주는 작은 단서였다. 그때의 그 강열함은 아직도 나의 내면 어딘가에서,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에너지원이 되어 지금의 이 순간 익숙하지도 않은 글쓰기로 나를 이끌고 있다.

 

 나는 글쓰기와 친해질 수 없을 것이라 항상 생각했다. 이과계열 고등학교를 평범한 또는 그보다 못한 성적으로 학교를 다닐 때는 활자가 그렇게 익숙해지지가 않더라. 지금 돌이켜 보면 차라리 공업계열 고등학교를 갈걸 그랬다. 그렇다면 지금 하는 일에 더욱 도움이 되었을 거라 생각이 된다. 물론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과거를 부정한다는 것은 영화 [나비효과]처럼 지금 나를 다른 곳에 있게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공업계열 고등학교로 가라는 권유를 하셨다. 평균을 조금 넘어서는 나의 성적으로는 이과 계열 고등학교에서 좋은 결과를 얼을 수 없다고 하셨다. 그 였는지 그녀 였는지 당시 담임선생님의 말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나에게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그런 담임선생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들도 가기에 이과계열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다수의 인원들이 그곳으로 달려가기에, 절벽 아래로 다 같이 달려드는 쥐떼들처럼 그 흐름에 내 몸을 맡겼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을 애써 덮어 두고 나니 나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거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빈자리를 채워간다. 한결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리고 눈 앞에 바다가 점점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활자를 보는 것이 늘 힘들었다. 활자는 늘 그랬듯이 나에게 졸음이라는 선물을 10분 안에 선물한다. 그리고 몇 년 전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을 마주하기 전까지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인생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울리지 않고 어색한 옷을 입은 것 같은 불편한 글쓰기는 나에게 어렵기만 하다. 나의 오래된 친구들이 내가 글을 쓴다고 하면 "미친놈!?"이라 하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가까운 이들에게 그들이 무어라 생각하든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이야기를 가끔 하게 되었다. "난 글이 쓰고 싶어. 언젠가 글을 쓸 거야." 그리고  몇 해가 지나고, 허구와 같은 그 말을 마음속 어딘가에 품고 카페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남들에게 들려주어도 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안고서.

 

 내가 고민하고 나를 몰두하게 했던 것은 "인문학과 철학"이라 불리었다. 오래된 도서관 구석에, 사람들이 즐겨 찾지 않는 이유로 먼지가 쌓여 있을 책과 같은 고리타분하고, 입 밖으로 꺼내면 꼰대라는 수식어가 붙을 것 같아 쉽사리 다른 이와 이야기할 때 주제로서 선정되지 않는 이야기. "인문학과 철학" 그것은 종종 나에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과 함께, 희열과 즐거움을 선물해 주었다. 그러나 내향적인 나에게 나를 더욱 내향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던 주제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나와는 달리 이런 이야기가 재미없나 보다. 자기표현에 서툴던 나는 가끔 다른 이에게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성향은 나를 자연스럽게 상대와 또 어색한 관계를 만들어 주었다. '이런 이야기는 남들에게 하면 안 되는구나' 나는 그렇게 또 삶에 대해 배워간다.


 좋은 정보 전달의 기본은 나라는 사람을 투명하게 들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기본적인 지식을 바탕에 두고 글을 읽는다면 더욱 그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적 특성상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에 조금 더 수월하고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나를 투명하게 드러내기로 했다. 철학이란 주제는 많은 물리적 정신적 에너지 소모를 요한다. 옮고 그름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에, 그래서 어느 곳에 닻을 내려야 할지 알 수 없기에, 나의 철학에 대한 물음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의 희망을 품고 미지의 바다를 향했듯, 나는 이제 글쓰기를 통해 내 글을 읽는 이와 어색하지 않게 마주하길 희망한다.



  

 어느 영화였는지 모를, 그래서 제목과 내용까지 기억나지 않는 영화가 있다. 다만 나는 어느 영화에서 봤었을 거라 추측하는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 태어나 세상에 왔다 간다는 흔적’을 남기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 그리고 죽음. 치열하게 또는 그렇지 않게 각자 살아가는 각자의 인생. 그것은 항상 죽음으로 마무리되어 진다. 최소한 이 지구에 그것을 넘어서는 지적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탄생은 각자의 죽음으로 마무리되어 진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치열한 삶? 아니면 깨달음? 유인원도 부처도 모두 하나 예외 없이,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남을 죽음으로 마무리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던져진 것인가. 그것에는 논쟁할 가치가 없다. 다만 유기물의 자기 보전성이 만들어낸, 생명의 살아 남기 위한 무한 투쟁의 연속성 위에 인간은 존재하게 되었고, 인간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그들 중 하나인 나, 나는 무엇으로 존재의 가치를 남기고 떠날 것인가. 죽음에 어떤 의미를 두려고 하지 않는다. 소멸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두고 싶지는 않다. 다만 무의식 어딘가에서 그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 하나의 개체로서 느껴질 뿐이다. 나를 무엇으로 나로 존재하게 하는가. 나의 없어질 가치는 무엇으로 가치 있게 할 것인가. 세상에 내가 있었음을 남기려 한다. 그래서인지 세상을 향에 떠들고 싶었다 ‘나의 생각을’. 그래서 시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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