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싸프디 Nov 22. 2022

자의식 과잉 리뷰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바르도> (2022년)

그제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 당일에 본 영화는 반드시 그날 글을 쓰리라 결심했건만 미루다가 이제야 글을 쓴다. 기억이 많이 사라졌지만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보려 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에 대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술적 리얼리즘에 대해 생각했다. 이냐리투 감독의 전작 <버드맨>, 에밀 쿠스투리차 감독의 <언더그라운드>, 그리고 그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의 고독>까지. 이어진 생각은 그런 양식의 예술이 등장하는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하는 호기심이었다. 우리나라에는 마술적 리얼리즘 영화가 내 기억으로는 없다. 이탈리아는 네오리얼리즘, 특히 펠리니의 영화가 있다.(네오리얼리즘과 마술적 리얼리즘의 뿌리가 일치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면 쿵짝쿵짝 대는 라틴계 음악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춤을 추는 게 떠오른다. 그리고 전쟁의 그림자가 그 위를 드리우고 있다. 경쾌한 음악, 춤, 그리고 전쟁의 그림자. 이 묘한 분위기가 마술적 리얼리즘 영화의 특성이리라 생각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작품이 탄생하는 조건은 아마도 불안정한 정치 상황, 내전 혹은 전쟁인 것 같다. <바르도>는 멕시코와 미국의 전쟁 175년 이후를 다룬다. 멕시코의 정치 상황, 경제 상황은 처참하다. <언더그라운드>는 제2차 세계대전, 냉전, 유고슬라비아 내전, 즉, 세 번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백 년의 고독>은 가상의 라틴 도시 '마콘도'를 배경으로 자유파와 보수파의 대립을 다룬다.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와 정치적 불안정함이 충돌하여 탄생한 양식이 마술적 리얼리즘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의식 과잉에 대해...

일부 관객들이 <바르도>를 자의식 과잉이라 비판한다. 나도 일부 동의하지만, 이토록 흥미로운 자의식 과잉은 바람직하다 생각한다. 진짜 재미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는, 단순히 관객을 고문하기 위해 만든 자의식 과잉 작품을 꽤나 접해봤기 때문에 이 정도면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 유튜브에 들어가서 대학생 단편영화 몇 편만 보면 된다. (정성일 평론가가 과거에 단편영화제 심사위원을 했던 후기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몇 날 밤을 새 가며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떤 영화가 자의식 과잉이고 어떤 영화가 제대로 만든 영화인지 구분이 간다고 했다. 어느 단편영화제 심사든 한 편씩 등장하는 영화가 있는데 흰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 나체의 남자가 한 명 나와서 자위를 하는 영화라고 한다. 그런 걸 볼 때면 심사 때문에 급하게 먹은 짜장면이 도로 나올 거 같다고...)


하지만 <바르도> 다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하고 그게 관객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장면, 특히 데이빗 보위의 'Let's Dance'를 배경으로 실베리오가 위적 춤을 추는 장면은 자의식 과잉이 맞는 것도 같다.) <바르도> 영화 전체를 자의식 과잉이라고 보는 건 이 영화가 실베리오의 자의식을 훑으며 진행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생긴 오해라고 본다. 영화를 다 보면 알겠지만, 혼수상태의 실베리오가 자신의 기억을 되뇌거나 상상을 불어넣는 의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영화이다. 영화 중간중간 틈입하는 마술적 설정들은 그게 실베리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자의식을 다룬 영화를 자의식을 다뤘다는 이유로 자의식 과잉이라고 하는 건 무리가 있다.(사랑 영화를 사랑 과잉이라고 할 수 없듯이!)


영화의 시작, 실베리오가 사막 한가운데를 뛴다. 그의 완벽한 시점 쇼트로 그의 그림자만 그의 존재를 드러낸다. (언제나 이냐리투의 영화는 영상미가 천국급이다. 이번에도 임마누엘 루베츠키가 촬영감독인 줄 알았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온 이름은 다리우스 콘지였다.) 첫 쇼트를 실베리오의 완벽한 시점 쇼트로 찍어서 관객이 그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후 펼쳐지는 영화는 실베리오의 의식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리라. 따라서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받아야 할 가이드는 첫 쇼트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망측한 전개가 등장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실베리오의 의식이겠거니 생각해주세요... 뭐 이런 뜻이 아닐까?


최고의 장면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영화에 빠져있던 의식이 현실로 돌아오며 '이 장면을 보려고 이 영화를 보러 온 거구나.'라는 운명론적 인식을 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 영화에도 그런 장면이 있었다. 실베리오가 어머니의 집에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거리로 나와 걷는다. 어느 음식점에 들러 혀 요리를 시키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털썩하고 쓰러진다. 그에게 다가가 어디가 아픈지 묻지만 그는 '나는 실종됐다.'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그대로 쓰러져 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쓰러지고 결국 실베리오 외 모든 사람들이 쓰러진다. 실베리오는 그들을 지나쳐 어딘가로 계속 걷는다. 그때 해가 지고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세계처럼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그가 거리를 지나 도착한 곳에는 아즈텍을 점령했던 코르테스가 아즈텍 원주민의 시체 무더기 위에 앉아 있다. 내가 운명론적 인식을 하게 된 순간은 코르테스를 만나기 직전 등장한 한 쇼트인데, 그냥 텅 빈 초현실적 멕시코 거리를 실베리오가 걷는 쇼트이다. 그 쇼트를 봤을 때 순간적으로 잉마르 베리만의 <산딸기> 속 꿈 시퀀스가 생각났다.(이냐리투는 거장의 쇼트를 훔쳐오기로 유명한데, 혹시 <산딸기>의 그 장면을 참고한 건 아닐지...)


마무리

인간의 자의식은 모두 흥미롭다. 아무리 재미없는 사람일지라도 정리되지 않은 자의식을 그대로 들춰볼 수 있다면 아주 재밌을 거다. 한데 이 영화는 이냐리투라는 재주 넘치는 감독의 자의식이니 흥미는 보장할 수 있다. 가족 서사의 감동도 있다. 하여튼 추천.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얄팍한 홍상수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