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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취생 Sep 27. 2024

출장 중 사색 (11)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항상 여행이나 출장이나 시작보다 마지막을 좋아한다. 여행마저도 하나의 과제라고 생각해서일까? 무엇인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는 안도감 같은 걸까?

 어찌 되었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드는 새벽이다. 1월에 나왔는데 벌서 9월이 되었다. 예상보다 많이 긴 시간이었다. 약 8개월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Time is fliying by. 정말 정말 너무 빠르게 시간이 지나갔다.


 이제 이틀 뒤면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잠이 오지 않아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글을 쓴다. 중국 시간 새벽 3시 물론 4시간 뒤에 다시 출근을 해야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력서를 썼다. 이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둑질도 그렇고 무슨 일이든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다. 나에게 해외 출장이 그랬다. 첫 직장에서도 3년 동안 1년에 9개월 이상 해외 생활을 했다. 그리고 이 경험은 나의 퇴사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해외 생활은 좋은 점도 많고 한 번쯤은 경험해 보라는 주재원 선배들의 이야기도 있지만, 막상 옆에서 보는 그들의 모습은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금전적인 메리트는 확실히 끌리긴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돈이 필수이긴 하지만, 행복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가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은 백수 생활을 통해 알게 되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은 그 가치를 매길 수 있지만, 백수가 되고 가치로 매길 수 없는 것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런 나의 주장에 반론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고 했다. 심지어 사랑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은 맞을지도 모른다. 다만 돈으로만 구매한 사랑은 돈이 없으면 사라진다. 그런 사랑도 사랑이라면 그 말은 맞다. 솔직히 돈으로 퇴직을 사고 싶다. 퇴직은 미래의 나에게 돈을 주고 사야 한다. 미래의 내가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을 지금 줄 수 있어야 퇴직을 살 수 있다. 난 지금 미래의 나에게 한 푼의 돈도 줄 수 없는 상황이다. 로또가 당첨되어야 나는 퇴직을 살 수 있다.


 출장 기간 동안 좀 더 많은 발전적인 일들을 하고 싶었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과거 3년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출장이 길어지면 사람은 무기력해진다. 회사와 숙소를 반복하여 다니다 보면 어느새 수분이 빠져 말라비틀어진 귤 같은 나의 내면을 마주하게 된다. 일단 내면이 마르기 시작하면 외면도 볼품없어진다. 출장기간 동안 읽으려고 계획했던 15권의 책도 10권밖에 읽지 못했고, 어학 공부도 몇 번 하지 못했다. 운동은커녕 살만 찌고, 몸에 좋지 않은 담배만 늘었다. 분명 금연하기로 가족과 약속도 하고 스스로 다짐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과거 전 직장을 퇴사하기 전의 모습과 비슷해진 내 모습을 발견했다. 불안감에 휩싸였다. 분명 이런 상황에 노출될 수 있으니 조심하자고 생각했지만, 사람은 환경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또 한 번 배우는 순간이다. 역시나는 역시나였다. 나는 또 한 번 겸손해진다. 혹은 자기 비하에 빠진다. 겸손과 자기 비하는 한 끗 차이다.


 한 심리학자는 부에 따라 취향이 다른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이는 취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란 말이 된다. 어떤 환경에 노출되느냐에 따라 취향은 바뀌는 것이다. 부에 따라 취향이 바뀌지만, 여유에 따라서도 취향이 바뀐다. 백수의 생각과 취향은 백수라는 환경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회사원의 취향이 생겨 버렸다. 퇴근 후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졌다. 정말 적절한 타이밍에 출장이 끝나서 다행이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출장 중 사색을 마친다.


 











 마지막 출장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출장지에서 글을 이어 쓰고 있다. 그랬다. 다시 출장을 나왔다. 한국으로 복귀하기 하루 전 출장지의 주재원들과 중국 동료들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있는 동안 회사에서는 나의 다음 출장 계획이 결정되었다. 인천 공항에 비행기가 내리고, 휴대폰을 켜자 문자가 쏟아졌다. 나는 한국에서 추석만 보내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나에게 출장은 마치 공포영화의 살인마같다. 살인마를 처리하고 '이제 끝났어'라 말하고 뒤돌아서는 순간 그 살인마의 손이 꿈틀거리는 그런 공포영화의 살인마. 이미 '이제 끝났어'라고 말하는 순간 공포영화 클리셰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출장 중 사색을 겨울까지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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