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면적, 그리고 자유의지에 관한 생각
요즘 희망퇴직을 받는 회사가 많은 것 같다. 현재 근무 중인 회사도 예외가 아니다. 불혹의 나이가 넘은 내가 조직의 막내였으니, 조직 자체가 결코 젊다고 할 수는 없다. 동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난 가늘고 길게 살기로 했어." 혹은 "어차피 사는 인생 굵고 짧게 살 거야."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무엇인가 찜찜함을 느꼈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에 면적이 있다면, 모든 사람의 면적이 동일할까? 나는 면적은 동일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각자 다른 삶의 면적을 가지고 있고,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어난 시대, 태어난 나라, 태어나 인연을 맺는 사람 등 이 모든 환경에 따라 우리 삶의 면적은 달라진다. 그래서 가늘게 살아도 짧게 사는 사람이 있고, 굵게 살아도 길게 사는 사람이 생긴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그런데 제품도 공평하지 않다.
그리고 이 불공평함은 마치 처음부터 결정된 것처럼 느껴진다.
IT 제품의 품질 관리 업무를 하다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같은 BOM(bill of materials)을 가지고 제품을 만들어도, 제품들 마다 수명은 다르다. 판매한 지 하루 만에 고장 나는 제품이 있는가 하면, 보증 수명이 훨씬 넘어도 잘 작동되는 경우도 있다. 회사는 불량품의 분석을 수행하며 나름의 이유를 찾는다. 수명에 영향을 미치는 인자는 부품의 내구도, 제품 사용 시간과 온도 그리고 사용하는 전압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이런 인자를 극복하기 위해 부품을 개선하고 생산 환경을 통제하기도 한다. 이렇게 통제된 환경에서 생산되는 IT 제품들의 수명도 각기 다른데, 통제되지 않는 환경에 노출된 인간의 수명은 더욱 다를 수밖에 없다.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공존한다는 가정하에, 우리는 때로는 굵게 때로는 가늘게 사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낸다고 믿고 살면 좋긴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나는 자유 의지와 결정론은 공존한다고 믿지만, 내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결정론 밖에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확실히 믿음과 현실 인정은 다르다. 나의 선택이 이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 혹은 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나의 자유의지마저도 이미 결정론 안에 포함된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어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내가 이 선택을 하도록 상황이 나를 유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카페를 직원에게 물려주고 결국 재 취업을 하였다. 첫 직장을 그만둘 때 다시는 이 쪽 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또 해외를 떠 돌며 10년 전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런 현재 나의 모습은 코로나와 경기 침체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못 할 것 같다. 결국 벌어질 일이 벌어졌고, 지금 이 상황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굵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나는 이런 추상적인 표현에 약하다. 굵게 산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이 생각하는 굵게 사는 것은 회사에서 자신의 생각을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거나, 주식에 대부분 자산을 투자하는 등 대체로 선택 뒤에 따라오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카푸어, 하우스 푸어나 욜로족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애국자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일보다 지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거나, 명예나 신념을 위해 기꺼이 불이익을 감수하는 사람들을 굵게 산다고 표현하는 것 같다. 물론 그럴 경우 불 이익으로 짧게 살 확률도 높아질 것 같긴 하다.
그러면 반대로 가늘게 사는 사람은 미래에 올 불이익을 피하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길게 살 확률도 높아질 것 같다.
나는 어떤 방식의 삶을 사는 사람일까? 일단 명예나 신념이 있는 것 같지만, 그 가치를 일상의 가장 상위에 두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종종 미래에 닥쳐 올 불이익에 대해서 걱정하며 산다. 그렇다고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 걱정만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예상되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 행동을 한다. 나는 위의 정의에 따르면 가늘게 사는 사람에 가깝고 그래서 이런 나의 성향이 지금의 내 상황을 만들었지 않았을까?
자유 의지를 보는 방향에 따라 결정론과 자유 의지는 공존한다고 생각하거나 결정론만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와 세상과의 관계를 상호 작용하는 관계로 보는가 아니면 나는 세상에 속한 하나의 개체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공존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속한 하나의 개체로 본다면 결정론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대체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공존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자유의지를 부정한다면, 죄에 대한 개념이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개념이 없어지면 형법도 없어진다. 범죄에 대해 형벌을 정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유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형벌을 정할 때 3가지를 고려한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고의성, 위법성, 책임능력이다. 이 3가지를 판단해서 죄에 맞는 형벌을 정하는데, 이 중 한 가지라도 해당되지 않으면 행위에 대한 죄명이 바뀌거나 처벌을 받지 않게 된다. 그중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고의성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고의성 판단이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공존한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만약 나에게 총이 있고, 이 총을 사용한다면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이런 경우 처벌을 받게 되겠지만, 전쟁 상황에서는 또 달라진다. 전쟁에 노출된 군인이 총을 사용한다면 분명 살인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것을 살인죄로 처벌하지 않는다. 물론 누구의 생명을 빼앗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말이다. 내가 꼭 적으로 정의된 사람에게 적의를 가지고 총을 사용하더라도 고의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나의 생명과 상대의 생명 모두 동일하고 내가 상대의 목숨을 빼앗지 않으면 내가 빼앗기는 상황은 참으로 끔찍하고 비극적이다. 이는 자유 의지는 없고 삶은 결정론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에서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을 보면서 특히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주인공인 이정재는 이런 결정론 속에서도 자유 의지는 공존할 수 있다고 외치는 투사 같았다.
분명 세상과 나는 상호 작용한다고 믿는다. 나는 누군가의 세상이고 누군가는 나의 세상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에 의해 나는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분노를 느끼기도 하며,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이는 누군가도 나에 의해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회사에 출근 한 나의 모습을 관찰해 보면 회사와 나는 상호 작용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굵거나 길게 산다는 표현에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휴일이다. 오랜만에 야외에 나와 글을 쓰며, 나는 자유 의지와 결정론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소극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지금 이 풍경을 보며 사색하는 이 시간이 아마도 내가 세상과 상호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