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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중 사색 (14)

정사유(正思惟), 바름에 관한 사색

by 백취생


현재 근무하고 있는 회사의 내 책상 책꽂이에는 몇 권의 책이 꽂혀 있다.
그중에는 『평정심, 나를 지켜내는 힘』과 『무소유』가 있다.
이 책들은 가끔 지칠 때 꺼내 읽기 위해 두었다.

일상 속에도 '관성'이 존재한다.
지침이라는 감정을 방치하면, 몸과 마음은 점점 더 빠르게 소진된다.
나는 이 지침의 관성에 늘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한번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몸과 마음을 회복하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왜 지치게 되는 것일까?


몸과 마음을 가진 생명체라면 지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배가 고파도 지치고, 너무 많이 움직여도 지친다. 식사나 운동량을 잘 조절하더라도, 때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지치기도 한다.

몸과 마음은 하나로 묶여 있어서 한쪽이 지치면 남은 한쪽도 결국 지친다. 사람마다 타고난 체력과 정신력은 다르기 때문에 지치는 사정과 속도는 다를 수 있지만, 결국 지치게 되었을 때 힘든 것은 똑같을 것이다.


육체적으로 지친 경우는 비교적 회복이 쉬운 편이다. 왜냐하면 검사를 통해 지침의 원인을 정량적으로 확인 가능하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혈액 검사, MRI, X-ray 같은 검사로 피로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고, 수치화된 데이터를 통해 질병, 과로, 영양 부족 같은 문제를 찾아낼 수 있다. 문제를 알면 해결책도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지친다는 건 조금 다르다. 지친다는 느낌이 호르몬의 문제인지, 아니면 외로움이나 정서적 결핍 같은 심리적 이유에서 오는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항상 정신적인 지침은 육체적인 부분과 일부 겹쳐서 나타나기 때문에 해결책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

예전에 불안 장애 증세로 정신과를 찾았던 적이 있다. 병원에서는 공황 장애로 발전하기 직전 상태라고 했고, 몇 가지 약도 처방해 주었다. 의사는 나에게 불안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완치가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인지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퇴사하고 한 달이 지나자 불안 장애는 말끔히 사라졌다. 그래서 그때의 나는 '직장이 문제였구나'라고 물리적 공간이 지침의 원인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지침의 원인이 그 공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 안에도 지침의 원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에게 ‘지친다’는 감정은 ‘괴롭다’는 감정과 닮아 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같은 문제처럼, 괴로우면 지치고 지치면 다시 괴롭다. 그래서 이 악순환 속에서 나는 '지친다'를 극복하기 위해 괴로움(苦)에 관한 많은 사색을 했다. 나에게 불행은 지금 현재 '괴롭다'라고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순간순간 불행하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솔직히 불혹이 넘도록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즐겁게 사는 삶보다는 괴롭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에 좀 더 가까울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불교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관심이 많다. 특히 불교의 교리를 보면 고(괴로움)에 대한 관찰과 사색이 많다. 이는 삶 자체가 원래 고통스럽다고 표현하는 쇼펜하우어가 남긴 말과 비슷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불교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8가지의 고통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 그중 원증회고(怨憎會苦)라는 말이 있는데, 만나기 싫지만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고통을 의미한다. 나는 일 터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이런 괴로움을 겪어 보았다. 이는 정말 아주 먼 옛날 인류가 무리를 지어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난 고통이고, 아마 지속적으로 경제생활을 하는 한 겪게 될 필연적인 고통일 것이다.


그리고 구불득고(求不得苦)라는 표현도 있다. 이 것은 세상일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음에서 오는 고통을 의미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표현 하나가 모든 고통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불교에서는 8가지 고(괴로움) 중 하나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일상에서 무엇인가 얻고자 했지만 그것을 얻지 못해서 겪는 고통이고, 죽은 자가 아닌 이상 매일매일 무엇인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테니 이 또한 살아있는 한 겪게 될 필연적인 고통이다.


불교에서는 앞서 말한 괴로움이 집착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집착을 멸하기 위한 8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 방법에는 올바른 견해,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처럼 모두 바를 정(正)이 붙는다. 그래서 팔정도라고 부른다. 나는 집착을 멸하기 위해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연 바르다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한 번쯤 고민해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런 추상적인 단어를 평소 깊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아주 간혹 이 단어가 가지는 표면적인 의미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자들에게 휘둘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상에서 바르다는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하는 말들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바름의 안에서 옳은 것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은 자신의 옳음만을 바름으로 포장하여 다른 옳음들은 바르지 않다고 매도해 버린다. 그리고 상대방을 자신의 통제에 두려고 한다.


바르다는 것은 무엇이고, 무엇이 바른 것일까?


대체로 이런 추상적인 의미는 평균의 생각에 수렴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바른 것은 무엇인가 이야기하면 공정한 것 혹은 정의를 떠올린다. 실제로 이런 주제로 많은 미디어가 제작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많은 미디어가 제작되는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바른 것은 공정하고, 바른 것은 정의를 대변한다. 그리고 바르지 않은 것은 공정하지 않으며, 정의(正義) 롭지도 않다. 물론 사전적 의미로도 정의(正義)는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고 정의(定義)되어있다.


그런데 바른 것이 공정하고 정의롭다로 가정한다면 문제는 무엇이 공정이고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진다. 나는 '마이클 센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정의와 공정은 시간과 공간 혹은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사회를 더 정의롭고 공정하게 만들려면 나의 삶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두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겸손할 필요가 있구나.'


물론 이 책은 상품이 아닌 작품이기에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좋은 책이다. 그래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분명 많을 것이다.


바르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할 순 없지만. 적어도 소통을 통한 이해와 겸손한 자세는 바른 것 같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을 읽다 보면 맑은 가난이라는 단어가 눈에 스민다. 맑은 가난은 무소유를 표현하는 말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가지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참 멋진 표현이다. 그리고 나는 이 맑은 가난도 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편 이렇게도 생각해 본다. 무엇이 바른 것인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지만, 반대로 대부분 사람들은 무엇이 바르지 않은 것은 잘 아는 편이다. 그럼 이 바르지 않은 것의 정반대는 바른 것이 되지 않을까?


예를 들어 도움을 받았을 때 감사표현을 하지 않기. 타인의 단점만 보기. 책임 회피하기 처럼 많은 사람들이 바르지 않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은 말과 행동의 정 반대가 되는 말과 행동, 즉 항상 감사 표현하기, 타인의 장점만 보기,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는 정업(바르게 행동하기)과 정어(바르게 말하기)가 될 것이다.


나의 지침 그리고 고통을 잘 관찰하다 보면, 집착이라는 단어가 어떤 대상에 묻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집착이라는 것 자체가 바르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서 맑은 가난처럼 필요한 것을 가지려고 노력하려면 집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집착이 묻은 대상(직업, 인연, 물질 등)이 과연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불필요한 것인지 따져보는 것이 중요해진다. 불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면 내려놓아 괴로움을 줄여야 하고, 만약 필요한 것이라면 비록 괴로울지라도 괴로움을 받아들일 각오가 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한 삶은 원래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지치고 괴로운 것은 너무 당연하다. 다만, 너무 많이 지치면, 회복이 힘드니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 지치고 괴로워야 한다.


정사유란 매 순간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라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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