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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중 사색 (15)

사색의 이유 : 양자 역학에서 만나는 타인의 시선

by 백취생



학창 시절에는 독서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즐기는 편이다. 그리고 독서는 사색에 많은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아는 만큼 사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출장지에 양자물리학 관련된 서적 한 권을 가지고 왔다. 그 책에는 양자 물리학에 대한 여러 이론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그중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 읽으며 나의 삶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코펜하겐 해석의 주 내용은 이렇다. 세상은 우리가 보기 전까지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우리가 보면 비로소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입자는 관측되기 전까지 확률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왠지 나도 하나의 입자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나와 세상이 있다. 세상이 나를 보기 전까지는 나의 존재는 확률로만 존재하지만, 세상이 나를 발견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어떤 의미로 결정되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만 관측되기 전까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의해 어떤 의미로 결정되는 나. 진짜 나는 어떤 특징과 의미를 가질까? 양자 입자는 두 가지의 특징을 가지는데, 그것은 바로 운동량과 위치이다. 그리고 한 가지의 특징이 부곽 될수록 다른 한 가지의 특징은 사라지는 데, 이 현상을 불확정성 원리라고 이야기한다. 즉 위치를 정확히 알 수록 입자의 운동량을 점점 더 알 수가 없고, 반대로 어떻게 운동하는지 알게 되면 위치를 알 수가 없게 된다. 만약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히 측정한다면, 고전 물리학 이론처럼 입자의 다음 움직임을 완전히 예측할 수 있지만, 양자 물리가 존재하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


세상은 나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을까? 만약 예측할 수 있다면, 세상은 정확히 나를 이해(측정)했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내향적이면서 외향적인 사람이다. 나의 내향적인 면이 드러날수록 나의 외향적인 면은 알 수가 없어진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나는 내향적인 면만 관측될 것이고,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세상)은 내가 외향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미래에 어떤 상황에 따라 나는 내향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지만, 외향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결국 나는 누군가에게 관측되기 전까지는 확률로 존재하고, 관측이 되더라도 나의 진정한 본질을 보여줄 수가 없다. 회사라는 현미경, 자녀라는 현미경, 부모라는 현미경 등 나를 관측하는 세상의 현미경은 모두 다른 종류의 파장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그들에게 관측된 나의 모습은 모두 같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나(세상)에 의해 관측되는 타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내가 가진 현미경으로 누군가를 관측했을 때 나는 관측당한 사람의 전부를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본모습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에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본연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세상 누구도 나를 제외하고 나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문득 입자에 만약 자아가 있다면 입자는 스스로 자신이 지금 어디에 (위치) 있고 무엇(운동)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렇다면 입자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존재지만, 아이러니하게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


'난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과거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남긴 소크라테스는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타인과 대화 없이는 완전한 자기반성이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이라는 이론을 주장했다. 이 이론은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롭고 주체적인 존재로 느끼지만 타인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어떤 객체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샤르트르의 생애가 양자 물리학이 발전하는 시기와 겹치기는 했지만 양자 물리학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양자 물리학의 이론과 일부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라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관측당하지 않으면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이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나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일정 부분 자각하게 된다, 내가 이 글을 쓰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없다면, 난 글을 쓴 것일까?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는 것이 실존주의 철학의 캐치프라이즈이다. 모든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탄생한다는 본질 주의와 존재 의미는 탄생 이후에 결정된다는 실존주의의 상반된 입장은 마치 고전 물리학과 양자 물리학의 차이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합리론과 경험론의 차이 같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견해 또한 세상에 관측을 당해 생겨난 개념이고,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타인의 시선에 너무 매몰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시선도 결국 나를 확률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려 줄 뿐 100%의 나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타인의 시선으로 알게 된 나를 100%의 나로 정의 한다면, 생존에 문제가 생긴다. 세상에는 따뜻하고 바른 시선도 있지만, 어떤 시선은 냉소적이며 파괴적인 시선도 있다. 타인의 시선에 너무 매몰되면 바르지 않은 (냉소적이며, 파괴적인) 시선에 의해 나의 삶은 붕괴될 위험에 놓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관측자는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라는 두 특징을 모두 측정할 수 없다. 하지만 관측자인 우리가 입자의 이동을 예측할 수 없을 뿐이지, 어쨌든 입자는 움직이고 있다. 이는 입자 스스로 다음에 어디로 움직일지 결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나만의 이론을 조심스럽게 주장해 본다. 그리고 나의 주장에 따라 우리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감과 동시에 내가 나의 타인이 되어 나를 관측해야지만 진정으로 '난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 가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나의 타인이 되어 나를 관측하는 것이 바로 사색이고, 그것이 사색을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하며 오늘의 사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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